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언짢게 생각지 말아요! 앞으로 우리 우정을 망칠지도 모르는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두는 거예요. 주저하지 말고요. 이런 문제들에 겁을 내는 건 좋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이지요. 그게 뭐 그리 끔찍한 재앙이라도 되나요? 인생의 참맛은 고독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결혼은 거짓 위에 쌓아올리는 허상이에요. 사람들은 일정한 정도까지만 가까워질 수 있고, 그 이상은 가식이라고요. 어느 날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알아차리면 절망에 빠져모든 걸 내팽개치고 도망가지요. 하지만 환상과 착각에서벗어나, 아쉽더라도 적당한 정도에서 만족한다면 그렇게되지 않을 거예요. 자연스러운 걸 받아들이면 절망에 고통받는 이도, 운명을 저주하는 이도 없을 테지요. 우리가 처한 환경을 가여워할 권리는 있지만 동정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에요.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건 그 사람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건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가련하다고 요길 권한도 없어요—-. "
-p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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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행에서 말단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된 후—왜 해고됐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회사는 나한테 인건비 절감 차원이라고 했지만 일주일 뒤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한동안 앙카라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수중에 있는 약간의 돈으로 겨우 여름은 날 수 있었지만 다가오는 겨울에도 친구들 방에서 요 하나만 깔고 잘 수는 없을게 뻔했다. 돈이라곤 일주일 뒤면 바닥날 식당 식권을 다시 살 정도도 남지 않았다. 입사 지원서는 넣는 족족 퇴짜를 맞았고, 그때마다 진이 빠졌다. 떨어질 줄 뻔히 알고 응시한 시험에서 떨어져도 낙담하긴 마찬가지였다. 친구들 몰래 지원한 상점 몇 군데의 판매원 자리마저 다 떨어지자 절망에 빠져 한밤중까지 길을 헤매고 다녔다. 알고 지내는 친구 몇몇이 이따금 저녁 자리에 불러줬지만, 음식과 술로도 이런 절망을 떨칠 순 없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상황이 곤궁해지고 당장 내일 필요한 것조차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릴수록 나의 소심함과 부끄러움은 더 커져갔다. 예전에 일자리를 부탁한 적이 있거나 나에게 그리 나쁘게 대하자 않던 지인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지나쳤다. 밥 한 끼 사라며 아무렇지 않게 부탁도 하고 스스럼없이 돈을 빌리던 친구들에게도 나의 태도는 변하고 말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그들이 물으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가끔 여기저기서 임시직으로 일해"라고 답하고는 서둘러 도망쳤다. 주위에 사람이 절실했지만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p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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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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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런 성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 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 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니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니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 자며 아침을 맞았다. 가끔씩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폭음을 하고는 환한 대낮의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했다.
- 325p, <일년>,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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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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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아, 너도 알다시피 삶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전해주는 것 아니겠니! 그러면 자식들이 그 삶을 사는 거고, 우린 우리가 전해준 삶이 자식들을 통해 뭔가로 되돌아오면 만족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땐 그 삶이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지. 우리에게 삶은 우리가 준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늘 남아 있거든. 그 삶이 얼마나 길다 해도 우리 안엔 늘 유년의 첫맛과 엄마 아빠의 얼굴, 그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우리를 위해 마련한 그때 그 집을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지. 넌 내 삶이 어땠는지 알지. 내가 여러 번 얘기해줬으니까. 그런데 아들아, 그 삶을 사는 건 또 다른 거란다."
- 106~107pp. <어머니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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