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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메메드 - 상
야샤르 케말 지음, 오은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당신이 비로소 '누가' 될 때-의적 메메드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모습이 희박하거나 사라지려 할 때 영웅보다 먼저 몸을 돌린다. 그들은 영웅을 배신한 것인가? 대답은 '그들의 뒷모습을 비난할 수는 없다'로 대신하자.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영웅이 그들을 배신한 것 일테니까. 그들이 끝까지 기다렸을 경우, 영웅이 침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자신도 가라앉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 구원의 모습이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리거나, 기다림에 지치거나 혹은 오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문제다.
지주 압디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진 후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메메드는 상상하지 못한다. 압디의 땅, 원래는 압디의 것이 아니었을 그것을 메메드는 모두에게 나누어주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문을 걸어 잠근다. 메메드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생각은 불과 두 쪽을 넘기지 못하고 변화무쌍하다. 죽은줄 알았던 압디가 살아있다! 는 '말'뿐으로 그렇다. 메메드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실망, 지주를 죽였다는 소식으로 -환호했던 입을 씻고- 메메드가'우쭐대던' 모습으로의 환원, 그리고 마침내 '지주'가 '우리 지주 어른'으로 발화되는 변화. 메메드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압디는 언제든지 살아올 수 있다는(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확실함이 만든 대화다. 메메드는 한 명이고, 마을사람들은 여럿이다. 다시 말해 '하는' 사람은 한 명 뿐이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였다. 이토록 더디게, 그 많은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디게 움직이지 않는 사회는 이 때문인 듯 하다.
작가가 말하듯 메메드의 삶이 불운한 이유를 나 또한 알고 있다. '그가 천 명의 지주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또 수천 명의 지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테고, 가난한 자들은 영원히 비극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그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닐것이다. 마을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압디는 죽일놈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있다는 것을 혼자서는 도저히 증명할 수 없듯이, 내가 알고 있다는 것 역시 혼자서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는다. 동어반복인가? 그러나 다시 한번 반복한다. 멈추는 것을 멈추라, 메메드가 움직였던 동력은 누군가의 행복이 아니라 핫체와 함께 하고 싶었던 자신의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멈추는 것을 멈춘다는 이유로 노여워 하거나 자신을 불행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일궈 놓은 행복에서 행복하고, 그 행복이 비좁다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줄 역시 '누구'에게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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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구절이 남는다. 감옥에 있는 핫체에게 메메드의 소식을 전하는 대목. '메메드가 얼마나 컸는지, 키도 크고 몸도 아주 탄탄해졌지 뭐냐. 미나레* 만큼 커 보인다니까. 473' 미나레를 직접 본 적 없지만 메메드가 그려졌다. 그리고 이어서 핫체도 그릴 수 있었는데. 메메드가 동굴에서 핫체에게 권총을 건네며 '집에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513 물었을 때 '거울!'이라고 대답했던 대목에서 단박에 알았다. 그냥 사람으로, 사랑하며 살고 싶었던 남녀였다. <의적 메메드>는 여전히 이어지어져 지금 어디에서도 있을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설은(소설이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안심이 된다) 메메드가 '검은 구름처럼 마을을 관통해 떠나버'리면서 끝난다. 한때 '모두의 희망'이라고 불렸으나 모두의 실체는 앙상했고 메메드는 자신의 희망도 지키지 못했다. 메메드는 이것으로, 당신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온다.
* 미나레 : 이슬람어로 등대라는 뜻. 이슬람 신전 앞에 부설된 뾰족한 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