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데 읽기~

1. 성과 속

사람들은 성스럽다는 말의 뜻과 반대로 속되다는 말을 사용한다.
성스럽다는 것과 속 된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이 조금은 생소하다.
성스럽다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속 된 것은 추한 것?
우리 삶을 가득 채우는 것은 성스러움일까 속 된 것일까
어떻게 성스러움과 속됨을 구분할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조금은 그 담에 근접한 것 같다.
그럼 구체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 보자
엘리아데는 루마니아 출신이다.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엘리아데의 책 속에서 느껴지듯 인도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종교학 교수로써, 종교에 대한 입문격인 성과 속이란 책이 대표저서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성은 성스러움을 의미한다.
속은 속된 세계이다. 세상을 이분화시킨 것이다.
성은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무언가, 천상의 것으로 느껴지지만, 속됨은 우리가 속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성스러움을 통해 거룩함을 찾고, 거룩함을 찾아내는 것을 성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스러움과 속됨의 차이를 찾기 보다는 다양한 예식이나 개인적 경험 등을 통해 속됨이 성스러움으로 변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먼저 첫 번째 공간에 대한 분화이다.
특히 문지방을 통해,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분한다. 우리나라 또한 문지방을 통해 안과 밖이 나뉘고,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집을 지키는 신들이 달라지며 하는 행동도 달라진다. 문지방을 통과하는데는 절하기, 엎드리기, 손을 대는 등의 다양한 의식이 필요하며, 그 문지방은 역병이나 적대적 인간을 막아주며, 수호신들과 정령등의 세상은 문지방안이다. 그래서 문지방 위에서 제물이 받쳐 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삼한의 소도 또한 솟대 사이에서 종교와 세속적인 것이 갈라진다.
야곱의 하늘의 문, 그리고 카오스와 코스모스, 기독교는 십자가를 통해 성과 속이 나뉘기도 하지만 또한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그 경계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영적이며 순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속됨이 경계를 허물고 개인의 경험으로 인해, 혹은 다양한 문화별로 통과의식을 이루면서 성스러움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종교적 인간 즉 천군이나 제사장 등의 징표를 가진 이들이 다양한 방법과 계시를 통해 속됨을 성스러움으로 바꾸는 것이다.
미지의 땅을 개간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서 신성화시키는 행위는, 훗날 유럽인들이 십자가 아래 미지의 땅이라 이름붙인 라틴아메리카 등을 신미지화하면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나름 자신이 생각하는 미지의 땅을 질서화라는 미명하에 신을 위한 신성화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질서를 강요한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랑민족인 아룬다 부족의 아칠파인들은 신적 존재인 눔바쿨라가 선조를 만들고 질서를 창조한 후, 고무나무의 줄기에서 거룩한 기둥을 만들고 피를 바른 후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아칠파인들은 언제나 이 거룩한 기둥을 가지고 다니며 기울어지는 방향에 따라 진로를 취한다고 한다. 기둥이 꺽이는 것은 파국을 의미한다.그리고 이 기둥이 바로 하늘과 우리를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믿었다.
이 글을 읽으니 우리 나라의 새 숭배가 생각났다.
솟대에 새를 조각해서 올려 놓고 신성불가침 지역을 의미하기도 했고, 또 새는 바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믿었다.
그래서 새를 가지고 다닐 순 없기에, 제의와 관련된 곳은 새를 조각한 솟대를 꼽아 지금은 하늘과 교신 중이니 기다리라 들어오지 마라는 의미였다.
과거의 동서양은 많은 면에서, 특히 속됨의 거룩함 현상은 닮아 있다.
장소의 신성함이다. 세계의 중심,세계의 기둥을 정함으로서 신성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도의 메루산, 골고다 등이다. 천상과 가까운 장소이기에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즉, 평범한 공간들은, 질서가 부여되면서, 혹은 열린 공간으로 하늘과 교류하면서 또는 세상의 중심이면서 성현이나 성화의 공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엘리아데가 내린 결론 “ 세계는 그것이 스스로를 거룩한 세계로 계시하는 한에서 세계로 코스모스로 인식될 수 있다” 이다.
결국 성스러운 곳 또한 속된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생기는 신성성에 의한 것이다.
어느 한 공간에서, 거주하는 곳을 택하고, 창조함으로써, 혼돈을 질서화할 분만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신들이 창조한 공간과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 성화하기도 하며, 신들의 성스러움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시간이다.
종교적인 인간에게 시간은 거룩한 시간, 축제의 시간, 세속적인 시간, 일상적인 시간들이 있다.
종교적 인간은 제사나 의식을 통해, 세속의 시간을 거룩함으로 바꾼다.
제의는 결국 태초의 거룩한 사건들을 재현하는 것으로 무한정으로 회복되거나 반복될 수 있다.
요쿠트 족은 “세계가 지나갔다”라고 말하는 것이 한 해가 지나갔단,s 것이다. 이 어법은 질서가 태어나고 자라다 다시 태어나는 재생의 의미를 말한다.
결국 새해는 새로운 탄생, 즉 우주창조를 의미한다. 새롭게 과거 태초의 세상 탄생을 제의 하면서 질서를 다시 만들고, 태초의 순수한 세상을 모방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시간은 소멸되었고, 새로운 시간은 순수하며 강력하고 거룩한 시간을 재탄생시키기 위해 제의에 의해 탄생된다.
신들의 시간과 신들의 모습을 모방함으로써, 거룩하고자 한다.
또한 신들은 괴물을 살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 모습마저 닮기 위해 성과 식인의 풍습까지 종교제의 로 탄생되기도 하였다.
돼지를 제물로, 과일을 꺾어 제물로 바치는 것 또한 식인의 풍습과 같은 선상에 있다.
거룩한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거룩한 시간을 회복하고 되살리기 위해, 신들의 시간 속에 돌아가기 위해 결국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로 기독교는 시간이 되풀이되며, 거룩한 시간을 재현하고, 새해가 돌아오면 원초적인 시간이 부활한다.
그리고 부활한 시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한다.
세 번째는 자연의 거룩함과 우주적 종교이다.
성스런 즉 종교적인 인간에게 자연은 종교적 존재이자 장소이다.
마오리족의 초고신은 이호이며 , 이호는 상승이며 가장 높은 자를 의미한다.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높은 곳이 바로 최고신으로 본다.
천지창조를 한 후 신은 하늘로 올라가고, 최고신은 멀어져 감으로서, 최고존재가 분질되면서, 우주, 동물, 나무, 인간을 창조한다.
요루바족도 올로룬이란 최고신은 세계를 창조 후, 완성과 지배하는 일은 하위신인 오바탈라에게 맡겼다.
최고신은 하늘로 갔고, 아프리카의 초원지대 팡족은 “신은 위에 있고, 인간은 밑에 있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각자 편하게, 각자 자기 집에 있다.”라고 하였다.
물은 우주 전체를 의미하며 삶 속에 숨은 힘을 의미한다. 부활인 동시에 씨앗으로 희망이나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가치이다.
기독교의 세례의식의 성스러움은 물의 성스러움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에도 고대 시들을 살펴보면 물은 부활이며 죽음이다.
공무도하가에서 물을 건너는 백수광부는 죽음을, 황천길과 레테의 강 또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물은 대지보다 앞섰으며, 부활을 의미한다. 노아의 홍수 등을 통해 파멸을 의미하지만, 또한 씨앗을 품어 생명을 만드는 창조도 의미한다.
아기를 낳아 대지위에 올리는 것 또한 씨앗, 생명,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한다. 대지는 여성이며, 생산력이며 출산자이다.
물론 몇몇 종교, 특히 그리스신화에서는 가이아는 아무 도움없이 우라노스를 낳는다.
자생적인 출산은 여신에 대한 신비로움과 종교적 위력에 대한 신앙이다.
아프리카의 와나품족의 추장 스모할라가 경작이라는 것은 대지의 절단, 즉 어머니를 살해하는 행위로 보았기에 경작을 거부한 것이다.
분만과 죽음, 삶과 끝, 부활, 이 모든 것이 대지와 상통하며, 그 대지는 여인과 같은 상징성을 간진다.
남편은 그럼 무엇인가? 하늘이다 아내는 대지이다. 혹은 신랑과 신부는 하늘과 대지로 같은 존재가 된다.
즉 신랑과 신부의 결혼행위는 우주적이며, 출산과 풍요를 의미한다.
그 외에도 산, 동굴, 등 밀폐되고 성화된 곳들은 거룩한 장소가 되기도 하고 신성화 되기도 한다.
그런 대지위 의 나무는 생명과 청춘의 상징이다. 또한 지혜를 의미하기도 하며, 열매를 맺기에 새로운 재생,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무나 식물은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난다.
인간이 새해라는 개념으로 부활하듯, 나무와 식물은 봄으로 새로운 태고적 순수한 시간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달 또한 점점 커지고 작아지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리듬과 생명력을 보여주기에 종교적 가치가 부여된다.
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성스럽고 태초의 순수함을 되돌리는 장소이며 물건이기에, 속된 곳에 존재하더라도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시간도 자연도, 인간들의 생각과 제의를 통해,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네번째는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이다.
“이 여인은 살아 있는 토지와 같게 되었다. 너, 남자여, 그녀에게 씨를 뿌려라 ”라고 아타르바 베다에서 말한다.
아내를 포옹하며 당신은 대지고 하늘이라고 선언하는 힌두교 또한 인간이란 성스런 존재임을 의미한다.
성스러움도 제의화 되고 식사 또한 제의화 되는 것이다.
신들의 행위와 인간의 삶이 동일시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신성화 되려면 통과제의가 필요하다.
사춘기의 입사식, 탄생, 결혼, 죽음,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통과제의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이 성스러움을 위한 위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좁은 이유는 그만큼 세속적 삶에서 성스러움으로 가기 위한 길이 힘들기 때문이다.
입사식을 통해 제2의 탄생을 하기도 하고, 절대적이거나 거룩한 삶을 새로 부여받는 다고 느낀다.
원시상태의 인간들은 생존을 통해 주어진 존재에서 완성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연적인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초자연적인 죽음이나 경험, 부화를 통해야만 제2의 탄생을 할 수 있다.
그런 시련과 상징적 죽음을 압사제의로 표현한 것이다.
원시인은 인간의 종교적 성스러움을 위해 시도하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들이 입사식이다.
입사식은 거룩함, 죽음, 성이다.
숲에서 단련받거나, 은둔생활을 하거나, 죽음의 상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두막에서 외따로이 있음은, 자궁을 의미하며, 거기서 시련을 겪으면서 비밀스런 전통을 배운다.
또한 숲 ,정글, 어둠은 괴물, 괴물의 뱃속엔 우주적밤이 있다고 믿었다.
매장되거나 흰 분을 바르거나 직접 이빨로 음식을 먹는 등은 죽음을 의미한다.
먹히고 잘려지고, 고문당하고, 절단된 입사식의 아이들은 죽음을 겪고 탄생하는 것이다.
할례나 포경, 문신등은 신체훼손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혹은 대리동물들의 죽음을 통해 재탄생하기도 한다.
여성들은 첫 월경이 시작되면, 분리가 강요된다.
외따로 떨어진 오두막에서 접촉을 피하고 날것만 먹어야 한다.
어두운 곳에서 격리되며, 월경의 시작이 다르기에 집단이 아닌 개별로 입사식이 시작된다.
생명의 창조자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 종교적 성스러움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입사식에서 나와, 밝은 태양 아래, 빛 아래 서는 것은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출생과 죽음 그리고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지식과 지혜는 이런 입사식이 가져다 주는 열매이다.
이런 방식들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바뀌게 된다.
세속적 죽음을 통해 다시 탄생,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방식은 미신과 금기로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근대인들에게도 이러한 것들이 남아 있다. 근대적 인간들은 세속적이며 비종교적이라고 말한다.
종교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수많은 종교적 금기 아래 살아가고 있다.
비종교적이지만, 책 속에 신화속에 그리고 수많은 미신이라 불리는 금기 속에 무의식중에 은폐되어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성은 인간의 새로운 타락에 해당한다.
그러나 제2의 타락 이후 무의식의 심연으로 들어가 잊혀지고 말았다. 이제 철학자 심리학자 신학자들의 영역이 되었다고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많은 성스러운 장소나 행위가 있다.
산위 곳곳에 돌무더니에 돌을 얹고 소원을 빌며, 마을마다 서낭당이 남아 있어, 아직도 울긋불긋 천으로 감긴채, 마을을 지킨다.
또한 솟대가 남아 이 곳이 예전 천군이 다스렸음을 의미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생일에 아이 수만큼의 수수경단을 먹이고, 백일을 감사하며 떡을 돌린다. 문지방을 밟으면 어른들에게 한 소리 듣기도 한다.
엘리아데의 말처럼 성스러움과 세속은 어느 공간, 어느 시간이라며 칼 같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누군가는 산책삼아 등산 삼아 가는 산이, 누군가에겐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며 신을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현명하고 현실적인 현대인으로서, 무교라고 이야기하는 이들 또한 그렇다. 아이의 백일떡을 먹으며 아이가 건강하길 바라고, 누군가가 소원을 빌기위해 쌓아놓은 돌무더기에 돌을 보태진 않더라도 무너뜨리진 않으려 노력한다.
아이의 탄생에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 감사하고, 누구인지 모를 신에게 간절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 적이 다들 있다.
성스러움과 속됨은 나뉘어져 있지 않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성스러운 시간, 속된 시간, 그리고 성스러운 공간과 속된 공간, 성스러운 행동과 속된 행동은 여전히 우리옆에 있다. 우리 마음속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서구 사회의 진보의 역사를 믿지 않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고대인들의 삶에 대한 향수와, 순수에 대한 그리움은 많은 이들의 동감을 샀다.
비종교적인 인간 또한 고대인들의 후손이니, 종교적인 인간의 후예인 셈이며, 그들의 근원에는 종교적 성스러움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세계는 결국 성스러운 세계인것이다. 신의 모방을 통해 모든 것은 성스러운 곳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과 속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나 경험에 의해 속된 곳이 되기도 하고 성스러운 곳이 되는 것이다.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비종교적인 현대의 공간은, 어쩌면 신을 위해 열린 곳이며, 모든 곳이 성스러움이자 신을 위한 출구일 수도 있다.
그저 내게 주어진, 내 몫의 시간이라 믿는 현대의 시간 또한, 부활이며 재생이자 신을 위한 축제의 시간이 아닐까



2. 이미지와 상징
책 내용 중
“신화는 태초에 , 원초적 무시간적 순간, 신성한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이 신성한 신화적 시간은 비신성화된 우리의 일상적 존재가 자리잡고 있는 지속적이고 불가역적인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불교에서나 인도의 사변에서나 시간은 무한한 것이고 보살들은 모든 중생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영원한 화신으로 나타날 것이다. 시간에서 탈출하여 존재의 쇠바퀴를 부수는 유일한 가능성은 인간의 조건을 파기하고 열반을 획득하는 것뿐이다.”


(어렵지만 유익한 책, 나만 어려운가 ㅠㅠ 이기적 유전자의 밈이 생각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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