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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4월
평점 :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으면서 극 중 인물들의 이름과 역할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내용은 얼추 이해했는데, 문학작품을 제대로 즐겼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독서였습니다. 이번에 출판사 ‘레인보우 퍼블릭 북스’에서 펴낸 이 책은 가독성이 뛰어납니다. 전문 번역가가 고루한 표현을 현대적 언어로 과감하게 번역했고, 등장인물을 본문 좌우로 배치해서 마치 연극을 보는 것처럼 극중 대화를 따라가기 편했습니다. 줄 간격도 넉넉하고 여백도 많아 책장을 넘기는 재미도 있습니다. 덕분에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 독서에서 등장인물들이 좀 헛갈린 것은 여러 인물이 변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는 변장 인물들을 괄호로 밝히고 있어서 혼동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영주(하인으로 변장), 호르텐시오(음악교사 라티오로 변장), 트라니오(루텐티오로 변장), 루첸티오(가정 교사 캄비오로 변장), 등과 같이 표시해 놓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왜 이렇게 변장하는 인물들을 많이 배치한 것일까요? 아마도 가짜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서막에서 크리스토퍼 슬라이가 영주의 속임수에 속아 자신을 진짜 영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말괄량이 카타리나가 페트루키오에게 길들여져서 남편의 권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이나, 루첸티오와 결혼한 비앙카와 호르텐시오와 결혼한 과부가 오히려 남편의 부름에 반기를 드는 일이나, 모두 본래(?)의 자기 정체성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정체성이란 외부 사람이나 외부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진짜 자기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셰익스피어의 문제작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작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페트루키오가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셰익스피어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를 감안한다고 해도 결혼을 신분 상승이나 부의 증식을 위한 수단처럼 여기는 대화가 불편합니다. 또 페투르키오가 대낮의 해를 달이라고 하자 카타리나가 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페투르키오가 “저건 달도 맞고, 별도 맞고, 내가 되라 하는 건 무엇이든 다 맞소”(p. 208)라며 억지를 부립니다. 결국 카타리나는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바로 그게 저것의 이름이에요. 그러니 이 카타리나도 그렇게 부를 거예요”(p. 209)라고 순응합니다. 이런 말같지도 않는 ‘길들이기’를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은 오히려 가부장 사회의 허세와 부조리를 풍자한 것은 아닐까요? 무척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연극이 공연되면 꼭 한번 관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