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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봉과 분홍 제복 - 세일러 문부터 헬렌 켈러까지, 여주인공의 왜곡된 성역할
사이토 미나코 지음, 권서경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소년소녀일본만화들을 분석, 그 속에서 여성은 그저 보조하는 역할 수동적이며 성희롱의 대상이 되는 것에 분개, 개성 넘치는 제대로 된 여성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일본만화들이지만 대부분 어릴적부터 우리 또한 보고 좋아했던 만화들이라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다. 그런 만화들을 보면서 느꼈던 불쾌함의 이유가 조금은 분명해진다. 미야자키의 만화 속 여성들 또한 진취적이며 여성중심같지만 실제는 그저 남성영웅의 공식에 여성모습만을 입혔을 뿐이라는 비난도 있다.
쫄쫄이 옷을 입고 세상을 지키는 파워레인저 류에 주로 고명처럼 섞여 있는 여자 아이, 만화 영화 속 주인공은 남자아이들 그리고 고명처럼 얹어진 여자아이. 별다를 역할도 없다. 그래서 눈요기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도라에몽의 이슬이,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에 목욕씬이 나오는데다, 진구는 매번 이슬이의 목욕장면을 보려 안달을 한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체 우린 어린 시절 이런 만화들과 영화를 보며 즐겼다. 당연히 멋진 로봇을 운전하고 외계인을 무찌르는 건 남자아이들의 몫, 옆에 곁다리로 있는 여자아이는 괜히 걸리적거리거나 혹은 남자주인공의 도움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듯 항상 무력하다.
여자아이들을 위한 만화영화는 분명 세상을 지키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긴 한데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변신장면에서 괜히 나신의 실루엣을 보여주거나, 혹은 코스프레하듯 간호복이니 스튜어디스옷이니 등을 갈아입고 나온다. 변신하고 난 후의 모습이 더 전투력이 떨어지는 듯 한데, 그 긴 다리로 희한한 요술봉 하나를 들고 싸운다. 남자아이들은 제대로 된 무기로 혹은 뭔가 무기같은 것들을 들고 세상을 지키지만, 여자아이들은 더 불편한 짧거나 몸에 딱 달라붙는 전투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옷으로 갈아입고, 뾰롱 뾰롱 따위의 희한한 효과음을 내며 악세사리같은 봉을 휘두른다. 결국은 마법의 힘이 다다.
이 책의 내용은 바로 이런 잘못된 매체들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세뇌당하는 것들이 바로, 여성은 나약하거나 보여지는 존재거나 혹은 민폐같은 캐릭터로 나온다. 괜찮은 여자 주인공은 착하다 못해 맹하고, 남자주인공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가끔 노출도 필요하다. 그게 목욕씬이던 변신이던 그건 중요치 않다.
나 또한 그랬다. 나서는 것보단 뒤에서 조신하게 도와주는 역할, 나대는 건 여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적극적인 것이 여성답지 못하다와 동의어가 되는 세상. 그건 어린시절부터 내가 보아 온 그리고 배워 온 세상이었다. 반장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거치면서, 요술봉을 휘두르는 날씬하고 예쁜 여자 주인공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세뇌를 당한 건다.
여자는 이래야 하는 거야, 남자애들이 좀 짓궂게 굴어도 그건 너를 좋아해서야. 헉, 그런 좋아함은 거부한다.
우주전함 야마토는 고교 야구부, 건담은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에반게리온은 막장가족이란 해석이 재미있고 설득력도 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뭐가 달라진거지? 여전히 아이들이 보는 만화영화는 주인공들에 여자아인 고명처럼 얹혀 있다. 동물들 캐릭터마저도 분홍빛깔의 여아 캐릭터에 그나마 숫자도 동등하지 않다. 그놈의 자동차 캐릭터마저도 그러하다.
그놈의 분홍색!
실제 분홍색은 남자들의 색이었다.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한 번 보라.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살짝 꼬아 각선미를 자랑하며, 그 허벅지에 분홍리본을 두르고 있다. 하얀 스타킹에 분홍 리본에 빨간 하이힐. 그 시절 귀족들은 평민들과 차별하기 위해 파스텔톤을 선호했고 그 와중에 분홍색들도 유행하게 된 것이다. 결국 성별에 따른 색의 구분은, 장난감 회사들이 성별이 다른 남매들에게 장난감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남녀 모두 분홍이든 파랑이든 성별 구분이 없다면, 남매지간에도 장난감을 물려 받으면 되니 장난감 수요가 주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초등 중학년만 넘어도 다들 그냥 검은색, 검은색이다. 무책색. 어린 시절 반짝 분홍과 파랑의 향연, 그렇지만 그 구별 또한 자본주의가 낳은 소비의 향연이라니 참 서글프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성별에 따른 다양한 차별이 대중매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악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참 많이 싸웠고, 예전보단 나아지는 양상이다. 남자들 또한 자신의 기득권이 뺏기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동등해지면서 서로의 짐을 같이 지고 감을, 자신과 자신의 딸들에게 모두 도움이 됨을 자각해 양성평등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 여전히 진행중이다. 아, 예전과 좀 다른 양상?
예를 들면 어릴 적 나는 여자애니까, 조신해야 한다라던가 착해야 하며 시집만 잘 가면 된다 등의 소리들을 들었다. 요즘 여자애들에게 그런 말을 하진 않는다. 대신 여자애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여자애가 왜 그리 덤벙대니? 침착해야지. 글씨가 왜 그 모양이니? 남자애들에겐 조금 더 허용되는 것들이 여자란 이유로 조금 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여전하다.
언니들이랑 가끔 라떼는 말이야 라고 우스개처럼 떠들기도 한다. 며느라기 책을 돌려보며, 어쩜 이 미묘하고 찜찜한 기분을 잘 표현한거냐며 공감으로 호들갑 떨기도 한다.
지나가는 이들이 가위로 오노 요꼬의 옷을 조금씩 자르는 행위예술이 있다. 시선들 속에서 발가벗겨지는 듯, 혹은 가위로 잘리는 듯 상채기가 생기는 일들,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경험들을 표현한 행위예술이다.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좀 나아진 걸까.
(작가님은 붉은 원숭이띠시다)
과연 애니메이션 왕국은 이제껏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취급가 세상을 구원해줄 것은 기대하면서 소녀를 구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을 받고 분에 못 이겨 눈물짓는 소녀를 적극적으로 그려왔던가? 조직의 차별 대우에 저항하는 여성 대원은 또 어떠한가? 상사, 동료, 시청자의 성희롱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 붉은 전사는 존재했던가? 이런말을 하면 "당연히 있었지. 그 작품에서는 말야……"라며 꼬치꼬치따지려 들고 자잘한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체적인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다(참고로 미리 말해두겠는데, 목욕탕을훔쳐보거나 치마를 들추는 행동에 대해 비명을 지르거나 뺨을 때리는 행위를 ‘성희롱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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