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창문을 항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책상 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책 한 권과 논문 몇 개를 챙겨서 연구실을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제시 홀 뒤편의 널찍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그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마른 눈 속에 발을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억눌린 듯 커다랗게 울리는 것을 의식하면서,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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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함을 견디는 인생의 고단함

처음 읽어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읽으면서 청춘의 고독함과 방황을 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다 읽은 후에는 그러한 것들이 비단 청춘에만 국한되진 않다고 느꼈다.

와타나베의 젊은 나날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나오코일 것이다. 나오코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여자친구로서 셋이서 어울려 놀기도 했지만 기즈키가 없으면 어색해져버리는, 친구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한 친구였다. 그런 나오코를 다시 만났을 때는 기즈키의 자살 이후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였다.

기즈키의 자살은 와타나베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나오코에게는 그 이상의 일이었다. 자신의 일부가 사라져버린, 존재의 상실감 그 자체였다. 기즈키와 어렸을 때부터 서로의 곁을 지키는 자연스러운 관계였고 기즈키가 죽지 않았다면 평생 그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기즈키가 자살한 이유는 정확히 나오진 않았지만 기즈키의 마지막을 와타나베가 함께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기즈키는 아마 오랫동안 죽음을 생각했을테지만 삶을 살아야한다는 압박감과 지속적으로 싸웠을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자신을 삶으로 이끌었던 원동력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였을 것이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에 자살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오코를 마지막으로 본다면 그러한 결심이 흔들릴 수 있기에 가장 친한 친구인 와타나베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아닐까. 게다가 나오코는 친언니의 자살을 가장 처음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지막을 보여줌으로써 나오코가 짊어져야 할 상실감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상실감보다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미련이 더욱 그녀를 갉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와타나베가 나오코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그들은 기즈키의 죽음을 같이 겪은 공감대로써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게 되지만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사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나오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다. 아마 나오코는 기즈키가 죽었을 때부터 스스로를 견디는 것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사랑했던 언니의 죽음 이후로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 그들 모두 자신에게 일말의 여지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렸다는 것들이 모두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와타나베는 그런 상처를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지만 그를 볼때마다 기즈키를 떠올렸을 것이고 온전히 와타나베를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스스로 온전히 발딛을 수 있는 세상이 없다는 고독함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그 고독함은 그녀를 집어삼켜버렸다.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끝까지 보살피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또 하나의 세상이 끝나버리자 지독한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나오코의 죽음은 기즈키와 닮아있다. 나오코도 마지막 순간에 와타나베가 아닌 레이코와 함께했다. 다만 나오코는 와타나베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와타나베가 보낸 편지 속 미도리와의 일을 읽으면서 와타나베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고 미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 그 경계를 뚫고 들어오려는 자에게 느끼는 거부감이 그녀를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고 자신에게는 그저 기즈키 이후로 그녀를 돌봐야된다는 책임감을 느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와타나베가 고독함에 싸우는 방식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나가사와의 영향인지 잘 알지도 모르는 여자와 관계를 맺으며 고독감을 이기고자 하는데 그것은 결국 더 큰 외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대상이 있는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맺는 관계는 결국 공허함만을 불러일으키고 그도 그 상태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독을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가 그런 생활을 그만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고 싶은 또 다른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오코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미도리는 톡톡 튀는 개성으로 중무장한 매력적인 여자다. 부모에게도, 남자에게도 사랑받지 못해서 외롭다고 솔직히 말하고 와타나베에게 마음껏 투정부리는, 얼핏 느끼면 어린아이 같다고 느껴지지만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고 진실된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오코와는 상반된 인물이라 더욱 그렇게 느끼기도 했다.

와타나베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오코만을 생각하는 그에게 상처를 받고 멀리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시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돌아오기까지 많은 불안함을 느꼈을텐데도 다시 그를 사랑하리라 다짐한 그녀가 굉장히 멋졌다. 다만 와타나베가 그럴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인지는 의문이다.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죽음 이후 미친듯이 방황한 점은 이해가능하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랬다면 속은 타들어가겠지만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아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왜 레이코와 관계한 것일까? 나오코의 죽음을 공유한 사이로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유일한 관계라서? 둘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나오코를 위한 장례식을 치루는 것만으론 부족했던 것일까? 이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감성과 감정이 깨져버렸다. 왜 상실감과 고독감, 상처를 그런 식으로 해결해야만 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흐느끼며 다시 한 번 자신을 받아주기를 바란다. 이 부분이 거북했던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미도리가 자신을 멀리했을 때 그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고 미도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그녀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오코의 죽음 이후 그는 미도리를 다시 한 번 방치했고 레이코와 관계를 하고 난 후 자신의 공허함을 치료받기 위해 미도리를 찾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상대방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나오코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녀를 돌봤지만 사실은 나오코를 통해 자신이 구원받길 원했던게 아닐까. 그것이 나오코의 자살 이후로 무너지자 또 다른 구원처를 찾았고 그것이 미도리였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는 안정적인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레이코와 도피성 관계를 맺으며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한 것 같다. 이유가 어찌됐든 와타나베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작품의 진실성을 낮추지는 못했다. 이 책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 고민해봤는데, 젊은 날의 방황을 보여주며 한평생 가져가야 하는 외로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지속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공감이라는 것을 여러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공감대는 기즈키의 죽음이었고 레이코와의 공감대는 나오코의 죽음이었다. 미도리와의 공감대는 함께 하면서 서로가 느낀 따뜻함과 미도리의 아버지를 돌보면서 느낀 유대감이었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오코, 레이코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기에는 그들 사이의 공감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존재를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도리와는 여러가지 추억과 감정을 쌓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계기에 희망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를 잔뜩 머금은 숲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이들과 함께 햇빛 속을 지나기도 하고 먹구름을 지나기도 하며 오랜만에 충만한 감성을 느꼈고 앞으로 외롭다고 느낄 때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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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 고개를 젓고 미도리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가나쁘기 때문일 테지만, 때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갈 때가 있어."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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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가끔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젖을 때도 있지만, 난 대체로 건강하게 잘 지내. 네가 매일 아침 새를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의 태엽을 감아.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수염을 깎고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와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난 대체로 서른여섯 번 정도 끼륵, 끼륵태엽을 감아. 자,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스스로는 못 느끼는데 요즘 들어 내가 혼잣말을 자주 한다고들 해.
아마도 태엽을 감으면서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 말일 테지.
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정말 괴롭지만, 만일 네가 없었더라면 나의 도쿄 생활은 정말 엉망이 되어 버렸을 거야. 아침에일어나 침대에 누운 채 너를 생각하기에, 자, 이제 태엽을 감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거지. 네가 거기서 열심히살듯이 나도 여기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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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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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사랑의 끝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지만 모두 다 사랑을 다루고 있다.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감동적이었고 감명깊었다.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인물에게 많은 애정을 갖고있다는게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나도 그들의 인생을 응원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화되기도 했는데 각 단편의 주인공들이 다 선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사랑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모든 단편의 주제가 사랑을 다루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에는 첫사랑에 빠진 한 소년이 나오는데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한다. 그 모습이 공감되기도 하고 소년을 응원하기도 했지만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며 쓰라린 첫사랑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그 때의 감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는 그녀를 마음속에 항상 애틋하게 품고 있다.

스쳐지나간 인연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마음에 오래 남게되는 인연임을 깨닫는 것만큼 복잡한 감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마주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새로운 마음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소년은 상대방을 향한 이루지 못한 마음을 접으면서도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여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토록 강렬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준 상대에게 고마워한다. 그래서 소년이 매우 성숙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더더군다나 소년의 가정은 귀족가문이라 유복하긴 했지만 부모와 상호작용이 되는 사랑을 직접 느끼진 못했고, 소년은 그런 환경 속에서 상대방과 진심으로 주고받는 사랑을 원했다. 사랑의 결핍으로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집착하게 되고 결국엔 좋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년은 어느정도는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엔 그러한 감정들마저 극복해낸다. 사랑은 특히 부족하면 더욱 갈구하게 되는 고달픈 감정이지만 상대방의 결정을 존중함으로써 사랑의 아픔을 승화시켰다. 다시 말해 제대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멋진 사람이다.

이어진 두 번째 단편은 개인적으로 첫 번째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며 어릴적의 사랑을 처음 느낀 생동감을 생생히 느꼈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그보다 더 사랑의 상실감을 조명한 느낌이었다. 특히 결말 부분이 충격적이었는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평생 이어질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것만큼 아픈 일이 어디있을까 싶다. 그때의 시대를 고려하여 생각해야겠지만 리자의 선택은 충격 그 자체다. 물론 그녀같이 독실한 신자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 관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내가 죽은 줄 알았던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이 그리 큰 죄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 여자가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그녀는 타인을 조종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얻는 소시오패스다. 물론 이것이 리자가 라브레츠키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이유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수녀원으로 들어가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큰 죄를 짓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옛날 러시아에서 리자같은 독실한 신자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지만 그러고나자 그때의 관습이 도대체 뭐길래 순수하게 사랑하는 연인들을 그리 갈라놓았는지 매우 답답하고 심지어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나는 라브레츠키와 리자의 사랑을 응원했었다. 게다가 리자는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어렵게 라브레츠키의 마음을 받아들였는데 그러자마자 관에서 살아난듯이 다시 라브레츠키에게 돌아와 그와 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놨다.

그 시대에는 결혼으로 맺어진다는 것이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고, 상대방이 믿음을 배반하여 어떠한 고통을 겪더라도 완전히 끊어낼 수 없는,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낙인이었나 보다. 아아 정말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너무 안타깝다. 둘이 처음 입맞춤했을 때 난 정말로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가 상황이 급변하며 고통스러운 결말을 읽게 됐다. 더군다나 마지막에 라브레츠키가 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그 집이 젊음의 활기를 띈 채 열정과 행복함으로 들썩거릴 때, 리자가 수녀원에서 자신의 죄를 조용히 참회하면서도 라브레츠키를 위해 기도하며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정말 안타까웠다. 리자가 자랐던 그 집은 여전히 풍성한 젊음의 나날들로 빛나고 있는데 정작 리자는 엄격한 수도원에 평생 자신을 가두고 자신의 조그만 죄를 그리 혹독히 참회해야 하다니.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리자에게 그런걸 바라진 않았을 것 같다.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고 결국엔 서로를 떠나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평생 라브레츠키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리자도, 단 한번의 사랑을 놓쳐 그녀만을 그리워할 라브레츠키도 모두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작품인 무무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가장 크게 느꼈던건 결혼하고 싶은 사람조차 자유의지로 고를 수 없던 그 시대의 부조리함과 주인공의 비애였다.

누군가에게 종속됐다는 의미는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다르게 변화됐지만, 예전 계급이 있던 때의 많은 사람들의 강요된 맹목적인 희생과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주인의 명령에 잡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과, 자신을 충실히 따르던 개를 주인의 위선과 독단으로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하다니.

이 모든 것의 결정의 중심에는 게라심이 없었다. 오직 주인의 판단과 신경질적인 명령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에 게라심은 그 곳을 탈출하여 평생을 아무도 곁에 두지 않은채 살아간다.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과 충실한 벗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스스로를 고독하게 살아가게 할 원동력이 됐을 뿐이다.

흔히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지만, 게라심은 평생 지키고 싶은 존재가 한정돼있어 그 존재들만을 향한 사랑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자신의 모든 것에 충직했던 사람인만큼 그것들을 지킬 수 없었던 아픔과 죄책감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계급제는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다만 그때는 계급이 제도화된 세상이었기 때문에 하위층의 자유가 당연한듯이 억압됐었지만 지금은 자본이라는 형태로 바뀌어 다시 인간사를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인간성을 물질에 바치며 노예가 된 인간들은 타인을 착취하고 있다. 그때에도 지금도 게라심과 여주인의 관계처럼 인간의 계급제는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상에서도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을 억지로 잠재우고 살아가는 것만큼 공허한 것도 없을 것이다. 풍선처럼 커졌던 행복감과 기대감, 설레임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시 채울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이들만큼은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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