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
히스토리

누군가는 지금의 역사는 말그대로 히스토리였다고 말한다.
( 물론 히스토리의 어원은 그나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전쟁, 그리고 무력. 이긴자의 편인 역사 속에서 여성은 설 자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반인 여성이, 동반자로서의 여성이 폄하되고 도구화되었던 과거는 그리 예전일이 아니다. 몇 몇 여성역사학자들은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를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허스토리. 우리가 잃어버리고 지워버린, 혹은 승자의 입장에서 적혀진 역사서 속에 잃어버린 여성의 모습은 인류 모두에게 손해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 중반기이후부터 급격하게 하락하여, 남성의 도구적 모습을 보였고, 핍박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현모양처라는 남성위주의 여성 역할을 강요당했다.

지금도 현대시대는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자 주제에”

“여자 따위가”

“여자는 그런 거 못해”

등으로 차별받고 있다.

또한 그런 틀에 갇혀 여성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비하하며, 노예적 삶을 살기도 한다. 인류의 삶속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해 특히 한국에서의 시대 흐름속 여성의 모습을 알아보고, 앞으로의 여성의 지위와 모습에 대해 모색해 보자.

중간 ~

1)고대시기

인류의 시작에 있어서는 모계사회일 수 밖에 없었다.

동굴 속의 집단 생활에서는 부계를 확인 할 길이 없었다.

사냥을 하지만. 실제 삶을 유지하는 것은 채집이었고, 채집의 대표주자는 여자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나마 스스로 음식을 움켜쥐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모유에 의지했고,생사의 결정도 어머니에 의해 가능했다. 그렇기에 모계사회였고, 농경사회에서도 초기에는 여전히 모계사회가 근간을 이루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었고, 삶을 이어갔다.

2)신석기, 청동기, 철기 및 삼국시대

그러나 농경사회에 접어들고, 철기의 발달로 뛰어난 무기등으로 전쟁 등 침략 전쟁이 구체화되면서, 여성보다는 남성이라는 것이 사회전반에 차지하게 되었다.

농경사회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 지면서, 소유의 개념이 노동력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서 남성들은 여성에게 낙인을 찍었다.

노동력을 소유하기 위해, 여성을 가두거나 자신의 소유물로 타인들과 합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야만 그 후 생겨나는 자식들에 대해 소유물로서의 주장이 가능했고, 자신이 일군 것들에 대해 걱정없이 물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이 가진 장점인 무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서로를 위해 그 무력에 대해 용인했다.

간혹 여성이 모자라면 폭력을 이용해 쟁취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였다.

여성 또한 그들에겐 그저 하나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철기시대의 도래로 농작물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전쟁시 무기의 발전으로 비약적 발전하는 시기에서, 여성은 또 다른 노동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사회인 고조선에서, 여성의 존재는 단군신화에서 “웅녀”라는 존재로, 그리하여 단군왕검을 낳게 되는 모성의 존재로 나올뿐이다.

웅녀라는 존재가 나라의 건국이나, 단군왕검의 통치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삼국시대 우리는 “소서노”에서 여성의 긍정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으나, 주몽은 예전 자신의 처였던 예씨부인의 아들인 유리를 아들로 삼게 되고, 결국 소서노는 자신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다. 고구려는 주몽을 동명성왕이라며 신격화하였지만 여신의 몫은 소서노가 아니라,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를 국모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

소서노 또한 백제 초기 등에 나라의 건국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결국 역사에서는 그 역할이 축소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삼국유사나 사기 등에서 소개되는 여성은 그저 효녀라던가, 혹은 누군가의 아내로서 조력자의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혹은 남성들이 원하는 남성들이 꿈꾸는, 말 잘 듣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일부종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어머니를 위해 종이 된 효녀 지은이라던가, 혹은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끝까지 기다리는 설씨녀 등의 이야기나, 죽어서 귀신으로 나타난 진지왕과 하룻밤을 보내는 도화녀 등이 다이다. 남자들이 여성에게 요구한 것은 명석함이나 용감함보다는, 남자를 끝까지 기다리거나 순종적인 모습인 것이다.

세계사를 살펴보아도 별다를 것이 없다. 유럽에서 여성은 하나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서로 동맹을 맺을때에도, 돈독한 관계를 맺을 때에 중요한 요인으로 필요했던 것이 바로 결혼동맹이었고, 이때 자신의 여동생이나 딸들은 아주 필요한 도구였다.

여성은 또한 그저 종족보존을 위한 것일뿐, 고대 그리스 등에서는 오히려 남성들의 사랑이 더 고귀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오히려 영특한 여성은 골칫거리로 묘사되었다. 독립적으로 살거나 공부를 하고 싶다면, 수녀원에서 살며 수녀가 되거나, 혹은 가혹한 경우에는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몸뿐, 머리는 필요없다는 것이 남성의 지배적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 시대 여성에 대한 기록은 전무할 뿐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같은 지금은 유명한 여성 화가조차도,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자신이 고문을 당해야 했다. 자신이 고발한 내용이 진실인지를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를 고문함으로서 확인하려 한 것이다.

여성에게 세상은 그다지 공평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금 특이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신라시대 여성의 모습이다.

화랑제도에서 원화로 등장하는 남모와 준정은 뛰어난 외모와 재치있는 여성이었다. 둘은 남자 화랑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했고, 둘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결국 남모를 질투한 준정이 그녀를 집으로 유인, 술에 취하게 한 후 죽이게 된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준정도 사형에 처하고 원화제도는 사라진다.

그 후에는 외양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화랑이라 하고 낭도를 모집하였다.

신라에서는 미실이라고 하여, 색으로 왕실에 충정하는 집안이 있다는 내용도 있으며,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은 만명공주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실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서동요에 보면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을 만나러 가는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물론 그 노래로 인해 선화공주가 궐에서 쫓겨나지만 말이다.

그리고 “처용가”에 보면 역신과 바람이 난 아내의 모습도 묘사된다.

물론 역신과의 바람은 성적인 결합이 아닌, 병든 아내라는 설도 있지만 말이다.

의외로 신라의 성적인 모습은 개방적이고, 또한 여성의 지위도 그리 낮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특이한 골품제도로 인해, 부모 모두 왕족인 이들이 성골이라 불리며 왕위를 계승했기에, 근친상간이 많았다. 또한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어 유일하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3명의 여왕이 나오기도 하였다.

특히 선덕여왕 같은 경우는 황룡사탑이나 첨성대 등을 세우기도 하였고, 다양한 긍정적인 이야기 등이 같이 전해진다. 선덕여왕은 신라시대의 첫 번째 여왕으로서 굉장히 현명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귀족의 딸들은 어릴 때부터 신부수업의 일환으로 수예와 간단한 글공부를 하게 되며, 배우는 것도 주로 시부모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따르며 자녀들을 훈육하는 것들을 배우게 된다. 집안 살림을 돌보고, 하인들을 통솔하는 등의 주로 집 안에서 이루지는 것들을 교육받게 된다. 아내라는 말의 어원도 안에 있는, 즉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일반 농민의 자녀들은 어릴적부터 노동력에 동원된다.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게 된다. 걱실걱실 일 잘하고, 애 잘 낳게 엉덩이가 펑퍼짐한 여성이 신붓감 1위인 것이다. 천민들의 삶은 여성은 더욱 고달프고 비참했다. 고된 노동 뒤에 더 무서운 신분 높은 자들이 자행하는 성폭행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천민 여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팠다.

전쟁중에는 신분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삶은 가혹함과 성폭행과 폭력들에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물로 세계사에서도 여왕은 등장하고, 간혹 현명하고 멋진 모습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왕은 선호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혹은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덜 싫은 것, 조금 덜 손해보는 것을 택했을 뿐, 여성이라 더 기쁘거나 더 좋은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의 여성의 모습 또한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그녀들이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할 수 있는 곳, 혹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은 수녀원뿐이었다.

귀족의 자녀들은 태어나면 7살쯤엔 수녀원에 교육을 위해 보내진다.

거기서 수예나 간단한 철자, 그리고 기도하는 법 등을 배운다. 물론 청소와 요리도 배우지만, 주로 거기서도 순종과 종교적 금기에 대해 가장 많이 배우게 된다.

그러나 14살쯤 되면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결국 사교계에 대비하여, 마치 팔리는 물건처럼 품평 후에 비슷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그나마 이것은 귀족의 자녀이며, 농노의 자녀로 태어나면 평생 일만 하다 아이를 낳다가 혹은 노동에 지쳐 힘든 삶을 이어가다 죽게 된다. 단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일상적인 폭력과 노동 외에, 성적인 위험에도 노출되게 된다. 높은 신분의 남성들에게 당할 수 있는 성폭력과, 각종 강도나 주변의 남자들에게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고 귀족의 여성들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강도가 좀 다를 뿐인 것이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 조금 특별한 시기이다.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지금보다 여성의 지위가 더 나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여성들은 제사에 대해 평등하며 해방되어 있었다.

제사는 절에서 모시는 것이었기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돌아가면서 제를 지내는 비용을 절에 내고, 그 곳에서 모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도 동등하게 유산을 상속받았고, 또한 경제적 활동도 가능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남자 우선이 아닌, 태어난 순서였고, 균등 상속이었으며, 또한 개가나 재혼, 이혼 요구 등도 가능했다.

그리고 아내는 동반자적 존재였기에, 가능한 일부일처제가 선호되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가지고 시집 오기도 하고, 혹은 친정에서 재산을 상속받거나 남편의 재산 등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그 돈을 쌈짓돈으로 하여 고리대금업을 하기도 했고, 혹은 길쌈 잘 하는 하인을 사들여, 가내공장식으로 베를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즉 남편은 주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와 관련된 일들을 하였고, 아내는 그런 남편이 걱정없이 다양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준 것이다.

결국 아내와 남편은 서로가 동등하며 도움을 도는 존재이지, 누군가에 기대거나 의존적 존재가 아니었다.

특히 전쟁 후, 과부의 증가와 인구 감소를 이유로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수 많은 고려의 여인들이 그의 집을 둘러싸고, 그에게 달걀을 던지는 등의 시위를 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외가와 친가의 구분이 없었다.

외삼촌이 아니라 모두가 그냥 삼촌이었으며, 이모와 고모의 구분이 없었다.

성적인 행위에서도 여성 또한 적극적이었으며, 혹여 간통죄로 잡힐시에도 간단하게 관청 등에서 수를 놓는 등의 일로 벌을 대신하곤 했다.

또한 어머니의 친정 즉 외가와 가까이 살면서, 항시 외가 식구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외손자나 사위까지도 음서의 범위에 들어갔다. 즉 정5품이상의 가문에서는 사위와 외조카까지 음서의 범위에 들어 과거시험을 치지 않고도 관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외가쪽 사람이 큰 벼슬에 올라도 모두가 기뻐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결혼은 남자가 장가를 가는 것이었다. 즉 남귀여가혼이었던 것이다.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처가에서 도움을 받았고, 자식을 처가에서 낳아 길렀다.

물론 고려 또한 정치나 군사관계에 있어서는 다분히 남성 위주 사회였다.

그러나 그 남성들은 여성들과 더불어 살아가거나 보호하는 위주였고, 대등하게 대하는 분위기였다.

쌍화점 등의 고려가요를 보여도 남녀상렬지사를 다루는 가사의 노래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그리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려시대에 이름을 알린 여인으로는 고려병사 이관의 딸 설죽화이다.

아버지 이관이 죽자, 남장을 하고 무술을 익혀 강감찬의 휘하에서 아주 용감히 싸운 여인이다.

고려 성종때부터 성리학을 받아들이며, 여성에 대한 수절등에 대한 건의를 하였으나 그런 주장 또한 재혼을 금지시키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수절을 장려하기 위해, 남편이 죽고도 재혼하지 않는 여성에게 ‘수신전’을 주었지만 큰 효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유럽은 이런 고려보다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는 진보적이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기 체사레 보르자의 여동생이자 절세미녀였던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자신의 오빠와 아버지인 교황의 야망에 의해, 이리저리 결혼을 하며 진정한 사랑 대신, 세 번의 결혼을 해야 했던 불운의 여인이다.

엘리자베스1세가 남성들을 호령하며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며 대영제국을 이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 헨리8세가 물려준 성병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며 스스로 처녀로 영국과 결혼했다하며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계시를 받았다며,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킨, 잔다르크는 결국 프랑스왕에게 토사구팽당하며,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 마녀로 화형당했다.

천문학자로 유명한 브라헤를 기억해도, 브라헤를 도왔던 거의 그의 연구의 태반에 영향을 끼친 소피브라헤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4)조선시대

조선시대 대표여인하면 떠 오르는 것은 바로 신사임당이다.

현모양처의 대표표본이자 오만원권의 모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모양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신사임당의 이름은 인선으로 외가에서 태어나 외가에서 자랐다.

아버지 신명화의 첫째딸로 덕수이씨는 이원수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친정인 강릉에서 머물며 자식들을 낳고 길렀다. 가끔 시집에 들르곤 하다가 38살의 나이에야 시가에서 살기 시작했다. 사임당은 비교적 자유롭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의 사랑과 전폭적 지지로 공부를 함에 구애받지 않았고, 마음껏 본인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자랐다. 여자라고 차별받지 않았고, 시가살림을 위해 서울로 옮겨서도 항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했다.

또한 자꾸 과거시험에 떨어지는 이원수를 한심해 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현모양처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시댁보단 친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림과 글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그녀는 자식을 가르침에도 이런 친정쪽의 영향이 더 컸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불운의 삶을 거쳐간 또 다른 여성천재가 있다.

바로 허난설헌이다. 허균의 누이이자 뛰어난 시 작품으로 중국에서 오히려 그 진가를 더 인정받은 여성이다. 친정은 여성에게도 같이 공부를 시키는 등 오히려 자유로웠으나 시댁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보다 글솜씨가 뛰어난 아내를 질투하고 미워했던 남편과, 시어머니의 구박은 그녀를 힘들게 했다.

거기다가 그 당시 조선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글을 폄하하고 한심해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아픔, 그리고 아이들의 죽음이었다. 결국 그녀 또한 쓸쓸히 아파하며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글은 다행히 허균에 의해 문집화 되었고, 지금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느낌으로 세련된 시들이 남겨져 있다.

처음부터 조선이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중요시 되고, 불교가 천시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졋다.

일단 제사가 절이 아닌 개인의 집에서 치러지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시댁에 살고 있는 딸들이 친정제사의 주관이 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시댁에서 친정의 제사 음식을 만들고, 친정식구들을 부르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면서 결국 많은 집안에서 제사를 장남이 주관하게 되고, 그러면서 유산의 상속에도 불평등이 생겨났다. 제사를 장남이 주관하게 되니, 장남에게 재산을 몰아주게 된 것이다. 경제적 권한도 제사에 대한 권리도 사라지면서 여성의 지위는 갈수록 낮아졌다.

거기다 임난과 병자호란 등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남성위주의 가치관이 더욱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두 번의 전쟁에서 사회의 주류이자 지도자역할을 했던 양반이나 왕은 도망을 가는 등 존경받지 못할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그들은 좀 더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지키는 모습을 통해 다시 존경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그 도덕적 규율을 지켜야 하는 대상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수절을 중요시 여기며, 수절을 강요, 수절을 위한 죽음을 조장하기도 했고, 병자호란 후 청군에게 잡혔다 도망 온 여성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힘없는 여성들만이 희생양이 되어 고난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유럽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여성의 지위를 높이고자 하려해도 아직까지 그 장벽은 높았다.

거기다 중국은, 송에서 시작 명청시대 엄청나게 유행하기 시작한 전족은 여성들의 삶을 얽메었다. 어린 시절부터 발을 구부려 천으로 감싸. 아주 작은 발로 만드는 이 전족은 결국 여성들이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만들었다.

5)근대시기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수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양선의 출몰과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과 사상, 또한 서양 세력과 관련해 개방과 쇄국을 논하며 분열된 나라.

서양은 식민지를 넓히며, 자신들의 힘과 부귀영화를 누리려 노력하던 때이다.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부귀를 통해 수많은 발명과 발전을 이루는 전성기였지만, 여성운동 또한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게 되면서 혁명에 참여 하고, 또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인 여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 인물로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올랭 드 구즈가 있다. 빈민가에서 태어났으나, 글을 썼고,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도 있다”면서 여성의 권익을 주장했지만,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그 후 서양사에서는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이 탄생했고, 1차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에서 또 전쟁밖에서 경제적으로나 많은 힘이 되어준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주게 되고, 여성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여성은 그러지 못했다.

근대화의 물결이 닿기도 전에, 우리는 일본의 강제점령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자신들식의 여성관을 불어 넣었다.

그것이 바로 현모양처이다. 여성은 집안에서 그저 아이를 잘 키우고, 남편 보필을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가를 위하는 것이며 여성의 의무라는 것이다. 목소리가 커서도, 자신의 권리를 내세워서도 안되며, 양보가 여성의 미덕이며, 참는 것이 여성의 도리인 것이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남성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성의 이상적 모습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고, 똑똑하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여성은 드세거나 남성에게 인기없는 한심한 캐릭터로 묘사되어졌다.

우리나라의 신여성들 또한 남성들의 삐뚤어진 잣대와, 남성 자신들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운 이중성으로 짓밟혔다.

대표적 인물로 나혜석을 들 수 있다. 미술교사로 또한 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나혜석은 결국 남편의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가족과 사회, 또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아 훗날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다. 첩도 모자라 기생질까지 서슴지 않는 조선의 남성들이 여성의 정조에는 엄중하면서도 잔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근대화를 이바지하고, 독립운동에도 목숨 걸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남자들에 비해 덜 대우받고 역사책 등에서도 언급이 적다.

끝~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역사 속 여성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결국 지금 우리곁을 지키는 제사와 남녀차이와 관련된 풍습 등은 기껏해야 조선시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것이다. 거기다 고려시대의 모습은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수많은 남성들은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삼아, 그 때의 모습이 진정한 예법인양 강요하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와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최초 여성변호사인 이태영의 노력과 수많은 여성들의 힘으로 가족법이 개정되었고, 또한 호주제도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에는 정말 많은 눈물과 고난이 있었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후남들이 눈물을 흘렸고, 또 수많은 누나와 여동생들이 남동생이나 오빠의 공부바라지를 위해 공장에 가야 했다.

똑똑하고 영특한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고, 수많은 법정싸움이나 이혼에서의 재산분배 등에 불이익을 받았다.

지금은? 그렇다. 양육권이나 재산분배, 이혼과 재혼 등에서 여권신장은 많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여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남아 있다. 거기다 여성들조차도 예쁘면 된다, 당연히 남자가 이렇게 해야 한다 등 진정한 양성평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뿌리 깊게 내린 남존여비 사상은 남자와 여자 모두가 동등해질때 사라질 수 있다.

정신적으로 아직도 남성우월주의에 젖어 있거나, 혹은 난 여자니까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갇혀 있는 이들이 있는 한, 진정한 양성평등은 어렵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차이와 차별의 문제이다. 서로의 차이는 있다. 여성과 남성은 당연히 다르다. 그것은 차이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하는 것은 옳지 않고 폭력이다. 결국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남녀가 모두 소중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남성의 어깨를 누르는 경제적 문제를 서로 같이 짊어지고, 여성의 어깨를 누르는 시댁과 친정의 불평등이나 제사와 명절의 문제 또한 시댁먼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부부가 올바른 독립을 한다면 이 긴 세월 반목했던 여성과 남성의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역사상 언제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있어왔다. 지금은 알파걸이란 이름으로 능력 있고 사회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상이 바람직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여성의 또 다른 굴레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남녀의 가사평등이 실현되지 못한 사회에서, 알파걸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짐을 지우는 건 아닐까. 우리보다 먼저 양성평등에서 앞서는 서양에서조차도 유리천장이란 말로 여성들이 당하는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사회적인 제도와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의 3,40대 주부들을 보면 여실히 문제점이 드러난다. 나름 귀하게 큰 딸들이 지금은 며느리이자 어머니일뿐이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모성애의 굴레와 효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회사업무 후 하는 공부는 칭찬받지만, 아내의 업무 후 공부는 나쁜 엄마가 되는 길이다. 다시 원점인 것이다. 모성애는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텔레비전의 여성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의존적이다. 워킹맘이지만 멋진 모습보단 언제나 동동거리고 아이에게 미안해한다. 혹은 시댁에서 갖은 구박을 받지만 결국 여성의 희생 하나면 모두가 좋고 좋은 것이다라는 식의 결론이다. 마지막 해결은 언제나 멋지고 돈 많은 남성의 요술지팡이의 몫이다.

교육이다. 그리고 언론의 역할도 필요하다. 사회적 분위기 또한 적극적으로 동조해야 한다. 지금의 내 딸과 내 아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결정할 때이다. 도움과 배려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성취와 성장도, 아이양육과 가사도 같이 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돈 많은 남자의 요술지팡이로 말괄량이지만 씩씩하고 예쁜 여주가 신데렐라가 되는 이야기도 이제 그만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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