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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ㅣ Art & Classic 시리즈
루이스 캐럴 지음, 퍼엉 그림, 박혜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평점 :
“무슨 저런 책이 다 있담. 그림도 없고 대화문도 없는 책이라니”(p. 15). 앨리스는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힐끗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릴 적 만화책을 보다 부모님께 들켜 혼났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만화책은 책이 아니라는 통념이 있었죠.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그림이 있는 책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살 때, 출판사나 역자보다 그림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살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장 9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샀네요. 그래도 후회가 없습니다. 그림 하나, 문장 하나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독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RHK에서 펴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마음에 쏙 드는 이유 중 하나도 애니메이션 작가 퍼엉의 그림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동화책의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앨리스가 꿈에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이야기이니, 말도 되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주인공 앨리스는 주머니 달린 조끼를 입고 시계를 꺼내 보는 토끼를 쫓아 커다란 굴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앨리스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녀는 생각합니다. “내가 밤사이 변한 걸까? … 내가 똑같지 않다면 다음 질문은, 그럼 대체 나는 누구지? 세상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퀴즈야”(p. 38).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알쏭달쏭한 퀴즈를 평생에 걸쳐 풀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을 때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은 문장들을 붙잡고 생각해 봅니다.
‘7장 엉망진창 티파티’에서 앨리스는 정답도 모르는 수수께끼를 묻는 데 시간을 낭비하느니 다른 걸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자 장수는 말합니다. “네가 나만큼 시간을 잘 안다면, ‘그것’을 낭비한다고 하지 않을 걸. ‘그’를 낭비한다고 하겠지”(p. 139). 시간은 왜 ‘그것’이 아니고 ‘그’일까요? 시간은 인간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라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어른들은 시간을 물질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노력한 시간들은 정답을 찾지 못했어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앨리스의 멋진 꿈이 아니라, 작가가 이름도 밝히지 않은 앨리스 언니의 생각으로 끝납니다. “언니는 눈을 가만히 감고 앉아,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있는 건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비록 눈을 다시 뜰 수밖에 없고, 그러면 모든 게 지루한 현실로 돌아가겠지만 … 어른이 되어 가는 시간 동안, 앨리스는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웠던 마음을 어떻게 간직할까(생각해 본다)”(p. 253).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의 사랑스런 마음을 간직할 수 없는 것일까요?
나이 들어 그림으로 가득한 책을 보는 일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흥과 사색이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린이들만 읽는 동화책이 아닙니다.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글들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 때문에 세상은 지금보다 더 잘 돌아갈 거다!”라고 말하는 공작 부인에게 앨리스는 조그맣게 속삭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는데요. ‘모든 사람이 자기 일에만 신경 쓰면 세상이 더 잘 돌아갈 거’라고요”(p. 178). ‘사랑’과 ‘자기 일에만 신경 쓰는 것’은 정반대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같은 뜻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코로나19 덕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지금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