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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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현실이 꿈이 될 때가 있다.



마주쳤던 상황 하나, 지나온 거리 몇 개, 아는 사람 몇 명만으로도 꿈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 속에서 나는 제법 마음대로 있을 것 같지만 오직 나만이 현실의 나를 벗어나지 않아서, 어렵게 마련된 꿈을 깨뜨린다. 이런 꿈이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꿈조차 현실적으로 깨지는 슬픔'이랄까. 작게 행복하려고 했던 꿈이 끝나고 나면 현실로 편입되어 더 큰 불행의 자리로 오는 상황에 마주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꿈의 제인>에서 소현의 몇 개의 현실과 몇 개의 꿈을 반복해 보여준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사이 주변의 인물은 상황에 맞게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단, 소현만 변하지 않는다. 소현은 어떤 사람인가. '저를 받아주는 곳이 이곳 뿐이어서 왔어요.' 병욱의 팸에 들어온 이유를 지수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다.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비단 소현뿐만이 아닌데 그녀는 유독 두드러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는 모두 가출 청소년이다. 집을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 그 속에서의 나를 견딜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또래들로 이뤄진 공동체에서도 사는 건 쉽지 않다. 팸의 대장을 아빠 혹은 엄마로 불러야 하거나, 말도 안되는 신고식을 치러야 하거나, 술과 담배의 날들, 바에가서 돈을 벌거나, 사회의 법칙에 부스러지는 아이들은 이 얄팍한 법칙에 살아남느라 비참하다. 이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어디에 가야할지 모른다... 하나의 세상을 택했다면 그 안에 소급되는 규칙도 하나. 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 안의 법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 이중고를 치르고 중에 소현은 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 정호가 떠난 탓이다. 생각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자신과 똑같이 닮은 다른 사람 찾기

그러나 소현은 자신이 찾는 이가 정호가 아니라 소현 자신임을 모른다. 헤어짐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나쁨이 끼어들겠으나, 나의 질량과 부피를 다시 확인하고 채우거나 덜어내는 과정이 있다. 기꺼이 나의 자리를 소중한 이에게 내어주었다. 아니면 저기까지, 나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다. 내것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 다시 나만의 어떤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계가 서서히 닫히고 열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현은 거의 없어지고 희미해진 자신의 자리를 오로지 정호의 부재로만 생각한다. 얼마나 힘이들까. 소현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정호를 찾느라 힘들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습니다

그래서 소현이 갈구하는 공동체를 만나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현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질량이 거의 없다. 그곳에 들어갈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다. 완벽하게 죽어버리는 지수처럼, 소현은 죽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소현이 다른 사람을 찾을 때, 나와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합니다. 43


<파레시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 '발언의 자유'등으로 번역된다. (파레시아는 푸코의 후기 사유의 핵심이 되는 말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찰을 위한 전략적 도구인데) 작게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할 것 같았다. 소현을 넣어 위의 문장을 다시 쓸 수있다. '소현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소현의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한다.'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다음 구절까지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자, 그래서 파레시아를 가진 타인, 즉 파레시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는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 역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에게 말하게 될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파레시아스트에게 보내야 합니다. 64


제인은 파레시아가 될 수 있을까
<꿈의 제인>은 소현이 자신의 파레시아스트(진실을 말하는 사람)를 찾는 여정이다. 동시에 진실을 들을 용기를 키워 '꿈의' 제인에게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시간이다. 제인은 몇 가지 중요한 진실을 소현에게 말해준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이야.' 그건 케익을 먹는 중에 일어났다. 인간은 케익 한 조각에도 시시해질 수 있으니까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인간은 불행이 지속되는 중에 드문 드문 행복하다는 것. 이런 말을 하는 제인은 어떤 사람인가. 태어나면서 거짓말쟁이가 되어 자신을 부정당했던 이다. 내가 나의 진실을 말하려고 애써왔지만 세상은 들어주질 않는다. 제인의 파레시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로 무대에 서는 제인. 제인 역시 소현처럼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헤맸으나. 이제는 자신이 거둘 수 있는 더 약자인 이들에게 파레시아스트가 되어준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된다.

소현은 영화 내내 편지를 쓴다. 천장을 열어 편지를 놓는데, 너무 깊숙히 밀어놓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바깥으로 너무 나오면 누구나 쉽게 볼까봐 적당히 삐져나오도록 편지의 자리를 고심한다. 그러나 받는 이가 없으므로 그 편지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알고 있을까. 그녀가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던 그 말들은 우선 자신에게 한 번씩 읽혔다는 것을.



밀쳐지는 살의 모양

영화 마지막에 정호와 소현이 함께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호가 일하는 바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소현. 정호는 사이다 한 캔을 앞에 놓으며 소현에게 그만 가라고 말한다. 일 끝날 때까지 그냥 있을게. 정호는 소현을 밀어내고, 무기력하게 소현은 그곳에 있고 싶다. 소용없이 밀쳐지고 밖으로 나가게 되는 소현. 내가 이 영화에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 장면은 이쯤이었다. 느리게, 소현이 밀쳐지는 뭉근한 모양의 살을 안다. 나는 이렇게 밀쳐지는 사람이었고, 이렇게 밀어낸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잘 보이던 거울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게 없어지고 나면 수만가지로 비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보이는 거울을 마주해야 한다.



나는 (진실을 들을)용기가 있는가. (진실을 말해 줄)타인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전에, (진실을)말할 용기가 내게 역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는 그걸 암울하게도 창문 밖으로 보여준다. 그 자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채워진 사슬 속에서 자유로 뚫린 구멍이 그 밖에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저것 뿐이라고 할때. 더 이상 시시해질 수 없는 몇몇은 창문 밖의 자리를 택했다.



그는 살아 있기 보다는 진실을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106





+
한 번 더 봐야 이해할 수 있을텐데 아쉽다. 한 번 더 보기에는 마음의 쓰임이 큰 영화.

<담론과 진실>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인용 출처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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