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복덕방과 오정희의 동경


두 책 모두 주인공들이 노년의 인물이다.
이택준의 복덕방속 노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이 배경이며, 오정희의 동경 속 노인들은 현대가 배경이다. 그러나 시대는 다르다 해도 두 소설 속 노인들은 변화와 상실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채 불우한 결말을 맞는다. 정신적 육체적인 죽음과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서서히 죽음으로 다가가며 소설 속 주인공들을 통해, 자신의 삶들을 되돌아 보게 한다.
그럼 먼저 오정희의 동경 속 인물을 살펴보겠다.
동경 속에는 늙은 노부부가 주인공이다. 젊디 젊은 아들을 잃은 후, 삶의 의미조차 퇴색되어 마치 그저 허깨비처럼 살아가다가, 결국 육체적인 늙음과 함께 낡은 장식품같아진다. 죽음같은 잠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동경 속에 나오는 구절 중에
< 아이는 이 요술 상자를 통해 무엇을 들여다보았을까. 그는 아이의 눈이 되어 아이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만화경을 집어들었다.>
<뭐든지 볼 수 있대요. 그는 아이의 말을 흉내내어 중얼거리며 빠르게 만화경을 돌렸다. 돌리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유리와 거울과 색종이가 어울려 모였다 흩어지는 모양이 다양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빠른 속도로 분열하고 번식하는 병원균과도 같았다. 색종이의 선명한 색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늙어가는 육신으로 삶을 이어간다.
미각도 , 검은 머리도 모두 잃어갈 것만 가득하다. 남은 것 또한 그저 언제 사그라들지 모를 육신뿐이다. 그들의 정신은 어쩌면 영노를 묻은 그 봄에 이미 사망선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이었을 아들을 잃고, 그들은 그때부터 노인이 되어 살았다. 이제 육신도 늙고 진짜 노인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지만, 그래도 아직 삶에 대한 희미한 집착으로 혹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건강하고 젊던 시절이 떠오르지도 않아, 옆집 여자아이의 만화경 속 세상이 궁금해 훔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만화경은 이제 그들에게 그저 너무 빠르게 분열하는 병원균처럼 느껴질 뿐이다.
<겨우 스무 살이었어요. 스무 살에 뭘 안다고. 여드름이나 짤 나이에 세상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그 애가 죽었어도 우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영노는 어느 봄날 바람개비처럼 달려나갔다. 채 자라지 않은 머리칼을 성난 듯 불불이 세우고, 늙은이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을 요구하는 어떤 새로운 삶을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오, 죽은 애들은 특별해요 라며 힘들게 한 음절씩 내뱉는 그와 흐느껴 우는 아내는 어쩌면 영노가 죽은 이후로 꿈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흉몽이며, 그런 흉몽을 이겨내려 아내는 맥을 만들고, 과거의 일들을 마치 아련한 꿈처럼 기억해 내려 한다. 살아있다는 단어에 어울리는 모습은 찾을 수 없는 두 노인의 모습에서 무기력함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싶고,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맥과, 옆집아이의 만화경이다. 그러나 많아지는 맥도, 훔친 만화경도 죽음에 맞설수도, 그들의 무기력함을 되돌릴 수도 없다.
영노를 묻으며 그들은 노인이 되어버렸다. 과거를 기억하며 위안을 받지만, 그리움에 과거에 매달리지만, 그럴수록 현실과는 더욱 괴리감이 느껴질 뿐이다. 과거만이 그들이 살아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물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생동감이 아닌, 하나의 붙박이장같은 두 노인의 모습은 무기력함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만화경을 훔쳤지만, 그 만화경 속의 색종이를 번식하는 병원균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들을 잃고 늙어가면서도 삶에 끈을 놓지 않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틀니없이 웅얼거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에게 아들은 특별하다. 가장 빛나던 스무살의 영노는 그래서 썩어버리는 시체일 리가 없다. 한 조각 거울이기에 다시 닦아 내면 새 것처럼 빛을 내며 햇살속에 깨어날 것이다. 그에게 희망은 없고, 무기력함만이 남아 초여름의 날씨와 죽음같은 긴 잠과 하나과 될 것이다.
이태준의 복덕방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라를 잃고, 삶의 터전도 잃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특이한 점은 그 주인공들 모두가 노인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한 밑천 잡은 것만 기억한 채, 지금은 빈궁한 삶을 힘들어하며, 다시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용가 딸을 둔 안 초시와, 복덕방에서 공부도 하고 새로운 기회를 꿈꾸지만 녹록치 않은 박희완,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기개와 용맹함 따윈 아무 의미없이 복덕방으로 입에 풀칠하며 사는 서참의가 그 주인공들이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서참의는 비록 예전과는 다른 비굴한 삶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도 사는 것에 위안을 삼지만, 안초시는 과거의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적응도 힘든 지금의 이 현실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실사회에 적응 못한체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고, 돈만 벌면 다시 예전으로 모든 것이 돌아갈 거라 믿지만, 실상 그래서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하게 된다.
<“나 서 참의일세. 알겠나? 흥……자네 참 호사(豪奢, 사치)야…… 호살세. 잘 죽었느니 자네 살았으문 이런 호살 해보겠나? 인전 안경다리 고칠 걱정두 없구…… 아무턴지…….”
하는데 박희완 영감이 들어서더니
“이 사람 취했네그려.”
하며 서 참의를 밀어냈다.
박희완 영감도 가슴이 답답하였다. 분향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한 마디 했으면 속이 후련히 트일 것 같아서 잠깐 멈칫하고 서 있어 보았으나
“으흐윽…….”
하고 울음이 먼저 터져 그만 나오고 말았다.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도 묘지까지 나갈 작정이었으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도로 술집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
안초시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은 부동산 투자의 실패에도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계속 실패로 딸에게서도 외면 받는 처지의 슬픔때문일 것이다.
<돈을 쓸 때는 일 원짜리 한 장 만져도 못 봤지만 벼락은 초시에게 떨어졌다. 서너 끼씩 굶어도 밥 먹을 정신이 나지도 않았거니와 밥을 먹으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재물이란 친자간의 의리도 배추밑 도리듯 하는 건가.)
탄식할 뿐이었다. 밥보다는 술과 담배가 그리웠다. 물론 안경다리는 그저 못 고쳤다. 그러나 이제는 오십 전 짜리는커녕 단 십 전 짜리도 얻어 볼 길이 없었다. >
그렇게 세상은 차갑게 안 초시를 외면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의리는 늙은 서참의와 박희완 영감뿐이었다. 그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것도 서참의였다. 그리고 안초시의 죽음앞에서도 딸은 후회와 슬픔대신 자신의 명예부터 생각했다.
<“관청에 어서 알려야지?” “아스세요.”
하고 그 딸은 펄쩍 뛰었다.
“아스라니?”
“제 명예도 좀…….”
하고 그는 애원하였다.
“안될 말이지. 명옐 생각하는 사람이 애빌 저 모양으루 세상 떠나게 해?”
“…….”
안경화는 엎디어 다시 울었다.
그러다가 나가려는 서 참의의 다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


1930년대 소설임에도 이태준의 복덕방 역시 전혀 낯설지 않다.
자식들에게 푼돈을 타내며 어버이로서의 존엄성도 명예도 존중도 받지 못한 체, 쓸모없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모습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한 대가도, 거기에 대한 존경도 없이, 지금 현실의 늙고 나약한 모습만을 전부로 취급당하며 버려진다. 마치 예전엔 비싼 안경이었으나, 지금은 다리가 하나 부러져 노끈으로 묶은 취급이다.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인들 했으나,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위해 무엇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냉혹함 속에서 거기다 더욱 이기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의 삶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기다리면 올 죽음인데도 냉혹한 세상은, 가난한 자와 돈을 벌지 못하는 자에겐 그 죽음마저 어여 가라 조급히 등을 내몬다.
두 소설 속의 노인들 모습은 다른 듯 닮았다.
자식을 잃었고 삶의 의욕도 잃었고,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조차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죽음같은 잠에 빠지는 동경 속의 노인, 그리고 현실에 적응 못한체 비참한 삶 속에서 죽음마저 재촉당하는 복덕방의 노인들 모습을 보며 지금의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지금 또한 그렇다. 세상은 100년간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로 변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은 버겁다. 삶의 의미마저도 버겁다. 관조하며 살라 했다가, 재테크도 하라고 했다가, 또 과소비를 미덕처럼 이야기 하다가 이제는 또 버리고 홀가분하게 살아라 한다. 이렇게 정신없는 세상속에서는 초지일관하는 하나의 마음을 갖기도 버겁다. 변치 않는 무엇인가를 가지기에도 너무 소란스럽다.
이런 현대의 삶에 노인들의 삶은 사이클이 다르다.
시속 200Km의 기차를 젊은이들은 달리며 쫓아가지만, 노인들은 그 뒤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 속도를 따라가기엔 더 이상 다리도 눈도 아무것도 받쳐주지 않는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 뛰어가기에도 숨이 턱에 찬다. 이 현실은 사실 젊은이들에게도 행복은 아니다.
자식까지 잃은 노인이, 혹은 이 현실에 적응못하는 거기다 이기적인 딸까지 둔 노인이 따라가기엔 너무 힘든 속도다. 그렇게 젊은이들은 미친듯이 따라가다 어느 날 길을 잃고, 뒤에 남겨진 채 그렇게 또 늙고, 노인들이 이미 뒤쳐진 채, 누가 돌아볼까 손을 흔들 준비를 만반에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뒤를 돌아보며, 혹은 옆으로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만 있다. 못된 계집아이만이 한번쯤 심술이든 뭐든 그래도 손을 흔든다.
죽은 자식만이 무덤에서 낡고 녹슨 거울로 기다려 줄 뿐이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생기를 다 잃은 채 붙박이 장이 되어 간다. 그러다 묘비의 비석이 되겠지. 슬프지만 그러한 것도 삶이다.
이 두 편의 단편을 읽으며, 생각해 본다.
자식이란 존재에 대해서, 동경에서 두 노인은 젊은 날의 봄같던 자식을 잃었고, 복덕방에선 어린 시절 애비가 전부였을 딸이 이기적이고 차갑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상처받았을 노인이 나온다. 정말 젊은 나이에 혹은 어린 나이에 떠나간 자식은, 아이들은 특별한 걸까.
앞으로 우리는 고령화사회에서 살게 된다. 나 또한 장수라는 말이 복이 아닌 혐오와 두려움의 단어가 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해 본다. 젊음과 늙음 사이에 있는 나에겐, 노인도 젊은이들도 다 안타까운 시대다.
그 누가 부모가 고맙지 않겠는가, 그 누가 자식이 그렇지 않겠는가.
너무 빠른 속도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자들만을 위한 기차를 만들어 낸, 지금의 사회에 묻고 싶다. 그런 빠른 속도는, 죽을 정도로 달려야 하는 삶의 무게는 누굴 위해 만들어 진걸까. 아무도 원하지 않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못한채 달려야하는 이 기차는 누가 만든 것일까.
갈수록 노인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늙어갈 것이다.
소외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게 소외된 세상속에서 맞볼수도 .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체속에서 .
복덕방의 노인들이 그러하다.
다시 한번을 꿈꾸기도 하고, 그저 이정도면 .
그러나 결국 신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 전의 세대들에게서 주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오정희의 소설 속 노인들은 노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본질을 잃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본연의 색은 남지 않은채 바스라질 .
두 작품 다 읽고나서 씁슬했다.
나이듦에 . 너무나 정신없이 나이듦은 . 옛날이 속도로 늙어가면서 지금의 속도를 맞출 수 없이, 예전에도 지금도 노인들은 뒤쳐지고, 젊은이들은 마치 본인들이 영생의 존재인냥 젊은냥 . 불손하다.
그 속에서 힘들어하다 결국은 예전의 젊음을 꿈꾸지만 이제 더 늦어버렸고 되돌리기도 힘들다.
그리고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식이다. 자식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어느덧 나이들어 , 나이들어 . 생떼같은 허상같다.
두 작품을 읽으며 삶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지 그러나 그 몇 배의 늙음을 외롭게 서서히 조금씩 감각을 잃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 나는 받아들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큰 진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누구나 늙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애닳게 .
부질없는 욕심은 잠시 내어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조금씩 사라져가는 내 삶의 감각들에게도 감사하며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늙는 것을 바라본다.
갈수록 노인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늙어갈 것이다.
소외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게 소외된 세상속에서 맞볼수도 .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체속에서 .
복덕방의 노인들이 그러하다.
다시 한번을 꿈꾸기도 하고, 그저 이정도면 .
그러나 결국 신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 전의 세대들에게서 주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오정희의 소설 속 노인들은 노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본질을 잃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본연의 색은 남지 않은채 바스라질 .
두 작품을 읽으며 삶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지 그러나 그 몇 배의 늙음을 외롭게 서서히 조금씩 감각을 잃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 나는 받아들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큰 진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누구나 늙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애닳게 .
부질없는 욕심은 잠시 내어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조금씩 사라져가는 내 삶의 감각들에게도 감사하며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늙는 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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