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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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벽지>는 미쳐가는 한 여인이 쓴 열한 번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사인 남편 존은 신경쇠약증에 걸린 아내를 위해 유서 깊은 저택에서 여름 한 철을 보냅니다. 주인공은 글을 쓰거나 생각을 하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집니다. 그녀가 머무는 넓은 이층 방은 아라베스크 무늬의 누런 벽지로 발라져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그녀는 벽지의 무늬를 들여다봅니다. 네 번째 일기에서 그녀는 벽지 안에 자신만 알아보는 무언가가 있다고, 다섯 번째 일기에서는 벽지의 앞 무늬와 뒷 무늬가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결국 증상은 심해져, 누군가가 무늬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벽지 밖으로 나와 기어 다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창문마다 기어 다니는 여자를 봅니다. 아마도 기어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타자화한 듯합니다. 그녀는 급기야 손이 닿는 모든 벽지를 다 뜯어 버립니다. 이 광경을 보고 기절한 남편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그녀는 계속 기어 다닙니다. 벽지를 다 뜯어냈으니 아무도 자신을 다시는 가두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기절한 남편 몸을 기어서 넘어갑니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다소 기괴합니다. 저자가 직접 쓴 누런 벽지를 쓴 이유를 읽으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저자 샤롯 퍼킨스 길먼도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했지만, 당시 신경 질환 전문가들이 내린 처방은 두뇌활동을 하지 않고 최대한 가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자가 그 처방을 따랐을 때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졌습니다. 그녀는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하고 일을 시작했으며 그 결과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단편을 통해 광증으로 떠밀려 가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남편의 친절한 보호는 실상 아내에 대한 억압이었고, 억압받는 아내는 결국 정신적으로 스러져갔습니다. 이 소설은 당시의 잘못된 치료법을 신랄하게 드러낸 페미니즘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합니다. 샤롯 퍼킨스 길먼은 여성 인권 신장을 이끈 미국의 선구적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녀는 이혼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법적으로 이혼했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성평등이 이루어지려면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내로라 출판사는 이 작품을 영한대역으로 출간했습니다. 19세기 미국 작품인데, 영어 문장은 쉽고 명쾌하며 한글 번역은 무척이나 자연스럽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성 갈등이 첨예화하며 남성과 여성 모두 서로에 대해 혐오의 발언을 쏟아냅니다. 이런 때에 이 책을 한 번씩 읽으며, 남자와 여자 모두 독립된 인격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며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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