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2018년 김지은 씨가 JTBC <뉴스룸>을 통해 피해 사실을 고발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2년 후 책이 나왔다. 2020년 3월. 이 책을 산 건 다시 그로부터 반 년이나 지나서였다. 너무 늦게 샀다. 


이 한 권의 책이 어떤 용기와 절망의 결과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아주 소중한 사람의 인생이 모조리 들어 있었다. 이런걸 내가 봐도 되는가. 하는 마음과 함께 나라도 보고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아주 작은 하드가 되어서 <김지은 입니다>를 기억하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 지워지지 않을 이야기.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도 있는 인간 하드. 그렇게 처참했던 554일간의 성폭력 고발 기록을 함께 하는 것이다. 


기록의 의미. 이 책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수 많은 약자와 여성을 지키는 표지가 될 것이다. 

책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저만한 크기와 무게로 치워져도 어쨌든 어떤 한 구석에 눌러 앉아 있다. 어디 치워졌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들 눈에 더 많이 보이도록 하자. 카페에도 보이고, 지하철에서도 읽고, <김지은 입니다>이야기를 하자. 목소리가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게 왜 불편할까. 오직 가해자만이 불편하다.  


<김지은 입니다>는 수 많은 여성들의 손에 쥐어져 읽히고, 기억되고, 이어져 갈 것이다. 안희정은 그게 괴로울 것이다. 아아. 실은 그것 밖에 괴롭지 않으면서.

이 책의 이야기는 당신이 죽고 나서도. 백 년이 지나도, 이 백년이 지나도 기억될 것이다. 인간이라면 정말 괴롭겠지. 아니, 겨우 그것 밖에 괴롭지 않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여자들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자들은 알아야 한다. 그동안 차별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피아노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지 않나. 지금까지 소위 중립적이라는 사물을 모두 다시 살펴야 한다. 이미 편향되어 있었을테니까. 한편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별점 테러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새삼 부럽기까지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들 그렇게 사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상이 있다. 앨리스 먼로는 그런 것들을 썼다. 특히 여자들의 일생을. 거기에 가닿는 섬세하고 깊숙한 포착에 숨이 턱턱 막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리의 보도블럭에서 밟은 껌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일
죽음까지 끌고 가는 일

「퍼니스트 홈 비디오」부분.



거리에서 보게 되는 더러운 것 중 대부분은 인간의 입을 통해 뱉어졌다. 그것들은 아직 온도가 짐작될수록 더러운데. 다시 말해, 인간의 안쪽과 가까울수록 더 더럽게 느껴진다. 이를 마주할 때 불쾌한 까닭은 삶과 죽음의 장소를 명백하게 분리한다고 믿는 인간의 사회에서, 흔적들이 뒤엉켜 유지되는 동물의 사회로 귀환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바닥에 붙은 껌의 원인을 찾는 일은 생각하기 무섭게 무의미해진다. 밑창에 눌린 껌을 보고 화를 내는 일이 가능할까? 개별 인간에 대한 추적은 가능하지 않다. 조장한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이 하찮은 권력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일은 내가 사는 곳 전체를 되돌아보아야 문제로서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은 '익명으로 버려진 껌 따위가 누군가의 하루를 상하게 하는 일이 <시>로서 말해져야 할까?' 이다. 이 하찮은 일을 문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 지점에는, 길바닥을 제 것처럼 권력화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에서는 얌전하게 껌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침과 가래가 더 많다. 누가 이것들을 길바닥에 뿌려 놓을까. 이것을 피해 걸어 다녀야 하는 이는 누구일까. 


'대부분의 코미디가/ 운 나쁜 캐릭터의 수치심으로 마무리되는 일'처럼 우스워지면 끝난다. 이런 일에 반기 드는 것은, 살짝 뭉개지는 것이 당연했던 분위기를 깨는 일이다. 시인은 당하는 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재미없게-정의롭게 말하는 대신 만연한 웃음을 가로막는다. 아까 밟고 온 껌의 저편에 죽음이 묻어있는데요, 그게 다름 아닌 '아버지'였네요라고 말하는 식. 이 시의 제목은 <퍼니스트 홈 비디오>이다. 여기서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인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아버지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가? 문제는 그런 '아버지'들을 모으면 사회 전체를, 그 중에서도 제법 높은 곳을, 문제를 겨누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대놓고 말하자. 화자는 명백하게 여자이다. 이 여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그녀가 '처세술'이라고 자조하는, 여성의 삶을 만나보자. 


공기 속의 말을 떨어뜨리지 않는 신체 훈련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

「내일의 처세술」부분.

바닥에 버려진 껌과 침과 가래를 피해 걷고 급기야 화자는 '말하지 않는' 훈련을 한다. 이때 그녀의 침묵은 생각-없음, 말-없음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입과 성대를 스스로 잡아 붙드는 '힘'의 결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바닥에 붙은 껌을 피해 걸어 다니는 날렵한 발과 이어져 있다. 이제 화자를 완전히 '그녀'라고 말하겠다. 그녀는 실은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그런 자신을 긍정한다. 그녀는 들리지 않게 살아있고,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어째서 드러나는 방법을 연습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녀로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분에 비해 너무 작은 입으로/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잘 죽지 않는 이 기분을/ 천천히 바뀌는 표정이 보여 준다" 「모형」 부분. 그녀의 입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은 체리를 먹기 좋을 만큼만 크고, 듣기 좋은 웃음을 지을 만큼만 크다. 하고 싶은 말을 목으로 붙들어 내는 것. 이것이 그녀가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 '처세술'이다. 

내가 사라져 주길 원하겠지만
나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나를 향해 무엇이든 던진다
팔걸이
손잡이
문고리의 위치

「뛰는 사람*」 부분.

하고 싶은 말을 붙들어 매는 그녀의 힘이 이것을 알아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사라져 주길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날린다. '나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사회에서도 '굳세게' 있기로 한다. 심지어 '문고리의 위치'를 던져도 말이다. '미시오'와 '당기시오'의 표시는 언제나 문 앞에서 속인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당기시오'였거나, 문처럼 생겼을 '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문 앞에서 언제나 한 번 이상의 수고를 할 테고, 때문에 문을 여는 데 시간이 더 걸리며, 심지어는 지금도 문고리가 아예 없는 곳에서 문의 사방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대신, 그래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먼저 대답하고, 같이 열자고 하는 대신, 그녀 이후의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 

소년아 소녀아
지붕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높이 더 높이 올라가 보는 것뿐이다
너흰 가장 오래 지속되는 감정을 찾을 때까지
떠돌아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불이야」 부분.

건물의 '꼭대기'를 상상하라고 말이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았을 건물, 알지 못하는 설계의 문 앞에서 그다음 공간에 진입하는 비좁은 상상을 하는 대신, 많이 떠돌아다니라고 말한다. 너희에게 문은 필요 없어. 그러니 그따위 열쇠를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지. 다만, 높이 올라가서 '지붕의 모양'을 확인해라. 나처럼 문 앞에 있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더러워진 거리에 닿지 않도록 온 다리에 힘을 주며 걷고, 거리의 껌 따위에 아버지의 죽음을 붙여 놓는가 하면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잡아 붙드는 신체 단련을 하고, 문고리를 던지는 이들에게 맞서 내 이후의 세대의 아이들에게 '지붕 꼭대기'를 살피라는 말을 전하는 그녀의 이야기의 끝에는, 어머니와의 만남이 있다. 거의 다 지워져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흔적의 '어머니'. 이 둘의 만남이 공교롭게도 '문 앞'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어머니가 녹아 안이 된다'「불이야」 부분. '녹는 점'은 물질이 제 형태를 지키는 한계로서의 온도이다. 가부장제로 이뤄진 가족의 녹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녹으면 이 집도 끝이에요. 라는 탁월한 설명 앞에 도착한다. 이 집을 태우는 건 바깥에서 던진 불씨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충실한 복역자로서의 어머니가 자신의 온도를 기억해 내는 일이다. 그간 어머니의 노력은- 인간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일들은 대게-'믿음'의 소산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그 혼신의 힘을 그만 두세요. 그녀가 말한다. 

문 앞의 어머니
어머니가 녹아 안이 된다
안이 녹아 불이 된다
이 집은 믿는 집이야

「녹는점」
 
『온갖 것들의 낮』은 부서진 자리가 폐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빛이 얼마나 환하게 들어올 수 있는 지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 낮을 보려면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자리와 나 스스로가 한 번은 깊은 나락에 이르러야 한다. 이 일을 대신하는 이, 시인은 이것을 먼저 다녀와서 들려준다. 이 책의 화자는 대체로 두 갈래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나는, 아프고, 잠이 들며, 병들어 새벽 4시를 보는 나의 폐허가 만난 낮이다. 이 글에서 제외된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줄기는 '여자로 살기'이다. 저 바닥의 껌은 다 무언가? 그게 어디와 연결되어 있나? 여자는 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녀의 입은 왜 그렇게 작은가?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여자'의 서사를 불러내고 싶었다. '욕심'이라고 말해도 좋다. 더 내고 싶으니까. 나는 유계영의 시집을 이렇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세계는 고립되어 있었죠. 베토벤은 청력 상실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어 있었어요. 빈 음악계에서도 베토벤은 비협조적인 기질로 인해 동떨어진 존재였고요. 바그너가 그랬죠. "베토벤의 시선은 외부 세계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거스르는 불쾌한 것들만을 보았다."


(...)베토벤의 입장에서 상상해보세요. 작곡 실력은 확실한데 귀먹

은 음악가가 오케스트라 음색이나 아름다운 화음 쪽으로 호기심을 끌고 가진 않겠죠. 당연히 형식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싸울 거라고요. 그의 비극, 그의 위대함은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음악을 이용해서 '바라보는' 형식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는 겁니다. 소재에 대한 무관심, 과감하거나 새롭지 않은 음악언어(특히 리듬에 있어서), 하지만 엄청난 변주를 가능케 하는 대답한 형식이 이로써 다 설명됩니다. 


베토벤은 음악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놓았어요. 그래서 음악이 잃은 것을 되찾기까지 꼬박 한 세기가 소요되지요. 


<음악의 기쁨 2>, 81p


--------------------------------------------------------------------------------------------------------------------------------------------------------


몇 주째 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책. '사랑스럽다'라는 말을 바로 이 책을 들어 전하고 싶을 정도이다.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롤랑 마뉘엘과 피아니스트인 나디아 타그린이 주고받는 대담 형식의 책. 이들의 대화는 상대와, 음악에 대한 경의를 갖추면서 재치 있고, 서로의 견해를 타협하는 바 없이 지적이며, 유쾌하다. 그들의 대화 언저리에 앉아 어느새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보면 한껏 기분이 좋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행복하다. 말하자면 이런 대목에서.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제4번 이야기를 하는 중)


그 훌륭한 안단테는요?

그래요! 정말 훌륭한 안단테죠. 피아노가 비르투오소의 역할을 망각하고 계속 즉흥 연주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한편, 오케스트라는 규칙적인 보폭으로 행진하는 것 같아요. 외롭게 고립된 베토벤 본인과 악기들로 구성된 집단이 나누는 대화 같다고나 할까요.


<음악의 기쁨 2>, 353p


'그 훌륭한 안단테'에서 '안단테'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훌륭한' 을 붙여서 묻고, 그게 정확한 설명이라는 듯 당연히 받아서 나가는 대화 자체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는 각국의 역사, 전후 사정, 그 나라의 민족성(?), 음악가들과의 교류(인간 관계), 음악가의 인생, 같은 것과 종합적으로 소개되어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용한 두 대목 모두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이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책 중 부제에 두 번이나 베토벤이 들어간다. <음악의 기쁨 2-베토벤까지의 음악사>,  <음악의 기쁨 3-베토벤에서 현대음악까지> 


음악가를 소개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어찌할 바 모르게 설레 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나디아 타그린 (바흐의 전주곡 하나를 피아노로 친다) 

매일 먹는 빵...... 결코 싫증날 리 없는 양식, 놀랍고 신기한 것이 피곤해지면 언제고 돌아갈 바로 그것, 바흐의 작품은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음악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새삼 찬사를 보내기가 어색할 정도입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엄마 아빠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난처해진다니까요. 

드디어 우리가 한마음이 됐군요!


"매일 먹는 빵......" 말줄임표 부분부터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드디어 우리가 한마음이 됐군요!" 대목에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바흐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찬사를 쏟는다. 거의 모든 책(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든 어느 날 겨우 찾은 행복 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