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일간지들에는 죽어가는 남편을 위해 단지斷指하거나 따라 죽은下從 여성들의 사연 혹은 죽은 약혼자의 묘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연, 심지어 나병 환자인 남편에게 살을 베어 먹여 남편이 쾌차 했다는기사도 유포되었다.
이러한 기사들이 미담의 예로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20세기전반부에도 열녀 예찬이 광범위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간지에서 기층 민중의 열행을 미담으로 유포한 것은 조선총독부와 유림층의 일치된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필요에 따라 유교를 효과적인 통치 전략으로 사용했고 이러한 전략은 근대적 지식인의 출현으로 권위가 흔들린 유림층의호응을 이끌어냈다. 지역 유지들과 같은 민간이나 도의회, 도청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과부들에 대해 ‘열부, 절부, 효부‘ 등의 명목으로 표창한 사례도 있었다. 열녀와 같은 유교적 덕목을 내세워 여성들을 순치하는 전략은 이렇듯 유림층과 총독부의 공통적인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오히려 여성들의 고삐 풀린 연애를 열녀 담론이 지속적으로 통제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여성들을 통제하면서 내면화된 유교적 이념이 아니라 유일한 사랑에 대한 헌신이라는 여성의 자발성이 더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사랑‘을 이용했고 여성들에게 사랑이 강조되는 한 여성들은통제되기 쉬운 가장 취약한 존재가 되었다. 열녀라는 단어로 지칭되지는 않았지만 한 남성에 대한 사랑을 변심하지 않고 지켜내는 여성들에 대한 예찬과 숭배는 춘향전이라는 텍스트와 함께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근대의 열녀 담론은 전근대 시대에서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양상과 사뭇 달랐다. 여기에다시 춘향이 모범적인 사례로 어김없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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