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나는 필립을 돌려보내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나는 흐느껴 울지도 않았고, 또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자문하지도 않았고, 어째서 훨씬 이전에 눈치 채지 못했던가를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뜻밖의 발견은 나를 분쇄해 버렸다.……. 모든 게 끝장났다. 나의 모든 꽃들은 일시에 꺾여 내 주변에 여기저기 내버려지고 짓밟힌 채 깔려 있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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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그녀 앞에 서면 나는 뜨거운 불에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불태우며 녹여버리는 그불이 도대체 어떤 불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나로서는불타며 녹아버리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갖 인상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자신을 농락해 보기도 하고, 추억을 외면하고 미래에 대한예감에는 눈을 감았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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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간단히 말해서 사람의 삶이란 것은 "먹고 마시다가 늙어서 죽는것"으로 요약된다.

비로소 인생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되어
마흔에 중풍이 오고
먹고 마시고 지겨워하고 뚱뚱해지고 쇠약해져
마침내 자기 침대에 누워
아이들과 찔찔 찌는 아낙들과
의사들 사이에서 눈을 감는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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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예전에 표지의 그림과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했다가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도 그럴것이 인간세상에서 금기시되는 근친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다. 다만 내가 예전에 읽었을 때 내 뇌리에 강하게 남은 장면은 하얀 빙판위에서 하나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었다. 그때는 근친이란 소재의 불쾌함보다 스릴리적인 요소가 더 머릿속에 남았었다. 다시 읽고보니 소재도 소재지만 관계가 너무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표현도 대담하여 굉장히 찝찝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자극적인 소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라는 상징적 요소가 주는 구원에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하나가 왜 준고의 손길을 받아들였는지 하나의 입장에서 자세하게 설명돼 있지만 나는 이것이 그루밍 성범죄가 아닐까 생각했다. 준고는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고 그 대신 가장의 무게를 견뎌야했던 어머니의 엄격함으로 인해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몸만 커버린 어른아이가 돼버렸는데 이것이 자신의 핏줄을 향해 뒤틀리게 발현됐다. 솔직히 준고의 그런 정신상태가 매우 역겨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읽어야할지 중간중간에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아마 준고는 하나 또한 자신의 어릴적과 비슷한 충격을 겪었기에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와 하나를 동일시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 또한 지진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은 외로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나와 관계를 하면서 어머니를 계속해서 찾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다만 하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동떨어진 존재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고,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고 다른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했을 때 자신이 이 가족에 한번도 속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겠지만 다른 가족들과 생김새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던 예민한 아이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준고를 보자마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안정감을 느꼈고, 죽음의 현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충격으로 아우성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깊은 애정이 아니라 집착과 욕망으로 변질된 것에는 준고의 뒤틀린 자아가 아주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결국 하나의 가족에의 결핍을 준고는 아주 이기적인 방식으로 이용했고,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유린한 것이다. 이것이 그루밍 성범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하나가 저지른 범죄가 소름끼치면서도 막연하게 이해됐다. 하나는 준고를 구원자,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존재, 아버지 이상의 자신만의 것이라고 느꼈기에 그 관계가 터부시되는 것을 이성적으로 알았음에도 상관없어했다. 자신의 그러한 상태가 학대의 영향이라는 것도 모른채, 오히려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면서 무서운 집착과 소유욕을 보인다. 그 결과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잠깐의 쾌락과 지속적인 죄책감의 굴레로 떨어진다.

그래서 하나와 준고의 관계에 대해 준고의 여자친구가 느꼈던 것이 내가 느낀 것과 똑같았다. 준고가 하나를 망가뜨렸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는 고마치에게 매우 동감했었다.

하나에게는 크게 4가지 다른 의미의 바다가 있다. 먼저 첫 번째는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죽음의 바다다. 두 번째는 자신을 구해준 아버지,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행복의 바다다. 세 번째는 준고에게서 물려받은 잘못된 욕망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괴물의 바다다. 마지막은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용서하기를 바라는 구원의 바다다.

과연 하나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바다에서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기 안에 있는 어두운 과거를 씻을 수 있을까?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본다. 하나가 피해자라고 해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가 살인자임을 직감적으로 느낀 형사의 말처럼 혈육과 피의 의미에 집착하여 살인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던 선한 자를 죽이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하나는 스스로 괴물이 됐고, 그 순간 평온했던 바다가 순식간에 괴물의 바다로 변해버렸다. 하나가 뒤늦게에야 자신 안의 괴물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는 준고가 자신을 처음 데리러왔을 때 나이가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 나이가 되고보니 준고가 자신에게 했던 짓의 의미를 알게 됐을 것이다. 하나가 직접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준고와의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했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준고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은 오랜 시간 길들여진 집착과 죄책감 사이를 오가는 양가감정이다.

그렇지만 하나가 스스로를 용서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러기에는 너무 큰 죄를 지었고 끝까지 자기합리화를 하는 모습도 얼핏 보이기에 그렇게 바라는 평화가 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죄책감과 자기합리화는 자신의 죄를 내려놓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삶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앞으로도 하나는 그 자신이 원하는 것처럼 바다를 구원의 바다가 아닌 괴물처럼 느낄 것이다. 자신의 심연처럼.

작가의 설정이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하나의 약혼자가 하나의 집을 처음 방문하기 전 길가에서 준고가 죽인 형사의 영혼이 하나와 준고를 맴도는 부분이다. 요시로가 어릴적에 유령을 봤었다는 부분이 아주 잠깐 나오는데 이것을 하나와 준고의 죄를 유령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전개하는것이 개인적으로는 재치있다고 느껴졌다. 또한 그 사건 이후 준고와 하나의 상태를 봤을 때 절대 그들이 원하는대로 미래가 만들어지지는 않을거란 느낌도 들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바다를 보며 살아가지만 그 바다를 어떻게 볼지 결정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몫이다. 평온한 바다를 보기 위해서는 삶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괴물의 바다를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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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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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믿는 것에는 적절한 공기가 필요한 법

중세시대의 수도원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다만 당시의 신학적인 논쟁이 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정말 그 당시에는 그랬는지 궁금할정도로 인물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말을 하기 때문에 스릴감은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전체적인 흐름과 종국의 결말을 이해하기에는 중요했다.

왜 살인이 벌어졌는가? 1차적으로 느끼기에는 사랑과 진리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느껴졌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폐쇄성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호르헤 수도사는 희극적 요소와 웃음이 진리를 추구하는 엄중한 분위기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의 섭리를 받들어야 하는 한낱 인간으로서 위대한 존재의 말씀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희극적 요소로 발현되는 카타르시스와 웃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신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희극과 같이 불행한 일과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말씀을 따르게 되면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영적고통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영적계몽을 이끌어야 하는 수도사의 입장에서 그런 불경한 것들을 타파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진다.

자신은 그저 신의 도구로서 신이 내려주신 진리를 합리적으로 지키기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그의 고백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 오랜 세월 그렇게 믿기까지 얼마나 많은 독을 속에 품고 살았을지 가늠이 안된다. 신념이 광기가 될 때 인간이 얼마나 맹목적일 수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런 인물을 접할 때마다 신기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도 종교가 있지만 일상생활이 힘에 부칠 때 잠시 기대는 수단이지 맹목적으로 하나의 진리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면 아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파괴되는것 같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에 집착하는 것인가? 진리가 절대적일 것이라는 집착과 자신이 진리를 수호하는 자라는 자의식의 비대함, 공동체로서 진리를 보호하겠다는 폐쇄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과연 그들이 믿는 신이 원하는 것일까?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고 왜 굳이 하나의 해석에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웃음이 신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파괴해서 종국에는 세상에 혼란만을 가져올거라고 믿는 호르헤와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인간이 신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신의 수호자라는 광기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 서로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공동체로서 그런 광기가 흘러가게 놔두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파괴할 진정한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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