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an Called Ove : Now a major film starring Tom Hanks (Paperback)
Backman, Fredrik / Sceptre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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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놀러갔다가 가판대 위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인 [오베라는 남자]를 집어들었다. 책날개에서 저자 소개를 읽고나서 아무데나 펼치고 몇 문장 읽는데 바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게 웃긴 부분이 나왔다. 휘리릭 다른 곳을 펼쳐보니 말장난을 이용한 농담을 역자가 한국어로 직역한 뒤 괄호 치고 영어로 설명해둔 부분이 나왔다. 

해리포터를 번역서로 먼저 읽고 원서로 다시 읽으며 재차 깨달은 것이지만, 역시 농담은 설명하면 재미없다. 그래서 스웨덴어-한국어보다는 스웨덴어-영어 번역이 농담을 더 잘 살려줬을 것 같아 영어판본을 구입했다.

***영어판 구매를 고려하시는 분들을 위해: 영어판 역자가 스웨덴 출신 영국인이라 영국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을 미리 알면 좋겠다. 내 영어실력이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도 꽤 있었고 (특히 비속어나 낮춰 이르는 말들 중에ㅋㅋ) 몇몇 단어는 스펠링도 신기했다 (maneuver를 manoeuvre라고 쓰고 fetal을 foetal이라고 쓰는지는 처음 알았다). 단어만 넘어서면 문장도 술술 잘 읽혔고, 여러모로 한국어본 보다 말투랄까 흐름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다.

***사족이지만 인터파크와 알라딘 사이트에서 영어 판본은 번역가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더라;; 스웨덴어->영어 번역가는 작가 & 번역가 Henning Koch다.


우선 웃기다ㅋㅋㅋㅋ 진짜 웃기다. 시트콤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블랙 코미디라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오베가 생각하는 내용을 적은 것도 오베가 행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도 정말 엄청 웃기다. 웃음이 필요한 분이라면 매우 추천한다. A few good laughs는 보장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슬프고 아프다. 다행히 그 슬픔은 감동으로 승화되긴 한다. 현재 진행형인 챕터들을 읽으면서는 마치 코미디 영화 보는 마냥 소리내어 웃었지만, 오베가 살면서 겪어온 사건들을 읽으면서는 ('a man who was Ove and ###', 한국어로는 '오베였던 남자와 ###'라는 제목을 단 챕터들) 비명도 지르고 헉 하고 숨도 들이마시고 눈물도 여러번 지었다.


개인적인 감상은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아래 분리해놨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너무 불행하고 비관적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그래서 이 책도 읽다가 중간에 한번 너무 충격받고 마음이 아파서, 다시 읽을 용기가 날 때까지 며칠 책장에 다시 넣어두어야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다는 행복함만 남는다. 비문학 말고 문학 작품도 더 찾아읽을 도전정신이 조금씩 자라고 있어 기쁘다 :)



*아래는 좀더 개인적인 이야기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교과과정에서 배우고 추천받는 중요한 한국 소설들,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배우는 한국 소설들 대부분이 사회의 하층민을 다루거나 (and/or) 아주 비극적인 줄거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가 강간당하는 등 모종의 이유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 않는 작품을 찾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아무리 문학적 가치가 높더라도 나를 우울하게 만들 작품들은 읽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우리나라 초중고 교과과정에 나오는 한국 문학작품들 중 상당수가 청소년에게는 너무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90년대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한국사를 통틀어서든 전세계를 통틀어서든 매우 운이 좋은 경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는 그저 '왜 한국 작가들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만 하고, 그것도 다 비극을 그리기만 했을까, 전쟁 이야기를 하더라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인공이 대통령이나 성공한 사업가인 것처럼) 결정권자들의 이야기를 그릴 수도 있지 않았나'하는 의문을 품는 것까지밖에 못했다. 

여튼 그래서 한국 소설들을 피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소설 전반에 흥미를 잃었었다. 아마 최근 10년간 읽은 소설이 (디폴트가 해피엔딩인) 추리소설들, 해리포터-나니아연대기-반지의 제왕, 그리고 이미 다른 매체로 이야기를 여러번 접한 [파리의 노트르담]이나 [나무를 심은 사람] 같은 유명한 작품 몇 권 외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아,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중 거의 유일하게 유머러스하고 설정도 이야기도 재미있다고 추천받아서 즐겁게 읽었었다.

내가 책보다 영상물에 더 익숙하고, 소설을 소화하기에는 인내심과 소양이 부족해서 소설을 읽기 힘들어하는 것인데 핑계를 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의 독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독서라면 나는 좀더 즐거운 이야기들을 읽고 싶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마냥 웃기고 따뜻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내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 생각하게 될만큼 강한 슬픔과 강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면을 보고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고 난 뒤 비로소 주인공 오베의 생각과 행동이 와닿는 경험을 했다.

여전히 나는 주인공이 악하거나 너무 심각하게 슬픈 엔딩을 갖는 영화를 피하고, 소설에서도 비슷한 취향을 보이긴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그저 한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그 인물의 감정과 역사를 공감할 수 있게 쓰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것이고, 글이 꼭 웃기거나 유익하지 않고 이야기가 감동적이지 않더라도 글을 '즐길' 수는 있구나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문학은, 논리성과 실용성 위주로 돌아가는 내 사고로는 아직 너무나 막연하고 그 평가에 대한 납득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렇게 아끼는 책이 하나씩 생길때마다 뭔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뭉뚱그려 불리우는 그 무언가가 조금씩 자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의 문학적인 가치가 어떻게 평가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굉-장히 재미있게 아껴가며 읽었다. 나중에 우울할 때 아무데나 펼쳐 읽고싶은 책이다. 감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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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1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국소설을 잘 안 읽어요. 그런데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은 좋아해요. 학창시절에 자주 봐서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

망고林 2016-01-14 19:16   좋아요 0 | URL
!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고등학교 국어 공부를 제대로 못했었어요ㅠㅠ 제가 좀 특이한 고등학교에 다녔거든요.. cyrus님 말씀 듣고 보니 그래서 제가 작품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더욱 멀게만 느꼈던 건가 싶어서 더 아쉽네요^^; 조금씩 독서력을 키워서, 소설을 즐기며 읽을 줄 알게 되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소설들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어요ㅎㅎ

YoonSoo 2016-02-0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는데, 쉬운 말투로도 조물조물 이야길 끌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뭣보다 스웨덴은 좀 단정하게 사나 했더니, 여기도 역시 사람 사는 데구나 하며 쿡쿡 웃었습니다.// 올리신 글 읽고 들렀는데, `이기적 유전자`에 관한 좋은 조언까지 덤으로 챙겨갑니다.
 
빵의 역사 - 빵을 통해 본 6천년의 인류문명, 개정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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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영상을 보다가 `빵 터지는` 것에 대해선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책을 보다가 웃음이 터지는 날 보고선 약간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ㅋㅋ
하지만 영국인의 도발에 대응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이런 기지 - 그들의 주장대로 스코틀랜드가 훌륭한 인재들을 낳은 것이 틀림없음을 보여주는 - 를 보고서 어떻게 소리내어 웃지 않을 수가 있나! 영국인은 참 멋지면서도 글로벌 동네북인 것 같다..ㅋㅋㅋ

그러다가 이 책은 한 문화권의 세계관의 핵심을 한 문단으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나일강이 하필이면 남북으로 매우 길게 뻗어 있으며 수원지가 하나라 범람이 매년 아주 규칙적인 탓에, 곧게 뻗은 강 주변 몇 미터만 경작 가능한 그런 땅에 산 사람들은 기묘할 정도로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화나 가상의 세상 속에서나 나올 세상이다. 해는 죽어있는 땅 너머에서 떠올라 죽어있는 땅 너머로 사라진다. 그 사이, 해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때 그 바로 아래에 놓이는 강은 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상의 절대적인 생명줄이다. 모든 생물은 이 강 주변에서만 살 수 있다. 당연히 그 사람들은 방향을 동서남북 직각으로 나눌 것이고, `방향`에 삶과 죽음을 포함한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정말이지 즐거운 독서를 선사하는 책이다. 1944년에 나온 책이라는데, 1944년부터 2015년까지의 빵의 역사는 이 저자가 써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꼭꼭 씹어 재미나게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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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 심장에 남는 사람 명의 1
EBS 명의 제작팀 엮음 / 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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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을 `들어낸다`라고 써야 할 부분을 `드러낸다`라고 쓰는 등의 극히 초보적인 맞춤법 오류가 심심찮게 보인다. `2조억 개`라는 없는 말이자 매우 틀린 수치-재생불량성 빈혈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모두 현저하게 내려가는 병이며, 평범한 사람의 총 백혈구 수는 약 200억에서 600억 개 정도이다-도 보인다.
암 협회의 로고에 게가 등장하는 이유도 잘못 설명했다. 암이 cancer라고 불리게 된 것은, 최초로 이름붙인 사람들이 유방암의 잘린 단면이 게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이나 게의 속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구글링은 고사하고 영문 위키피디아 `cancer`페이지 중 `history`항목만 읽어봐도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자궁암 편에서는, 여성들이 자궁을 `여성의 근본`이라 여긴다는 뜬금없는 말도 나온다. 초등학교에서도 성호르몬을 내놓고 난자를 성숙시키며 여성의 특징이 발현되는 데 중요한 것은 난소라는 것을 배운다. 대체 어느 여자가 난소도 아니고 자궁을 여성의 `근본`이라 여기는지 묻고 싶다. <명의>의 작가님이 여자분이라는 점에서 더 의아하다. 또한 어떤 장기를 여성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매우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남성의 근본`은 남근이라고 주장하실 것인가?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think with his balls라는 농담은 실제로 자주 쓰이고 있는 말이지만, think with her womb나 think with her ovaries라는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 말이다.
신체에 대해 무지해서, 관리에 소홀해서, 혹은 단지 운이 나빠서 병에 걸리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데 `못난이 자궁은 자기 몸에 관심을 가지라고 경고하고 있었다`며 환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말을 쓴 이유는 뭔지도 묻고싶다. 간경화 환자의 딱딱해진 간이나, 백혈병 환자의 비정상적 모양의 백혈구들이 저런 말을 던진다는 식의 표현은 어느 편에도 없었고 오직 자궁암 편에만 이런 말이 있었다.
심지어 `성생활 등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위험인자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까지 있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HPV는 남성에서는 거의 증상을 드러내지 않지만, 여성에게 HPV를 옮기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다. 따라서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HPV 백신을 접종받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여성 청소년에게 HPV 백신이 의무접종 대상이다. 남녀 모두 제때 HPV백신을 맞고 콘돔을 쓰면 성관계로 인해 HPV에 감염될 확률은 한없이 작아진다. 이런 정보 대신 이렇게 쉽게`성관계를 피하라`는 말을 쓰다니...

취재 기획도 좋고, 병원에서 환자와 의사들을 취재하고 어려운 의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알겠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된 감수도 없이 오타와 오류와 편견을 잔뜩 담은 채로 내는 바람에, 나는 이 책에 아주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환자들과 의대 교수님들이 솔직하게 나눠준 이야기와 감정들에 공감해 여러번 눈물짓고 탄식했다. 그 이야기들은 참 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차마 별 하나를 주지 못하고 두개 주었다. 출판사가 의료계 종사자 몇명과 편집자와 함께 이 책을 개선해 개정판을 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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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0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이 만든 <짝짓기>라는 책도 사소한 오류 몇 개 있어요. 다큐는 잘 만들면서 책을 허술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대필 의혹이 살짝 들긴 합니다.

망고林 2016-01-04 22: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친구 신청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EBS 다큐멘터리 팀이 내놓은 다른 책에도 흡사한 문제가 있군요. 저도 다큐멘터리 <명의>를 몇 편 흥미롭게 본 뒤에 이 책을 읽어서 더 아쉬웠습니다. 좋은 책을 만들고자 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영상 만드는 내공이 책을 만드는 일에 통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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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었어요...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수록 에세이 모두, 읽을 때마다 너무 많은 감탄과 질문이 쏟아지고 매번 다른 감탄과 질문이 나오는데 `이미 읽었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내게는 이 책은 두고두고 `읽는 중`일 책이다.
근대사에 무지하고 철학에 무지해서, 그리고 처음으로 읽은 철학 책이 이 책이어서 내게는 아직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거진 100년 전에 쓰인 책인데, 읽으면서 `이렇게 당연한데 신선한 얘기가!` `이 문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구나` `왜 이 누가봐도 명백한 해결책을 러셀이 제시한 지 100년이 지났는데 아무 변화가 없었지?`를 계속 반복했다. 언젠가 많이 읽고 많이 배워서 이 책을 졸업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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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 체크리스트 - 완벽한 사람은 마지막 2분이 다르다
아툴 가완디 지음, 박산호 옮김, 김재진 감수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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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보다 더 많은 정보를 동시에 빼놓지 않고 정확하게 다룰 것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고급 업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통찰과 문제의식과 (일견 공포스러운) 의료계 고발까지 담은 의학&보건학 책이다.
건설업계와 항공기 조종사 교육 등에 대해 공부해가며, 의료계가 공학계에 비해 얼마나 원시적으로 일해왔는지, 그리고 WHO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병원에서 체크리스트 사용이라는 단순한 해결책이 얼마나 어이없을 정도로 많은 성과를 불러왔는지 증명까지 해냈다.

물론 책의 앞, 뒤, 챕터 제목, 챕터별 글머리, 글말미 등에 정신사나운 초록색 체크 그림이 난무하고 `완벽한 사람은 마지막 2분이 다르다`는 식의 문구 때문에 이런 내용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힘들다.
아툴 가완디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는 책 판매가 어려울 거라 봤던 걸까? 책은 더 잘 팔렸을지 모르나, 나는 이 포장과 책 분류 때문에 이 책을 놓쳤을 사람들이 아쉽다. 자기계발서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지만, 나는 이 책이 전달하는 작가의 시각도 귀하고 쓴 솜씨도 워낙 훌륭해서, 이 표지와 디자인보다는 더 우아한 포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ㅠ 게다가 이 책의 체크리스트와 가이드라인은 단체 작업 용이고 매우 전문화/세분화된 작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어차피 혼자서 활용할 만한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완디라는 작가가 보건학을 공부하고 나서 처음 쓴 이 책에서 그의 보건학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업계 간 업무 과정 비교는 `박학다식함` 수준에서는 불가하고, 적어도 두 분야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보건학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예방의학과 통계 아니면 국제보건 정도만 떠올렸는데, 외과 수술에 보건학이 할 역할이 있을 줄은 몰랐다. 보건학을 진로로 염두에 두고 나서는 당연하게 내과계열전공만 고려했던 나는 얼마나 시야가 좁고 어리석었나.
역시 전공은 가장 재미있고 최대한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학문의 영역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조합만 가능한 조합이 아니라는 것도 다시 깨닫는다.

레지던트일 때 쓴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에서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불안감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의학이 결국은 인간의 판단에 기대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했던 저자가, 외과 교수가 된 후 쓴 이 책에서는 자신은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므로 체크리스트가 자기 수술에는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라 확신했었다고 털어놓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성공적인 의사들처럼 경험이 쌓이고 실력에 자신감이 생겼더라도, 이전부터 `의학을 행하는 사람의 불완전성`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기 때문에 체크리스트라는 보조기구를 착안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동료 의사들이(!) 읽을지 알면서도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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