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현실주의자들은 특정한 관념체계만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관념론자라고 할 수 있다.
고착화된 관념론에 불과한 이른바 ‘현실주의‘라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관념( = 이념)을 고안하고 이것에 어울리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존재 이유가 있다. 철학이 이런 새로운 이념의 창조 행위가 아니라면 무엇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철학은 주어진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사유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 좁게는 철학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기존 제도권 내의 인문학과 철학이 창조의 작업을 한 번이라도 수행했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나라에 인문학이나 철학이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솔직한 술회로부터 우리의 철학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이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나야 한다. -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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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거절은 선택이고, 모든 침묵은 목소리이다. 우리의 수동성조차 우리 의지의 소산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선택해야한다. 선택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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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상은 내가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때만 나의 것이 된다.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거기에 참여했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나의 대상이 내게 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에 의해 수립되어야만 한다. 요컨대 내가 그것을 그 총체성 속에서 수립한 경우에만 그 대상은 총체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 완전히 나에게 속해있는 유일한 현실은,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나의 행위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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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 현상은 예측 불가능성이 특징이므로 우리는 (순진하게도 그것을예측하겠다고 노력하기보다) 그 미지의 가능성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편이 옳다.
반(反) 지식, 즉 우리가 모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검은 백조 현상에 노출될 기회를 최대한 늘리면 기대 밖의 (유리한 결과를뜻밖에 얻는 행운도 늘어날 수 있다. 예컨대 과학적 발견이나 벤처 투자에서는 미지의 가능성이 엉뚱한 보상을 베풀어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희귀한 사건에서는 대체로 잃을 것은 거의 없지만 얻을 것은 많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대부분의 발견이나 발명은 의식적으로 계획하거나설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얻어진다. 이것들이 바로 검은 백조다. 따라서 탐사나경영은 하향식 계획에 의존하는 대신 기회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최대한 이것 저것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나 애덤 스미스의후예들과 견해가 다르다. 자유시장이 작동하는 것은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혹은 인센티브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 공격적인 시행착오 끝에 행운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의 전략은 간단하다. 최대한 집적거리라. 그리하여 검은 백조가 출몰할 기회를 최대한 늘리라.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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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나는 이 순간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는 뭔가할 말을 찾아냈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토미는 내 말을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나는 루스의 말을 부정할 수 있었다. 사태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를 했어야 했다. 루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히고, 그녀가 사태를 꼬아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내가 그 동물을 두고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한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있었다. 나아가 토미에게 다가가 루스 앞에서 그를 안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였다. 나라는 인간의 성정과 우리 셋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실제로그것은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했다면 우리의 말다툼은 더욱 격해지기만 했으리라.
나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루스가그렇게 교묘하게 우리의 내밀한 이야기를 발설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당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얽히고설킨 혼란 가운데 커다란피로감, 일종의 무력감 같은 것이 엄습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치 머리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 버린 순간에 풀어야 할 수학 문제가 주어진 것 같았다. 어디엔가 먼 곳에 답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힘을 내 거기를 향해 걸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뭔가가나를 포기시켰다. 어떤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아, 그가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게 내버려 두자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하자고, 그렇게 해 버려. 체념한 나는 ‘그래 그 말이 맞아. 그 외에 어떤걸 기대했던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토미를 바라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토미의 그때 표정을떠올릴 수 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빠져나가고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담장 기둥에 앉은 희귀한 나비라도 되는 듯.
그때 나는 눈물이 터질 것 같다든지 이성을 잃을 것 같다든지 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그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이 지독한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 내가 무엇보다도 겁났던 것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떠서 나머지 한 사람과 내가 남게 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중 하나가 화를 내서 그 자리를 뜨는 것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나는 내가 먼저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려비석을 지나 나지막한 나무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후 몇 분간나는 마치 승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그들 두 사람은 남아서고통을 받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그런 고통을 받아야 마땅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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