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나는 이 순간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는 뭔가할 말을 찾아냈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토미는 내 말을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루스의 말을 부정할 수 있었다. 사태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를 했어야 했다. 루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히고, 그녀가 사태를 꼬아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내가 그 동물을 두고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한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있었다. 나아가 토미에게 다가가 루스 앞에서 그를 안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나라는 인간의 성정과 우리 셋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실제로그것은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했다면 우리의 말다툼은 더욱 격해지기만 했으리라.
나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루스가그렇게 교묘하게 우리의 내밀한 이야기를 발설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당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얽히고설킨 혼란 가운데 커다란피로감, 일종의 무력감 같은 것이 엄습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치 머리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 버린 순간에 풀어야 할 수학 문제가 주어진 것 같았다. 어디엔가 먼 곳에 답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힘을 내 거기를 향해 걸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뭔가가나를 포기시켰다.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아, 그가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하자고, 그렇게 해 버려. 체념한 나는 ‘그래 그 말이 맞아. 그 외에 어떤걸 기대했던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토미를 바라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토미의 그때 표정을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빠져나가고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담장 기둥에 앉은 희귀한 나비라도 되는 듯.
그때 나는 눈물이 터질 것 같다든지 이성을 잃을 것 같다든지 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그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이 지독한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 내가 무엇보다도 겁났던 것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떠서 나머지 한 사람과 내가 남게 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중 하나가 화를 내서 그 자리를 뜨는 것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나는 내가 먼저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려비석을 지나 나지막한 나무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후 몇 분간나는 마치 승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그들 두 사람은 남아서고통을 받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그런 고통을 받아야 마땅했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