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모키치도 이치소우도지금 주님 옆에서 그들보다 먼저 간 많은 일본인 순교자들과 똑같이 영원의 지복(至福)을 얻고 있을 것이라고, 저도 물론 그런 것은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참배하자, 참배하자파라이주의 궁전으로 가자
군풀을 쥐어뜯어 그것을 마구 씹어대며 욕지거리가 나듯 치밀어 오르는 이 상념을 억제했습니다. 제일 무서운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절망이라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어째서 하나님이 침묵하고계시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다섯 마을을 휩쓰는불길 속에서 가장 올바른 사람을 구원하시도다." 그러나 지금 불모의 땅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수목들은 익지 않는 열매를 맺고 있을때, 그분이 한마디라도 뭔가 신도들을 위해 말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