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면 생각나는 책

5살이었나. 장에 가셨던 할아버지께서 고무공을 하나 서오셨다고 한다. 신나서 통통 거렸던 기억이 흑백같던 어린시절, 칼라로 남아있다고 하셨다 . 그러다 10살 되던 해, 밤이면 산에 땅 파서 숨었다가 아침이면 집에 내려가던 생활이 몇 날 며칠. 그러다 사흘이 넘게 산에만 있었던 적이 있었단다 . 먹을게 없자 엄마의 엄마는 용감하게도 산에 내려가셨고 팔에 총을 맞으셨단다. 푹 파인 그 상처에 하얀 천이 끝도 없이 들어가 무서우셨다는 엄마. 그리고 장에 가서 고무공 사오셨던 할아버지는 집을 지키시겠다며 남으셨다가 폭격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잿더미의 집터가 그렇게 낯설었다고. 전쟁터에 나갔던 큰오빠가 돌아오던 날, 옆집 오빠는 돌아오지 못하던 그래서 온종일 마을에 곡소리가 나고, 엄마의 엄마는 돌아온 큰아들을 크게 기뻐하며 반기지도 못하셨단다. 일제강점기와 육이오를 거쳐 죄없는 대학생 때려잡던 그 험한 세월 모두 겪은 우리 엄마의 이야기다.

어릴 적부터 들어서였을까
박완서작가의 성장소설같은 이 세 편을 읽으며 어딘가 들은 듯 익숙했고, 그 울음과 한이 친숙했다.
사랑받으며 아버지 없이도 교육열 충만한 어머니 밑에서 컸던 어린 시절과 전쟁으로 붕괴되는 가정과 혼란, 미군부대에서의 박수근 작가와의 이야기.
우리 엄마도 그랬겠지. 어리광도 사춘기도 사치였고, 풋풋한 20대 아가씨의 설렘도 느낄 새가 없었겠지. 그저 살아낸다고 바빴겠지.
엄마는 요즘 고운 옷만 입으신다.
예전엔 매번 누렇고 까만 옷들만 입으셨단다. 고운 옷은 비싸기도 하고 빨기도 힘들고 눈에 띄니까. 분홍범벅에 꽃무늬 가득한 옷들 정도여야 만족하신다. 한풀이신가.

또 하나는 김원일작가님의 마당깊은 집이다.
고달픈 피난살이와, 부정한 방법으로 미군과 연줄을 대던 주인집과 다닥다닥 붙어 살던 셋집 피난민들과 상이군인 가족 이야기. 실제로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서인지 실감나는 그 서러움, 그러나 아이의 눈이기에 그 끔찍한 가난과 아픔에도 희망이 보인다. 대구가 배경이다. 대구에 가서 한 번 그 소설의 배경이 된 동네를 보러간 적이 있지만 당연히 책과는 많이 달랐다.

오늘 70주년 유승호배우가 낭독하신 기념사가 참 마음에 많이 와닿는다.

(친구에게.
허락하신다면, 나는 당신을 친구라 부르고 싶습니다.
1950년 짧은 생이 멈춘 그 순간 이후로, 당신은 나와 같은 20대 청년이기에 난 당신을 친구라 부르며 당신의 그날을 눈앞에 펼쳐보려 합니다.
친구여, 갑작스러운 국가의 부름을 받고 집을 나서던 순간, 얼마나 두려우셨습니까
서둘러 따뜻한 밥을 짓던 어머니의 손을 놓고 돌아서며 얼마나 목이 메셨습니까
친구여, 그런데도 당신은 낡은 군복에 소총 한 자루 움켜쥐고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지옥 같은 전장에 도착한 당신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때론 태양을 짊어진 듯 뜨거운 폭염 아래서, 때론 수통의 물마저 얼려버리는 칼날 같은 겨울바람 속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넘어 끝없이 전진했습니다.
친구여,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매일 밤마다 찾아오는 두려움은 어찌 이겨내셨습니까.
포탄처럼 날아드는 번뇌와 서글픔은 또 어찌 삼키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누굴 떠올리며 눈을 감으셨습니까.
친구여, 당신이 총탄을 피해 몸을 숨겼던 낡은 집은, 이제 학생들이 뛰어노는 학교가 됐습니다.
잠시 가족의 사진을 꺼내보던 고단한 행군로는 이제 젊은이들의 자전거 길이 됐습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한 고향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큰 도시가 됐습니다.
친구여, 당신이 지켜낸 땅 위에서 전 이렇게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신이 지켜낸 땅 위에서 우리는 또 이렇게 윤택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2020년 6월 25일 영웅의 친구가.)

(나보다 훨씬 어렸던 그 분들, 이젠 나보다 내 아이의 나이에 더 가까웠을 그 분들의 마음과 용기가 어땠을지 더 절절하고 아픕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어린 아이 전쟁에 내보낼때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고맙다고 감사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