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 책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잠‘이라는 단편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약 2달 전에 별도로 출간된 동저자의 《잠》이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과 이 책의 옮긴이가 다른 관계로 문장의 디테일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아무튼 한 번 접해봤던 내용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처음 읽을 때 놓치고 지나갔던 것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처음 읽을 때보다는 힘을 좀 빼고 술술 읽어봤는데, 그중에 하나 건진 게 바로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이었다.

머릿속에 뭔가 잡생각이 많아질 때 몸을 움직임으로써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인데, 이 소설 속 등장인물은 수영을 하러 가는 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식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뭐 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가볍게 걷거나 뛰는 것도 좋고, 아무쪼록 머리를 쓰거나 생각하는 걸 잠시 멈추고 몸을 쓰는 행동을 함으로써 잡생각을 모조리 던져버리고 리프레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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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쭉 읽어나가면서 독자인 나는 옮긴이가 옮긴 문장에 따라 독자들이 느끼는 바의 밀도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잠‘같은 경우 대명사와 같은 간접적인 표현보다는 좀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쓰여있는 부분들이 많아서였는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이전에 단편집으로 읽을 때보다 내가 느끼는 바의 깊이가 더 깊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 이야기를 한 번 더 읽다보니 똑같은 것을 보고도 기존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됐든 간에 오늘 독서를 통해 저자가 ‘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또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독서가들이 왜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덧붙여서 앞서 언급한 또다른 차원에서 봤던 것들을 잠시 얘기하자면, 소설 속 화자가 잠을 안 자는 것을 자신이 누리는 세계가 확장된다고 느낀다는 점이었다. 화자는 남편과 아들이 자는 동안에 자신은 깨어있으면서 책(안나 카레니나)을 읽거나 낮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함으로써 뭔지 모를 뿌듯함 혹은 보람같은 것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생각인데, 오늘 2회독을 통해 잠이라는 것을 조금은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내 생각을 좀 더 보태보자면 단기적으로는 화자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하나뿐인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소설 말미에 간접적으로 암시된 것처럼, 잠을 안자고 계속 버티다가는 잠자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동안 어둠만을 바라봐야 하는, 소위 말하는 죽음이라는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잠을 자고 나면 몇 시간 뒤에 깨어나지만 잠을 안자고 버티다가 몸이 망가져서(여기선 차가 뒤집어지는 것으로 암시됨) 죽고나면 이 세상에선 더이상 깨어날 수 없고 저 세상에서 영원한 어둠만을 바라보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주의 섭리 또는 이치를 거스르는 행동은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게 독자인 내가 내린 결론이다.

몸을 마음껏 움직임으로써 몸속에서 무언가를 몰아내버리고 싶었다. - P181

수영하는 동안, 수영에만 의식을 집중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만 생각하고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 P185

내 인생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그걸 치유하기 위해 잠을 잔다. 내 인생은 그 반복일 따름 아닌가?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닌가? - P191

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미친다 해도, 잠을 못 잠으로써 생명의 존재 기반을 잃는다 해도,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상관없다. 나는 어쨌거나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경향적 소비를 치유하기 위해 잠이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거라면, 그런 건 필요 없다. 내게는 필요 없다. 만일 내 육체가 경향적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다 해도 내 정신은 나 자신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나를 위해 우수리 없이 떼어두겠다. 누구에게도 건네주지 않겠다. 치유 같은 건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잠자지 않겠다. - P192

나는 잠 못자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다.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대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 시간은 지금까지 잠이라는 작업에ㅡ ‘쿨다운하기 위한 치유 행위‘라고 그들은 부른다ㅡ소비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나 자신의 것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의 어떤 요구도 받지 않고, 그렇다, 그야말로 확대된 인생이다. 나는 인생을 삼분의 일씩 확대하고 있다. - P192

생물학적으로 봐서 정상은 아니라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정상이 아닌 일을 계속함으로써 지는 빚을 훗날 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확대된 몫을ㅡ말하자면 나는 그만큼 당겨서 쓴 셈이다ㅡ나중에 돌려받으려 할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가설이지만, 부정할 근거도 없을뿐더러 일단 논리적이라고 나는 느낀다. 요컨대 마지막에 시간의 대차잔고를 맞춘다는 말이다. - P193

솔직히 그런 건 이미 아무래도 좋았다. 만일 무슨 이유로든 내가 일찍 죽어야 한다 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가설은 가설 나름의 길을 마음껏 걷게 두면 된다. 적어도 지금, 나는 내 인생을 확대하고 있다. 이건 훌륭한 일이었다. 손맛이 전해진다.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실감이 있다. 나는 소비되지 않는다. 적어도 소비되지 않는 부분의 내가 여기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없는 인생이 장장 계속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한다. - P193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했다. 중요한 건 집중력이다. 집중력 없는 인생이라니, 눈만 뜨고 있었지 아무것도 못 보는 것과 똑같다. - P194

이따금 책을 읽다가 감정이 몹시 고조될 때가 있었다. 그런 때는 잠시 멈추고 방 안에서 몸을 움직였다. 유연체조를 하거나 혹은 그저 방 안을 왔다갔다 했다. 마음 내키면 한밤중에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의 시티를 몰고 나가 근처를 정처 없이 달렸다. 이십사 시간 영업하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실 때도 있었지만, 사람 상대하기가 성가셔서 대개는 줄곧 차 안에 있었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 곳에 차를 세우고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도 있었다. 항구까지 가서 한동안 배를 바라보기도 했다. - P195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세계가 아무 변화도 없이 지금까지와 똑같이 움직인다고 완전히 믿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계는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착착 변화하고 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 P197

남편은 분명히 추해졌다. 얼굴에서 야문 맛이 사라졌다. 나이 든다는 건 아마 그런 것이다. 남편은 나이 들었고, 그리고 지쳐 있다. 닳고 해졌다. 앞으로 틀림없이 더 추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 P199

분명히 남편은 내게 잘해준다. 자상하고 속도 깊다.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열심히 일한다. 성실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내 친구들은 모두 다시없는 사람이라고 입 모아 말한다. 흠 잡을 데 없다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흠 잡을 데 없음이 때로 나를 짜증나게 한다. 그 ‘흠 잡을 데 없음‘속에는 무언가 상상력의 개재를 허용하지 않는 묘하게 경직된 구석이 있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 - P201

죽음이란 잠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상황 아닐까ㅡ그것은 어쩌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끝없이 깊이 각성한 어둠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그런 암흑 속에서 영원히 깨어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 P203

만일 죽음이라는 상황이 휴식이 아니라면, 이 피폐로 가득한 불완전한 우리 삶에 대체 어떤 구원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 죽음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누가 죽음을 실제로 보았나? 누구도 보지 못했다. 죽음을 본 자는 죽고 말았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죽음을 모른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어떤 추측이건 그저 추측일 따름이다. 죽음이 휴식이어야 하다니, 그런 건 그럴싸한 논리조차 아니다. 죽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죽음은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 P203

나는 아직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눈을 뜰 수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눈앞을 가로막는 두꺼운 어둠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어둠은 우주 자체처럼 깊고, 구원이 없었다. 나는 외톨이였다. 내 의식은 집중하고 확대해 있었다. 마음먹으면 그 우주의 깊디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보지 않기로 했다. 아직 너무 일렀다. - P204

만일 죽음이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죽음이란 것이 영원히 각성한 채 이렇게 꼼짝 않고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 P204

생물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자연에 대해 알고 있을까? 무엇이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지는 결국 경험적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추론을 넘어선 지점에 있다. 이를테면 나를 인류의 비약적 진화의 선험적 샘플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잠자지 않는 여자. 의식의 확대. - P205

잠을 못 자게 되기 이전의 기억이 가속도가 붙어 속속 멀어져가는 듯 느껴진다. 무척 신기한 느낌이다. 매일 밤이 오면 잠들었던 무렵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니고, 당시의 기억은 진짜 내 기억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은 이렇게 변화하는구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변화를 모른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밖에 모른다. 설명해도 그들은 모를 것이다.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믿는다 해도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절대로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나를, 자신들의 추론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로밖에 이해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실제로 변화하고 있다. - P207

뭔가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분하게 생각하면 잘 될거야. 생각을 해. 침착하게 · 천천히 · 생각하는 거야. 뭔가 잘못됐다.
뭔가 잘못됐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머릿속에는 농밀한 어둠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이미 나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는다. - P209

나는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넘친다. 나는 혼자고, 이 작은 상자에 갇힌 채 어디로도 갈 수 없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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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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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로 대변되는 AI의 발달이 바둑계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현실을 살펴보고, 다가올 미래에 저자가 속한 문학계를 비롯한 여타 다양한 업계에 AI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조금이나마 예상해보고 향후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를 고민해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의미있게 살아남기 위한 저자의 고민이 상당히 진지하게 느껴졌고, 이와 더불어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이 굉장히 넓고 그 깊이 또한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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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일본 바둑계에서 활동했던 한국 출신의 프로기사인 조치훈 9단에 관한 일화가 하나 나온다. 조치훈 9단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기 전, 기존 챔피언이었던 후지사와 슈코 9단은 7판 4선 승제인 결승 대국에 앞서 조치훈 9단을 도발한다. ‘딱 4판만 가르쳐주겠다‘고. 이 말은 자기가 한 판도 지지 않고 4판 다 이기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조치훈 9단이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자존심이 다소 상할 법도 한데 이 말을 들은 조치훈 9단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도전자의 입장에서 기존 챔피언의 자존심을 어느정도는 세워주는 듯 하면서도 자신이 새로운 챔피언이 되겠다는 마음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딱 3판만 배우겠다‘고 맞받아친 것이다.

본문에 따르면 그 결승 대국에서 조치훈 9단은 최종 스코어 4 : 3으로 챔피언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일화를 보면서 이런게 진짜 멋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멋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바둑 실력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고, 여기에 더해 상대방과의 멘탈싸움에서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정신력이 필히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위 사례에서 조치훈 9단의 뼈있는 말 한마디가 이러한 정신력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사례를 통해 바둑이라는 것이 멘탈스포츠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 대 인간이 두는 것이다보니 멘탈이 흔들리면 최선의 수를 두지 못할 수 있고 그런 것에 따라 승패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멘탈의 중요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전반에 핵심 소재로 등장하는 ‘알파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요 근래에 등장함에 따라 추상적인 성격의 멘탈이나 직관보다는 객관적인 성격의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각광받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위의 사례처럼 인간 대 인간으로 대결하거나 경쟁하는 구도에서만큼은 멘탈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인공지능이라는 것도 점점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결국에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싸움이 될텐데 이 지점에서 승부를 가르는 건 결국 인간의 멘탈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AI를 활용한 사람과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AI를 활용한 사람이 경쟁한다면 최종적으로 그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사람은 후자가 좀 더 높지 않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대학 입시에서 철학과의 인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딱 네 판만 가르쳐 주겠다" _후지사와 슈코 9단 - P273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 _조치훈 9단 - P273

"목숨을 걸고 둔다" _조치훈 9단의 자서전 제목 - P274

"기권하느니 차라리 바둑판 앞에서 죽겠다" _조치훈 9단 - P274

많은 영역에서 인공지능으로 인해 초라해지는 인간 전문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 P277

‘진짜 기업은 기업이구나‘ - P278

바둑계 종사자들은 구글이 알파고를 은퇴시키고 다음 과제로 단백질 구조 예측을 택한 이유를 단순하게 본다. 바둑은 돈이 안되니까. 반면 인공지능으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면 신약 개발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극적으로 줄여 바둑대회 상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다. - P279

구글은 그냥 기업이 아니다.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스콧 갤러웨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글은 한마디로 ‘현대인의 신‘이다. 구글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모두 알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며 사소한 것에서 심오한 것까지 온갖 질문에 대답해 준다". "그 어떤 기관도 사람들이 구글에게 보이는 믿음과 신뢰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 신은 자신은 사악해지지 않을 거라며, 옳은 일을 할 거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옳은 일을 하지는 않으며, 옳은 일이 뭔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 변덕스러운 신에게 바둑계 정도 규모의 공동체를 뒤흔들고 바둑계 종사자들의 가치의 근원을 박살 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신은 그 일을 할 수 있으며, 주저 없이 그렇게 행동한다. - P285

애플도 현대의 신이다. 이번에도 스콧 갤러웨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플은 "독자적인 믿음 체계, 존경 대상, 광신적인 추종 그리고 그리스도 상을 동원해 종교를 흉내 낸다". 애플은 "부와 교육과 서구적 가치관의 전 세계적인 상징"이며, "이성에게 더 매력적이고 싶어 하는 욕구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족시켜 준다" - P285

(빅테크 기업의 시가총액과 이 국가들의 GDP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어떤 나라의 주식시장이 고평가되어 있는지 아닌지 가늠할 때 흔히 그 주식시장의 시가총액과 해당국가의 GDP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 P286

빅테크 기업들은 단순히 음료 시장이나 유통 시장, 혹은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목표로 행동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마신다는 행위, 물건을 구매한다는 행위,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는 행위 자체를 바꾸겠다는 식으로 움직인다. 빅테크 기업들은 우리가 알던 개념을 바꾸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가 하나의 개념이 된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이루고 유지하는 근본 개념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이다. - P286

신이 아니라 신앙이 힘을 발휘한다. - P292

기술과 인간 지능이 융합하면서 우리의 지능은 몇십 배, 몇백 배 더 높아질 것이며, 우리 인격은 현실세계와 가상 세계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것이다. 아니, 그쯤 되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다. - P293

모든 가치는 개념의 부분 집합 - P293

"그러므로 십자가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서 어디에서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그것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다. 당신이 어디에 가더라도 자기 자신과 함께 있으며, 어디에서도 당신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당신이 기꺼이 십자가를 진다면 십자가가 당신을 지고 희망의 땅, 모든 고통이 끝나는 땅까지 당신을 안내해 준다." _중세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 - P298

어떤 고통은 삶에서 제거해야 하는 얼룩이 아니다. 그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우리 삶은 순백이 아니다. 순백이어서도 안 된다. - P298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가진 사람은 외로움을 통해 성장하고 건강해진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지닌 사람은 보다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삶을 살지 못한다. 사실 좋은 삶을 살려면 어느 정도의 외로움이 꼭 필요하다. - P299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있는 사람만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다. 우리는 그 힘을 배워야 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 P299

고통스럽겠지만, 그런 고통이 있는 삶이 더 좋은 삶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술을 개발하면 과격하고 유아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게 된다. - P302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면 여가를 즐기는 게 아니라 미래의 위험을 해결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혹은 승진을 하거나 업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쓴다. 식기세척기가 설거지 시간을 줄여주면 그 시간만큼 초과근무를 하거나 외국어 학원에 다닌다. - P303

가치가 기술을 이끌지 못하고 기술이 가치를 훼손하는 현상은, 기술이 개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우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 P304

과학자들은 과학이 중립적이라고 말하며 과학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논의를 피한다. 기술자들은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쓰는 사람이 그 용도를 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들은 틀렸다. 기술은 하나의 사상이다. - P304

과연 쓰는 사람이 기술의 용도를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도의 용도는 일본도를 만든 장인이 거의 정한 것 아닐까?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헛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세계뿐 아니라 정신세계 깊은 곳까지 힘을 미치는 강력한 권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정당, 제도가 그런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반드시 견제 장치가 마련될 것이다. - P304

기술이 정신세계의 개념들을 바꾸고 사회의 주요한 정신적 가치들을 훼손하거나 변질시키는 일은 결코 21세기 빅테크 기업과 함께 발생한 것이 아니다. - P305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 정직하게 쓴 글은 늘 읽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 P309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_조지 오웰 - P310

"대개 진보라 불리는 것이 대개 퇴보라 불리는 것도 수반한다" - P311

『1984년』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거리를 쏟아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_미국 사회평론가,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닐 포스트먼 - P315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된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끔찍한 재앙이 올 거라고 동시대인들에게 경고하는 사람이었다. - P316

"권력의 목적은 권력 그 자체"다. 권력은 더 큰 권력을 탐한다. 민주주의 국가 독재국가건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건 독재국가의 정부건 국민을 감시하고 싶어 한다. - P317

과학기술은 감시하는 자의 시간과 노력을 절감시켜 줄 수 있다. - P318

어떤 경우에는 소비자보다 더 그의 행동을 잘 예측하는 것이 기업 이익의 핵심이다. 보험회사는 고객이 교통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을 고객보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 - P322

불확실성은 커다란 스트레스다. 때로는 확실한 불행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 예측분석 기술은 계속해서 투자를 받아 점점 정교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데이터 예측분석 기술의 고객이 되리라는 사실 자체가 데이터 예측분석에서 하나의 변수가 될 것이다. - P323

우리는 절박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는 데이터를 분석할 줄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다. - P323

히타치 중앙연구소의 야노 가즈오 소장에 따르면 행복은 가속도 센서로 측정 가능하다. 물론 사람마다, 직무마다 몸을 움직이는 정도는 다르다. 하지만 같은 사람은 행복한 날 몸을 더 활발히 움직인다. - P323

나는 사람이 기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파악하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불확실성 역시 소중한 가치임을 우리가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우려한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태에서만 결단할 수 있다. 그리고 결단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운명에 맞설 수 있다. 모든 정보를 아는 상태에서 최적의 해답을 고르는 것은 결단이 아니라 인지능력 테스트다. - P324

STS를 ‘과학기술과 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로 보는 학자들은 과학기술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와 과학의 책임을 탐구한다. STS를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과학 지식과 과학이라는 활동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내가 STS SF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을 때 의도한 것은 전자의 의미였다. - P326

구체적인 개념 용어를 만드는 것은 목표를 분명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 P326

"미리 예견된 인간의 왜곡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왜곡으로부터 보전해야 할 인간의 개념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_생태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 - P328

STS SF는 기술이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에 대한 소설가들의 문학적 대응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기술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도 오웰처럼 어떤 악몽들을 막고 싶다. 가치가 기술을 이끌지 못하고 기술이 가치를 앞설 때 실현될 악몽들. 우리는 기술에 대한 가치의 통제를 주장한다. - P329

오늘날 과학기술 발전 속도에 박차를 가하는 커다란 주체는 기업과 국가이며, 그들의 주된 동기는 이윤과 군사력 강화다. - P332

가치의 근원을 설명하고 우리가 그걸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치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으면서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기술을 만들어달라고 기술자에게 주문할 수는 없다. 인간적인 과학기술을 만드는 것이 과학기술인의 임무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적인 과학기술을 규정할 권리를 과학기술인에게 넘기게 된다. 지금 많은 사람이 바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술이 가치를 이끄는 게 아니라 가치가 기술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가치란 대체 뭘까?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모른다. - P336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삶 밖에서 오는가, 아니면 바로 그 삶을 사는 내가 삶에 부여하는 것인가? 가치 기준이 삶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은 가치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치 기준이 각 개인의 삶 안에 있다면 악행을 규제할 도덕적 근거가 사라진다. 그러면 도스토옙스키가 두려워한 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 P336

물질세계를 통제해 모든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해법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세상에는 감내할 가치가 있는 고통,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는 고통, 삶의 일부로 통합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삶에 대해 숙고한 뒤에 과학기술을 이용해 주변 물질세계를 통제하고, 무의미한 고통을 줄여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 P337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은 흐릿하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불이익만큼 확실하지 않다. - P339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좋은 상상을 하는 것,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 P340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선장이다.
아직까지는.

_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 「인빅투스」 마지막 구절을 일부 변형 - P340

위기십결의 나머지 아홉 가지 격언은 다음과 같다.

입계의완(入界宜緩) : 경계를 넘어설 때는 느긋하게 하라.

공피고아(攻彼顧我) : 공격할 때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기자쟁선(棄子爭先) : 돌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사소취대(捨小就大) :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봉위수기(逢危須棄) : 위험에 처했을 때는 버릴 것은 버려라.

신물경속(愼勿輕速) : 경솔하게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라.

동수상응(動須相應) : 상대가 움직일 때는 같이 움직여라.

피강자보(彼强自保) : 상대가 강하면 나의 안전을 도모하라.

세고취화(勢孤取和) : 형세가 고립되었을 때는 화평을 도모하라. - P359

"불쉿 직업이란 유급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형태다. 그가 고용되려면 그 직업의 존재가 전제 조건인데도 말이다.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 P364

이 책은 하나의 패배가 단지 결과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_정재승(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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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 - 3rd Edition ㅣ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로버트 다이머리 엮음, 토니 비스콘티 서문, 이문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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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곡들을 유튜브에 검색해가면서 들어보고 해당 곡에 좋아요를, 뮤지션의 채널에는 구독 버튼을 눌렀더니 기존에 있던 내 유튜브 알고리즘이 팝송과 관련된 것들로 싹 다 바뀔 정도로 수많은 곡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론 잘 몰랐던 뮤지션들을 많이 알게 해준 고마운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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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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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티셔츠를 소재로도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음에 감탄했고, 각종 해외 경험들을 비롯하여 음악(특별히 재즈)과 술(위스키) 등에 일가견있는 저자의 모습을 통해 개인적으로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볍게 부담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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