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문기적 사회도 마찬가지다. 배금주의 풍조가 만연하면서 이윤 극대화 논리로 사람의 목숨조차 함부로 대하는 우리 사회의 여러 풍조는 항문기 사회의 인색함과 고집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산재나 안전사고는 우리 사회가 인명을 얼마나 소홀히 여기면서 부에 집착하는 천박한 사회인지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고가 인재인 것은 평소 사람의 생명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고 돈을 위해 뭐든지 하려는 인색함과 이기성에서 비롯된다. -121p
항문기 성격인 깔끔함, 인색함, 완고함을 사회에 적용해 항문기적 사회의 특징을 묘사할 수 있다. 원래 항문기는 이 세 가지의 양 극단을 다 포괄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 깔끔하거나 더럽게 행동할 수 있고, 너그럽게 베풀거나 인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규율이나 법에 대해 철저하게 복종하거나 아주 반항적일 수도 있는데 이런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 항문기에 고착된 사람의 공통점이다. -121p
빛나는 하늘 위에 남아 있는 부풀어 오른 구름의 흔적, 마치 크롬 금속판 위에 문질러진 아이스크림 자국 같은 그 모양새, 담배에 찌든 그의 손가락, 먼 곳에서 반사되는 물빛, 이제 모두 물에 잠겨 버린 것들. 물에 잠겼지만, 아직 빛나는 것들. - 18p
가끔은 나의 삶도 그런 식으로 상상해본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느질의 한 땀 한 땀인 것처럼, 마치 내가 바늘이 되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내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세상이 꿰매지고 있는 것 같은 상상, 다른 이들이 만들어 내는 길과 교차하기도 하면서, 비록 흔적을 첮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방식으로 그 모든 길이 누비이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로 엮인다. 꾸불꾸불한 선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하나로 합쳐나가는 것이 마치 그 걸음이 바느질이고 바느질은 곧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삶인 것 같다. -193p
— 도서관 서가에서 그날그날 읽고 싶은 책을 뽑아서 그냥 읽었다. 책을 고를 때만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 순간 내가 가장 원하는 책에 대하여 골똘히 집중하여 생각했다. 나는 매일매일, 그날의 나에 대해 그 정도만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146p, 정이현 <언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