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행에서 말단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된 후—왜 해고됐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회사는 나한테 인건비 절감 차원이라고 했지만 일주일 뒤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한동안 앙카라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수중에 있는 약간의 돈으로 겨우 여름은 날 수 있었지만 다가오는 겨울에도 친구들 방에서 요 하나만 깔고 잘 수는 없을게 뻔했다. 돈이라곤 일주일 뒤면 바닥날 식당 식권을 다시 살 정도도 남지 않았다. 입사 지원서는 넣는 족족 퇴짜를 맞았고, 그때마다 진이 빠졌다. 떨어질 줄 뻔히 알고 응시한 시험에서 떨어져도 낙담하긴 마찬가지였다. 친구들 몰래 지원한 상점 몇 군데의 판매원 자리마저 다 떨어지자 절망에 빠져 한밤중까지 길을 헤매고 다녔다. 알고 지내는 친구 몇몇이 이따금 저녁 자리에 불러줬지만, 음식과 술로도 이런 절망을 떨칠 순 없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상황이 곤궁해지고 당장 내일 필요한 것조차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릴수록 나의 소심함과 부끄러움은 더 커져갔다. 예전에 일자리를 부탁한 적이 있거나 나에게 그리 나쁘게 대하자 않던 지인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지나쳤다. 밥 한 끼 사라며 아무렇지 않게 부탁도 하고 스스럼없이 돈을 빌리던 친구들에게도 나의 태도는 변하고 말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그들이 물으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럭저럭...가끔 여기저기서 임시직으로 일해"라고 답하고는 서둘러 도망쳤다. 주위에 사람이 절실했지만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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