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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직업 -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 ㅣ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9월
평점 :
읽는 직업 - 이은혜
이 책의 저자는 무려 글항아리 출판사의 편집자이다.
나한테 글항아리의 멋진 책들은 동경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좋아하지만 제대로 완벽히 독파하지는 못하고 마음속 책장에는 항상 진열되어 있다.
그 수많은 벽돌책들을 전부 읽고 편집까지 하는 분은 어떤 분일까란 생각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페이스북에서 보고 반가웠고 그 글들이 이번에 마음산책에서 출간되었다.

글항아리 편집자는 원고를 읽는 것 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책 제목이 <읽는 직업>이라 해서 반가웠다. 책 내용은 주로 직업으로서의 편집자에 대한 이야기다. 출판계의 속사정을 옅보는 재미도 있다. 책이란 세상이 독자- 작가- 출판사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출판계는 저자-편집자-독자라는 트라이앵글로 지탱하고 있단걸 알게 된다.
요즘 들어 책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살짝은 진부해졌는데 이 책에서는 편집자이자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색다른 시선으로 보는 책이야기가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2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주옥같은 문장과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비밀은 글을 쓰게 한다. 그러므로 진짜 비밀은 없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밀과 달리 글로 쓰인 비밀은 울음과 비탄을 마침내 정돈해서 담아내는 까닭에 희망을 향해 달린다.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출판사로 원고를 보내온다. 그것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카이브로 축적되어 거대한 강물을 이룬다. 강물은 때로는 핏빛이다. 하지만 다른 물줄기와 섞이고 모여들면서 하나의 역사를 기록한다.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고, 혹은 출판되지 못한 채 출판사 메일에만 흔적을 남긴다. 제 운명을 어느 이름 모를 편집자의 손에 내맡긴 채.
요즘 편집자들은 옛 시절의 편집자들과 달리 자기 정체성의 30퍼센트쯤은 마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알리고 팔아야 한다’, 이게 그들의 모토지만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남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곧 모방으로 이어진다.
편집자는 독자를 대표해 원고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막중한 역할을 맡는다. 사실 편집자는 독자를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의 판매 추이로 독자를 더듬어 짐작할 뿐이다. 여하튼 저자와 역자는 우선 편집자를 설득하려 하고, 편집자는 독자를 상상하며 그들의 욕구를 측정하려 한다.

편집자들은 ‘1000권밖에 안 팔리는 책을 줄줄이 생산해내는’ 기이한 존재다. 그것을 두고 ‘고귀하다’고 평가해주면 요즘은 반은 칭찬으로, 반은 비웃는 소리로 들린다. 부는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요구되는 세속의 진리인데, 부는커녕 자기 밥벌이도 못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순적이게도 편집자는 출판의 지속성을 위해 종종 좋은 책들이 무덤 속으로 향하도록 방치한다.
말하자면 각주는 글쓴이의 실력을 검증하는 세밀한 장치다. 모름지기 학자는 선대의 문헌을 모두 검토한 뒤 그로부터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 즉 매력적인 서사들은 저자가 매끈하게 창작한 도자기라기보다는 앞선 자들의 글을 모두 섭렵하는 성실성, 깎고 다듬는 도공 실력, 마침내 한 발 내딛는 진보로 인해 빚어진다.
편집은 배치와 재배치, 수정과 재수정의 과정이며, 편집자는 원본을 창조하는 저자와는 독창성 면에서 수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편집자가 공들여야 하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수백 수천의 시간이며, 결국 지난 세월을 돌아봤을 때 남는 것도 뒤에 버려진, 길에 뿌려진, 못 보여준 것 속에 간직된 시간들이다.


편집자에게는 한 자 한 자 교정을 보는 작업이 때로는 산을 오르는 ‘여등’처럼 느껴진다. 피곤해도 단어 사이를 겅중겅중 건너뛸 수 없고, 독자는 모르는 험악한 산맥이 꽤 많아 수시로 좌절이 찾아온다.
예컨대 독자가 몰리에르를 읽고 정말로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그 책장을 덮을 권리가 있다. 몰리에르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하품을 연발하게 만들면 그는 더 이상 내게 고귀하거나 흥미를 끌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즉 독자는 때로 책을 책꽂이에 처박아둠으로써, 즉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사실 책을 읽는 이들은 점점 영악해진다. 그것이 독서의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더 많은 책을 읽을수록 독자로서 순진하고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기 힘들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 읽지 않고 지나온 책들을 성인이 되어 읽기는 힘든 것이고, 나의 젊은 시절이나 작가의 절정을 지나쳐오면 다시 그 책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라는 상투어는 독서에 가장 잘 들어맞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