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제니친작가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란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극한 환경과 억울한 사연에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면, 암병동은 스탈린의 압제아래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보여주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톨스토이의 글처럼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는 건 사랑인걸까. 그 어떤 환경과 그 어떤 처지에서도.



예전 박노자선생님책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지옥같은 환경에서 노동을 착취당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노동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레닌.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에게 열광했고, 우리 또한 레닌의 소수민족 우대정책 등으로 독립운동에서 도움을 받았다. 그 후 스탈린, 그는 혁명을 말했지만, 숙청과 공포정치로 결국 새로운 계급사회를 만들었다.

암병동엔 다양한 인물군상이 나오며, 어쩌면 암병동 자체가 소련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암병동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대표하는 인간군이 있으며, 애틋하고 비열하고 존경하고 이해하는 등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한다.

파벨이란 인물은, 새로운 특권층으로 고위관부이며,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을 이겨내려, 혹은 기다리는 이 암병동에서조차 당연하다는 듯 특별대우를 원한다. 체제에 충성하지만 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혹은 좁은 아파트에서 같이 사는 것이 싫어 친구를 밀고하면서도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새로운 차별주의자.

주인공인 코스토글로토프, 대학시절 친구들과의 대화가 문제가 되어 유배지로 끌려가 온갖 노동과 힘듦을 겪고, 이 곳 암병동에서 새로운 사랑과 구원을 꿈꾸지만 결국 빈 손으로 기차를 타고, 유형지로 돌아간다. 가족도 잃었고 꿈도 사랑도 젊음도 모두 잃게 한 그 곳 유형지말고는 돌아갈 곳이 없다.

헌신적인 의사들과 사연을 간직한 청소부, 다리를 잘라내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어린 좀카와 17살에 가슴을 도려내야 하는 아샤. 그런 좀카에게 그저 대가없이 잘 해주는 스쵸파아줌마.

그리고 공포와 배신이 난무하는 체재아래, 가족을 지키려 저항없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했던 솔루빈, 이제 암병동에서 그 시절 불편했던 마음을 코스토글로토프에게 고해성사하기도 한다. 최고 농업대학을 졸업하고도 진실이 아닌 정치적으로 휘둘리는 과학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이 원하는데로 사서가 되어, 그들이 원하지 않는 책들을 패치가에 넣으며 몸을 녹이고, 마음을 얼렸던 배신자 솔루빈을 누가 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제 세상이 조금은 달라졌다며, 더 이상 유형지에 가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며 도시에 봄기운이 도는 듯하다.

그러나 베가, 그리고 어쩔 줄 몰랐던 코스토글로토프 손의 제비꽃 두 다발. 그러나 홀로 기차에 오르는 코스토글로토프.

스탈린 사후 잠시 봄이 오는 듯 했으나, 냉전체제로 다시 식어버렸던 소련의 잠시나마의 봄?



(시대적 배경은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시대이다. 흐루쇼프, 사진 속 그는 어수룩한 중년의 남성으로 보인다. 미국에 가서 펩시를 마시고, 캐네디를 만나 핵전쟁을 막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남자이자 엉뚱하게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옥수수를 좋아한 남자. 그러나 소련은 옥수수를 키우기엔 좋은 곳이 아니었고, 거기다 진리보단 사상에 휘둘린 과학으로 리센코의 종자냉각설을 밀어주며, 결국 엄청난 농업의 실패를 맞이한다. 다행이 미국등에서 재빨리 식량을 수입해 기근은 막았다. 스탈린이 주변인물들을 숙청하면서, 흐루쇼프는 멍청해 보여 옆에 두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스탈린 주변 똑똑한 이들은 모두 숙청당하고, 정작 스탈린이 죽자 흐루쇼프만 남아 있었다고.

흐루쇼프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내가 한 일 중 가장 의미있는건, 내가 사형이 아닌 유배형을 받도록 조국을 변화시킨 것”

스탈린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이 혹은 사소한 이들로 죽어나갔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이 책의 미덕은
읽다가 덮어 놓아도
잠시 던져 놓았다, 아무 곳이나 펼쳐도
그리 어색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다.
주인공의 삶이랄게 하루 하루 죽음과의 싸움인데도
뭐랄까 수용소에서의 음식과 노동 추위, 살아남기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너무나 자세히 적혀 있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수용소의 하루들이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디부터 읽어도, 덮어 놓았다 펼쳐도 여전히 주인공은 수용소에서 고분분투중이다.


그래도 그리 암울하거나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은건 주인공이 가진 인간적인 따스함이 아닐까
이념도 그 무엇도 알지 못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던 이반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혀 서도
열심히 살아간다.
십년이 다시 십년이 되어도 묵묵히 소박하게
살아간다.
죄없으나 억울해 하기보다는 묵묵히 살아가고 이겨내고
거기서도 가장 밑바닥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그 무언가를 간직한체
살아가는,
한 끼의 배부름이 없어도,지옥같은 그 곳에서도, 측은함과 선량함을 잃지 않는 이반을 보며
이반처럼 하루를 무사히 보냄에 감사기도를 하게 된다.

고등학생 시절 읽을 때는 그저 수용소 삶에 대한 호기심, 이빨 몽땅 빠진 선량한 이반을 생각하며 읽었다면
지금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남의 밥그릇을 핥는 자와 밀고자다라는 글귀에 눈이 간다.
수용소에서조차 권력에 기생하고,돈에 아부하는 이들을 보며
새삼 이반의 순수함이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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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becando 2020-08-10 0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도 비슷한 맥락이었던게 기억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