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병으로 선잠이 들었던가 보다. 이상한 술렁거림에깨어난 나는 공포에 젖었다. 주위는 완벽하게 어두웠다. 불을켜놓고 잤는데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잠기운을 떨어내려 애썼다. 악머구리 끓듯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속에서 길잃은 환자처럼 나는 현재의 주소를 알아내지 못해 당혹했다.
기차가 서울역에서 고향 역까지 날 실어 온 것처럼, 악몽이 막삶의 차안에서 피안으로 나를 날라 온 건 아닐까. 시간이 딱멈춰버려 이제 종이로 만든 관처럼 좁고 허술한 이 방에서 낯선 소음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죽어야 하는 건 아닐까. 서울역과 고향 역 사이에 한 줄 철로밖에 없듯 나와 세상 사이에 사랑도 빛도 없는서른다섯 번의 봄, 서른다섯 번의 여름, 서른다섯 개의 역만오롯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어서 그가 내 악몽에 간단한 대답이라도 해주었으면.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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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위생 - 인간의 출현과 자본 - 식민주의 비판 저강도 총서 1
김항 지음 / yeondoo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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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되기 위해서는 이론적 계급투쟁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과 교환 가치로서의 노동이 분리하고 배제하고 말소하려 한 사물의 물신성과 음성의 주술성을 탈환하는 일이다. 새로운비판 기획이 제시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가 유의미한 것은 인간이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육체를 가지고 발화 아닌 발화를 반복하는 사람의 흔적을 추적할 때뿐이다. 이때 사람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사물과 자연이 언제나 공속하는 세계에 사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내전과 위생을 키워드로 투명한 텅 빈 자리를 차지한 인간이 어떤 정치적 폭력을 행사해왔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인간이 저 특권적 자리를 차지한 사태는 지식 지층에 흔적을 남긴이론 혹은 담론 차원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그 사태가 인간의 출현과 실존 자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삼라만상에 대한정치적 폭력의 행사였다. 이 폭력은 내전과 위생을 통해 행사된다. 내전은 사람들에게 "너는 누구냐"고 다그치는 심문의 영원한 반복을 통해 ‘적‘을 색출하는 정치적 폭력이다. 그렇게 색출된 온갖 특정 형상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위생 장치의 제거 대상이 된다. 내전과 위생의 이 결합은 인간이 저 특권적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유지해온폭력의 수행이다. 아니 이 폭력의 수행성을 제쳐두고 인간의 출현과 실존을 설명할 수는 없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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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온종일 끔찍한 우수와 무료함에 젖어 있었다. 친척이나 가까운 알음알이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안나 표도로브나와 사이가 나빴다.(아버지는 그녀에게 얼마간 빚이 있었다.) 사람들이 일 때문에 우리 집에 꽤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대개 다투고 떠들고 고함을 질렀다. 그 사람들이 돌아간 뒤 아버지는 무척 언짢아하며 화를 냈다.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린 채 몇 시간이나 방 안을 구석구석 거닐었고,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감히 아버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가만히 계셨다. 나는 얌전하게 방구석 아무 데나 책을 펴 놓고 조용히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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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란 항상 모호할 수밖에 없어. 그게 정상이야. 의도적인 모호함이기도 하지. ‘퓌러프린치프(지도자 원리)‘의 논리에서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건 명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야 할 몫이야. 명확한 명령을 내려달라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이나 법적인 조치를 원하는 사람은 중요한 게 명령이 아니라 지도자의의지라는 사실을 이해 못하는 거지. 그 의지를 판독하고 심지어 예상까지해야 할 줄 아는 게 명령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그렇게 행동할 줄 아는 자가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야. 훌륭한 국가사회주의자의 과도한 열정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네. 설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말일세. 총통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다른 사람들은 ‘그 자신의 그림자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것‘이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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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세트인이 ‘우르폴크‘, 즉 최초의 아리아인 중 하나라는 뜻입니까?"-"최초라는 말은 지나치게 남용되고 오용되는 단어죠. 오히려 그들의 언어가 학문적 관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옛 특징을 지닌다고말하는 편이 나을겁니다." "그럼 당신에게 최초는 무슨 뜻입니까?" 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대답했다. "최초란 것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과학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이고 정치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지요. 독일어를 예로 들어 설명해볼까요. 마르틴 루터 이전까지, 독일어는 흔히 비교되던 라틴어군과 달리 어간을 외국어에서 빌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자적인 언어라고 오랫동안 주장됐습니다. 일부 신학자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독일어가 아담과 이브의 언어였을 것이고, 히브리어는 나중에 독일어에서 파생된 언어였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간이 ‘토착적‘이더라도 우리 문법은 완전히 라틴어의 구조를 띠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어간도 인도유럽어족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이런 생각, 즉 독일어가 다른 유럽 언어들에 비헤 어휘를 훨씬 자유롭게 만들어낸다는 특징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독일아이들이 여덟 살만 되면 모든 어간을 알고, 아무리 까다로운 단어라도 분해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프랑스 아이는 그렇지 못하죠.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 파생된 어려운 단어들은 훨씬 나중에야 배우니까요.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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