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길 마지막 슈퍼라는 이름답게 슈퍼는 소월길 언덕 끄트머리에 있었다. 성에 낀 유리문을 밀자 문에 달아놓은 녹슨 종이 울렸다. 빛바랜 담요를 덮고 앉은 주인이 우리를 보고 화면이 불룩한 티브이에서 나오는 소리를 줄였다. 우리가 삼각 비닐팩에 담긴 커피우유를 찾는다고 하자 주인은 펩시콜라 스티커가 붙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과자와 초콜릿, 빵이 올려진 낮은 나무 가판대를 지나 나는 녹슨종이 달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커피우유를 꺼내든 순간, 나는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의 꿈에 갈 수 있는지 깨달았다. 꿈을 꾸는 엄마의 마음과 그 꿈으로 간 내 마음,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이어주는 챔바의 마음이 삼각뿔의 세 직선처럼 하나의 꼭짓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세 방향으로 뻗은 마음의 면들이 커피우유의 모습을 하고 내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마음, 나보다 어둡고 나보다 빛나는 슬픔이 삼각뿔 커피우유의 밑면처럼 우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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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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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 근원적인 방식으로 물어지는 것은, 실지로 여기에서 생활하는 구체적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다. 윤리는 추상적 차원에서 애매함이 없는 일의적 어법으로 다 말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그때 이미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 던져져 있으며, 이미 무언가를 ‘양식‘으로서 향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그때 이미 ‘원조를 간구하는 호소에 귀를 막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에고이즘이 끌어안은 모든 자산을 던져 무한의 얼굴을 확대할 수도 있는‘ (TI, p.191) 그런 간단 없는 결단의 장에 내몰려 있다. 내가 있는 장소는 그때그때 이미 원리적으로 비대칭적인 것이다. 거절할지 환대할지를 나는 강요받고 있으며, 어느 쪽을 취하는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버려 상칭성이나 평등성은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인간이 ‘가정적 실존‘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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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무의 본질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 데 있다. 끊임없이 지금의 형태로부터 어떤 미래를 향해-결코 도달하지 않을 미래를 향해-떠나가는 것,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듯이 달아나버리는 것을 만류하고자 하는soliciter 데 있다. 애무는 희구한다. 애무는 더듬는다. 그것은 폭력의 지향성이 아니라, 탐구, 즉 볼 수 없는 것을 지향하는 발걸음인 것이다.(TI, p.235.)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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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미지성-그 ‘나‘에게로의 환원 불가능성, 즉, 나의 사고, 나의 소유에로의 환원 불가능성-은, 바로 나의 자발성의 심문으로서, 즉 윤리로서 성취된다.(TI, p.13.)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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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소환에 응하는 것‘, ‘신을 두려워하는 것‘, ‘신의 품으로 향하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표상하는 힘의 한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능력의 부족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불능을 절감케 하고, 무력감 속에 빠트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수동성이야말로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기초지우는 것이다. 나만이 담당할 수 있고 나 이외의 누구도 나를 대신해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책무를 담당한다는 방식으로, 나의 유일무이성, 나의 자기동일성은 기초지워진다.
나의 주체성은 ‘내가 나라는 것의 자명성‘도, ‘내가 존재하는 것을 충전적이고 명증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 대한, 대체 불능한 책무의 인수’ 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그때 비로소 ‘죽음보다도 정의가 행해지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부정의를 범하기보다는 부정의의 희생자가 되기를 선택하고, 존재를 확실히 하기보다도 존재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를 선택하는 사람의 가능성(QLT p.265)이 우리들 앞에 열리는 것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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