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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 - 신예희의 여행 타령 에세이
신예희 지음 / 비에이블 / 2022년 1월
평점 :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갈 줄 몰랐습니다
작년에 아주 재밌게 읽었던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의 신예희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반갑게 집어든 책이다. 처음엔 코로나 팬데믹에 무슨 여행 에세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여행이 너무 가고 싶어서 여행 이야기라도 해야 살 것 같아서 써 내려간 여행타령 에세이였다.

역시 위트와 재치, 유쾌상쾌 인생 분투기의 대가다운 신예희 작가의 즐거운 읽을거리였고 한동안 여행을 못가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주는 시간이었다. 이야기는 주로 여행에 관한 작가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경험, 생각, 느낌, 여러 에피소드 25개가 이어지는 형식이다.
비행기 시간과 나이의 상관관계, ESTJ가 여행하는 방법, 노브라를 디폴트로, 여기까지 와서 스벅이라니, 첫 레게머리와 브라질리언 왁싱, 여행지에서 머리채를 잡는 일, 여행지의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 무사히 돌아온다는 기적 같이 목차의 제목만 봐고 그 흥미진진함은 예상되었고 그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이야기들이다.
스페인 북부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 날이 푸근해서인지 다들 가벼운 차림새인데, 어깨끈이나 후크 등 브라의 일부가 보이는 걸 신경 쓰지 않는 여성들이 많았더랬다. 곱게 자란 유교걸답게 일단 당황했는데, 잠깐, 어머 웬일이야, 저 사람은 아예 노브라인데? 미쳤나 봐!
여러분은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보셨나요? 나의 인생은 털을 뽑기 전과 후로 나뉜다, 라는 건 과장이지만 하고 나면 확실히 좋다. 편하고, 깔끔하고, 쾌적하고, 가볍다. 맨 처음 왁싱을 한 건 치앙마이에서였는데, 여행을 마치고 슬슬 떠날 때가 되니 치앙마이를 추억할 만한 뭔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근사한 타투 같은 걸 하던데 나는 왜 왁싱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요, 저는…. 하여간 인생 첫 왁싱, 이왕 뽑는 거 싹 다 뽑아달라고 했는데 이야, 그게 어찌나 개운하던지 홀딱 반해버렸다. 포르투에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한 번 더 쫘악 했던 것이고. 나 원 참, 다시 한번 말하지만 7,000원이라니 말도 안 되게 쌌다고요.
그렇다고 단순히 웃긴 에피소드 수다떨기에 그치지 않고 결국엔 여행의 의미와 인생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흐름도 인상적이었는데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건 마치 어떤 짧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는 삶의 축소판 같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마무리할 때면 조용조용 자문한다. 여기서 끝난다면 어떨 것 같아? 여행이, 삶이 말이야. 한때는 고독을 바라고 원하면서도 무서워했던 것 같다. 고독에 끌리면서도 고독을 버거워했던 것 같다. 낯선 곳에서 낯선 시간을 숱하게 보낸 지금은, 고독의 기쁨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