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여성이 갖게 되는 섬세함이 있다. 아니 섬세함보단 방어기제? 살아남기 위한 눈치 같은 거라고 해두자.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 혹은 그런 여성상의 다른 편에 서 있거나,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어느 편이든 불안하고 두렵다.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 선거권이 없어서 재산을 가질 수 없어서 삶의 주도권이란 다른 성에만 주어진 것이어서 온전한 평온도 없이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지금은 달라졌잖아? 그렇지만 지금 달라졌다고 해서 과거의 만행과 불합리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딘가에 흔적으로 아픔으로 각인되어 있다. 인종간의 학살이나 만행은 회자되면서 성별간에 이루어진 이 긴 차별 끝에 얻게 된 트라우마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저 예민하구나 별나구나로 치부될 뿐. 모성과 인내와 순종을 자신들도 모르게 강요당하며 예민한 마음에 상처받는 여성들의 심리가 해부한 듯 진짜 들여다 본 듯 잘 묘사되어 있어, 읽는 내내 같이 아프다.

아래는 도리스 레싱의 책에 대해 예전에 썼던 글이다

    

1. 풀잎은 노래한다

메리와 리처드 부부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백인 사회는 흑인 원주민과 비슷한 혹은 더 못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동정하기보다 미워했다. ‘백인 문명은 터너 부부의 경우와 같은 비참한 실패를 용납할 수 없었다 

리처드 같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가지 밖에 없음을 조만간 깨닫게 된다. , 정신이 어떻게 돼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거나, 아니면 이를 악물고서 쓸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보는 것이다.’

 

 

책 제목은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산속의 이 황폐한 계곡

 

희미한 달빛에 싸여 예배당 주변의

 

나자빠진 무덤들 위에 풀잎은 노래한다

     

황무지위에서 노래하던 풀잎은 시들어 누렇게 말라빠져 무덤들위에 또 하나의 무덤을 만든다 그 무덤엔 이름도 없겠지. 메리란 이름.

 

그저 자신이 평범하고 정상이길 바랐던, 그래서 사랑없이 가난하고 대책없는 무능력자 리처드와 덥석 결혼을 해 버린다.

 

천장도 없이 양철지붕밑에서 남아프리가의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땀을

 

흘리며 무기력하다 보면 가난에 찌들다 보면 나란 것이 없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가난과 부모의 학대 속에서 인정받음을 알지 못한체 남들과 비슷하게 살려 노력했던 그래서 성장하지 못한체 서른이 넘도록 소녀처럼 옷을 입고 남성에게도 소녀처럼 도망치려 하는 메리.

 

그런 메리가 남들같어려고 나사빠진 메리가 되지 않으려 선택한 남자 리처드.

 

둘 다 결혼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니다.

 

좀 더 부유했다면? 천장이 더위를 좀 막아줬다면? 일을 시작하고 끝내지 못한체 몽상만 하는 리처드는 고생만 죽도록 하며 빚만 버는 사나이다. 남들의 시선과 말들을 곡해하며 남편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메리는 실상 모든 것에 겁먹은 늙은 소녀일뿐

     

가난한 어린 시절 그 모습 그대로일뿐이다.

 

모세에 대한 의존과 두려움, 톰에 대해 상상한 탈출구. 모두 부질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죽음도 안다. 받아들여야지.

 

낡고 허름한, 원주민에게나 어울리는 천박함으로 꾸며진, 양철로 남아프리카의 태양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메리의 집에서 누가 살아남을까. 하물며 상처 가득한 늙은 아이 메리는.

 

리처드도 병원으로 톰은 기분나쁜 기억으로 모세는 감옥으로. 그리고 사람들은 시답잖은 스캔들에서 망각으로 그렇게 메리네 집 이야기는 시들어가는 풀들로 가득 덮히겠지. 그 풀잎이 부르는 노래는 비명일까 절규일까

 

 

2.마사퀘스트

다섯째 아이를 참 재미있게 봐서일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 또 손이 갔다.

 

모딜리아니의 그림도 한 몫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읽는 내내 그녀, 마사가 불편하다.

 

그 찬란한 젊음이 아까워서 화가 났다.

 

왜 그런거니.     그러다 아..

 

20살 그 빛나는 아이를

 

나는 40의 눈으로 보고 있구나.

    

예전 어린 시절,

 

호밀밭의 호올든의 그 끊어질 듯 섬세한 신경질적인 느낌들이

 

느낄 순 없어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마사의 그 묘한 거미줄처럼 질기고도 가녀린 변덕과 알 수 없는 마음들을

 

이제는 불편하게 느낀다.

 

너무 아까운 하루인데,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아름다운 청춘을

 

그저 버리는 듯한 마사를 이젠 40...20살의 하루를 그리워하는 40살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답답만 하다.

 

그러다.

 

아 불쌍하고 슬픈 젊음.

 

그 시절 일기장을 채웠던 사춘기같은 삶의 이야기와

 

젊지 못한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혐오,

 

그리고 배격들을 기억해 냈다.

 

 

그러다.

 

전쟁과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 그냥 무방비로 던져진

 

젊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겐

 

그저 변덕같아 보이는 순수만이 무기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어쩌지 못해 잠들지 못하는 마사.

 

마사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쫙 빠진 멋진 옷을 입는다고

 

밤새 떠들고 논다고

 

치기어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다고

 

그 무엇도 마사를 채울 순 없어 뜬 눈으로 밤을 새우지만.

 

떠들석한 남자녀석들도 그저 아이인것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체

         

40 대인 내겐 그들은 아직도 아이이다.

 

치기어린고 순수하지만.

 

아직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책임질 준비 되어 있지 않은,

 

우린 모두 그렇다. 위장을 하고 아닌 척 하지만 모두들에겐 불면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불면의 기억이 있다.

     

식민지나라에서 지배국가의 국민으로, 노예와 평등 사이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서

 

그리고 또 다시 터질 전쟁의 위험들 속에서.

 

어느 쪽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마사.

 

좀 돌아서 오겠지만, 몇 번은 헤어지고 만나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찾길 바란다.

 

3.다섯째 아이

 

위선과 절망

 

네명과 한명,

 

아니 모두에다 나의 좋은 것은 죄다 빼 모은 것과 아무 것도 없는 하나

아니 죄다 빼 모은 것에 영혼까지 걸어 두어 결국 그 하나를 버려도 남는 건 텅 빈 눈.

돌아 볼 수 없다

 

상처받은 자신, 그리고 주변의 상처도 모두 죄다 돌아 볼 수 없다.

 

덩쿨가득 다락방 있던 햇살 가득하던 완벽한 집이 이제는

 

네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벗어나려고만 하는 집이 되었고

 

팔아야만 하는 집, 떠나야 하는 집, 그래야 사는 집이 되었다.

아무리 팔아도, 아무리 도망다녀도 버릴 수 없다.

 

내게 상처를 줬어,

 

그 괴물때문에 나를 버렸어.

 

그 괴물을 그래도....... 죽게 할 순 없었어.

 

그런데 그게 왜 ? 모든게 왜 내 책임인거지?

 

 

괴물이 태어나고 길러진다.

 

뱃속에서부터 저주받던 괴물.

 

엄마는 마치 자신의 죄인냥, 주변도 엄만을 탓해,

 

엄마는 얼른 젊음따윈 버려버리고 싶어, 폭삭 늙어 버리고 싶어지지.

 

 

모두들 괴물따윈 ............아프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슬프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감정이 없을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모르지 아무도 괴물이 되어보지 못했으니.

 

 

섬뜩하고 무서웠다.

 

가장 이상적이었던 가정이.

 

두 부부의 오만이나 이기심탓이었을까

 

그렇다기엔 너무 가혹한 결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가족은

 

살기 위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자신만의 은신처를 찾아내 꼭꼭 숨어 버린다.

 

그래도 그 아이들에겐 그림자가 깊다.

 

 

아픈 한 손가락을 차마 버리지 못했던

 

엄마는 수많은 비난속에

 

버려짐 속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나조차 감정이입이 되어버려, 엄마를 비난한다.

 

괴물이 사라지길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길...

 

하지만,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왠지 불안하게 느껴지는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전원 속 다락방 있던 큰 집.

 

그러다 이 모든 일의 또 다른 주모자인 남편을 비난하다, 그 또한 돈만 벌며 외롭게 늙어가는 모습이 너무 큰 벌은 아닐까 안쓰럽게도 느껴진다.

 

 

감정이입이 되어서 너무 힘들었다, 읽기가..

 

행복한 가정, 아이들이 가득한 이상적 가족이란 이 시대에서는 그저 망상에 불가한걸까.

 

집착일뿐인걸까.

 

 

그리고 처음으로 도리스 레싱의 산문집을 접했다.

 

4. 고양이에 대하여.

영국 식민지인 짐바브웨(그래서인지 소설 속 오지의 모습 묘사가 정말 탁월했다.)와 런던에서의 삶에서 만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골에서 어쩔 수 없이 새끼들을 죽이며 개체수를 유지하고, 런던에선 가책을 느끼며 중성화수술을 하고 하염없이 고양이에게 미안해한다.

많은 수의 고양이를 거쳐갔지만, 도리스 레싱은 진짜 고양이를 대할 줄 안다.

고양이의 마음이나 자존심을 지켜주려 하며, 아파하는 고양이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고양이들이 가진 각각의 개성이나 그들만의 룰을 지키며, 고양이의 존엄성 또한 지켜주려 노력한다.

새를 잡고, 교미를 하고, 자신들만의 서열을 정하고, 인간과 살아가면서도 도도하며 애교있는 혹은 언제 쫓겨날지 몰라 두려워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고양이를 참 잘 그려낸다. 고양이는 인간들과 어울려 살지만 약자다. 인간들에게 내쫓기기도 하고, 배신당하고 모피가 되고 해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굶어죽고 차에 치여 죽고 병들어 죽고 그렇게 도시를 떠돈다. 자신의 집을 찾은 고양이를 자세히 관찰하고 깨끗한 물과 먹이, 그리고 부엌에 작은 의자 하나를 내어준다. 그녀의 소설처럼 삶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게 해주는 산문집이다.

 

우리집 책장에 마음에 드는 고양이 책 하나를 더 채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표지의 수잔발라동 그림도 맘에 든다. 모델에서 화가가 된 수잔 발라동과 고양이는 왠지 영혼의 단짝같은 느낌,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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