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이나 혹은 교보, 예스 등의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책을 상당히 읽는 편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현실적으로는 책은 읽는 사람만 읽거나 어쩌다 한두 번 읽는 사람 제외하면 거의 읽지 않는 편입니다. 주변에서도 다 비슷할 듯합니다. 학교 다닐 때도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책 읽기가 여간 자의적인 선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읽고 싶다고는 하더라도 책에 대한 소비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도 독서를 권장하는 이유가 단순 입시를 위한 독서일 뿐이지 순전히 책을 읽고 삶의 바뀌는 경우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뭐 선생님이라도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기도 하죠. 대학에서도 전공 서적이나 관련 논문 이외에 자신이 업이 아닌 달리 추구하는 관심분야는 거의 도외시하는 수준입니다. 기본적으로 사회가 책을 멀리하도록 나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알라딘 서재에 책 읽고 100자 서평이라도 쓰는 분들은 대단한 거예요.) 책은 자신의 성찰을 요구하고 지식을 토대도 지성으로 나가길 유도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왜 안될까요? 독서의 근육을 키우기의 시작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거든요. 아이 때에는 동화책 사다 주며 장차 아이가 감성이 풍부하고 올바른 사고를 하는 품행이 단정한 아이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나갈수록 책을 가까이하면 공부에 지장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학교 성적에 매몰되어 있으니 책 읽기보다는 공부하기를 더 바랍니다. 그러면 책을 읽을 근육은 자라다가 멈추고 그러다 사라지고야 맙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카메라 메고 다니다 보면 팔자 좋은 놈 소리 가끔 듣습니다. 한량처럼 돌아다니는 게 하릴없이 다니는 줄 압니다. 사진으로 사유를 하겠다는 생각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의 시선은 딱 거기서 머물러 있고 머물러 있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게 없으니 보이는 것도 편협할 따름이거든요. 이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이 자습시간에 시집을 펴 놓고 있으면 " 이 세끼 팔자 편한 놈이라거나 앞에 닥친 입시의 현실을 절박성을 전혀 못 느끼는 한심한 놈"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고작 교과서 지문에 나오는 시를 배우면 이게 문학적인 소양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책이란 일반적인 시각이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할 사람은 없는데 막상 책을 펼치게 되면 원칙적으로 동의했던 태도가 사뭇 달라지거든요. 책이란 관념에서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이기 때문이거든요. 원론적으로는 읽어야 한다지만 현실적으로는 책에 투자할 시간이란 기회비용 대신에 뭐라도 실질적으로 해야할 것을 하도록 요구하고 노력하는 것을 더 우선시하는 이유입니다. 최근 들어 기업체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가끔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건 대부분 인문학적인 소양으로 연결되지 못 합니다. 언제부터 인문학이 강의로만 이루어졌던가요? 강의 한두번 듣고서 이 강의로 인해서 더 깊은 인문학의 깊이로 이어가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인문학의 보고인 책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쏙 빠져 있습니다. 강의에서도 인문학의 보고인 책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책 읽는 것에 대한 이중적 잣대가 적용되니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기업에는 도서 구입비도 지원한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극소수일 뿐입니다. 대부분은 그런 거 없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을 소비를 반드시 요구 조건인데, 차라리 책 읽을 시간에 일을 더하기를 바라고, 한가하게 책이나 읽을 시간에 업무에 대한 요구의 심리적 구조가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외람될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지성의 수준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좀 낮은 편입니다. 문자의 문맹률은 낮다 하더라도 문장의 문맹률은 60%라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그러니 읽는 것의 수준도 따라서 현저히 차이나 편차가 큽니다. 하다못해 어떤 제품의 사용설명서를 봐도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조차 모를 때도 많습니다. 사용 매뉴얼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상당히 뒤떨어집니다. 읽기의 근육이 멈춘 사람들에게 문장을 해독하고 이해하는 적정 수준에까지 미치지 못하거든요. 최고의 교육열이라는 것은 단순히 타이틀의 문제이지 내용의 문제는 아니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요즘 누구나 다 스마트폰 들고 다니는데요. 단순한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는 사용할 줄 모릅니다. 통화하고 문자 보내고 각종 sns 정도가 입니다. 스마트폰이 일반 퍼스널 컴퓨터(PC)라는 생각은 못 합니다. 그기에는 OS가 있고 메모리가 있고 CPU가 있으니 컴퓨터와 비슷하다는 사용설명서조차 한번 읽는 것도 제대로 보려 들지 않습니다. 현대사회는 조선시대에 알고 있던 지식의 양보다는 몇백 배는 많을 것이고 알아야 합니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르면 찾아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묻기 바쁩니다. 실제로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 보면 이런 경우는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자주 겪는 내용입니다. 아니 네이버 검색조차 하지 않고 묻기부터 먼저 하거든요. 세상만사의 인간이 만든 것들 모두 다 아는 사람은 없으며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모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찾아 가려는 그 길을 모른다는 겁니다. 찾아 보면 얼추 나오고 검색된 내용을 토대로 응용하고 실행하다 보면 자연 알아가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려 들거든요. 찾아서 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알아가는데 들여야 할 시간이 아까운 것인지 찾기를 싫어합니다. 찾으려는 의지와 호기심조차 없어요. 답답하니 네가 나에게 찾아 달라는 식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찾아가는 양식이나 방법은 결국 책의 독서력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가끔 사극 드라마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면 죽을 수 있다"라고 하죠. 알고 있는 내용을 발설하면 자칫 권력에 의해 제거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게 됩니다. 호기심의 싹을 잘라버리는 사회가 된 이유가 바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주는 것만 받아 먹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기도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익힌 사람을 경계하는 사회적 권력구조가 철저히 권력의 힘에 저항을 만나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 습성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비판이 늘어나는 누수 현상을 경계하는 이유는 아닐까 싶었거든요. 특히 역사서를 읽거나 철학과 관련된 책을 읽다 보면 사람은 진보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죠. 인류의 역사가 발전이라는 진보의 가치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 이루어진 탓이 큽니다. 고대 시대에서부터 보수의 가치가 사회를 안정화 시킬 수는 있어도, 발전이란 언제나 새로운 가치라는 기존의 것들을 뛰어 넘으려는 진보 때문에 진일보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안주한 권력에 대해 타락하고 방종하고 오류로 나갈 때 진보는 늘 저항했거든요. 수긍할 역사라면 발전이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책에서 출발하고 진보의 단초를 제공했던 까닭입니다. 그러니 사회의 기반이 보수화되고 기반이 요지부동일 때 책의 역할은 한 방울의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시도를 하게 만들었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권력자들은 지식자를 탄압하거든요. 진시황이 분서갱유하고 히틀러가 책을 불태웠던 이유가 지식을 가짐으로써 저항할 싹을 잘라 버리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이젠 사회와 권력의 힘이 책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책읽은 사람을 뭔가 좀 비활동적인 면을 부각시킨다든지, 비루한 모습처럼 비치게 만드는 인식으로 나타나는 것도 느끼는 부분이거든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가족부터 시작해서 학교, 직장, 각종 모임, 업종별 등등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독서를 통한 관계는 아주 특별하거든요. 어떤 본래적인 관계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겠지만 독서의 관계는 철저히 공감의 바탕 위에서 수립되는 그러니까 의미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회가 책을 등한시하도록 모종의 압력을 이겨 내고 끝끝내 지성의 넓은 바다로 인도하는 등불이 바로 책으로 향한다는 것. 어느 누구는 하루라도 밥 안 먹고살면 죽을 듯이 배고파 하지만 책의 관계에서는 하루라도 글을 먹지 않으면 역시 마음이 고파 허기지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불의에 항거하고 모두가 정의에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될 때야만이 고통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네 오늘도 책 주문 8만 원. 하기에 술값보다야 적습니다. 하루 담뱃값보다야 적습니다. 가장 저렴한 물건에서 가장 고귀한 삶의 가치를 준다는 것. 이것만큼 가치로운 삶의 효율성이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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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7 18:03   좋아요 0 | URL
옮겨 실어야 할만큼의 수준 높게 좋은 글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게다가 다른 블로그글 퍼나르는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닙니다.

꼭히 필요하다면 링크로 인용과 출처 오픈되면 가능합니다..(학계 논문도 인용하거든요.)

제 글이 공유되어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것도 보고 싶으면 알라딘 찾으면 될일입니다.

알라딘 글은 알라딘에서 소비되는 게 맞거든요.알라딘 독자가 알라딘에서 하겠다면 허용합니다만
다른 블로그로로 글이 옮겨지는 것은 허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라딘 서재 블로그 가보니 블로그가 내용이 전혀 없이 비었더군요.신뢰하기도 어렵구요..

그렇게 옮겨 돌아다니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해와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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