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 책의 중후반부를 지나고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하는 부분은 뭔가 좀 추상적인 얘기들이라 약간 뜬구름 잡는 듯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고자 한다. 예전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을 때도 내용이 다소 난해했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 오늘 읽는 부분이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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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밑줄 친 부분에서 ‘무의식‘ 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최근 함께 읽고 있는《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라는 책에서 ‘무의식이 현실을 만든다‘ 라는 문장을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더 알아봐야겠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 뒤로 물러나 그로 인한 혼돈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 도덕심이나 의협심, 혹은 근사한 겉모습 따위는 모두 떨쳐 버리고 우리의 충동과 욕구, 불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뤄졌을 때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 비로소 우리가 살아 내야 하는 실제의 삶을 위한 가치관을 세우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규율과 금지 사항을 정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낯선 힘과 관계를 맺는 것과 같다

atman(아트만): 인도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말하는데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브라흐마가 우주작용의 근거라면 아트만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근거 짓는 핵이다.

내가 알고 있으며 예감하고 있기도 하지만, 바로 나 자신이 내면적으로는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그 무언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었던 것, 나의 생각과 작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내가 《싯다르타》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것

심리 분석은 구제의 수단이자 동양의 가르침(붓다, 베단타, 노자)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

심리분석이 단순한 치료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 즉 새로운 단계의 인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것

학문은 돈벌이 혹은 하찮은 장난으로 전락해버렸다(칸트와 헤겔을 비롯하여 모든 독일 철학자들이 사색의 결과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문학은 오락이자 장난이며 기만에 불과하고 그 전체가 허영으로 가득 찬 장사판과도 같다.

에른스트 찬과 토마스 만 혹은 강호퍼와 헤르만 헤세 사이에는 이제 이렇다 할 차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곳에나 도덕과 신성한 가치, 그리고 초개인적인 힘을 얻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려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명성, 혹은 어떤 당파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며 생각하고 정치 활동을 한다.

노동을 하고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며 그것을 더 높이 세우려는 시도는 오직 인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모두 강물처럼 함께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다. 그 강물 안에서는 마치 초기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개인의 업적이나 실수는 즉시 익명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진지하게 그것을 믿을 수 있고, 기쁨이나 신념, 그리고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들이 독일 작가의 손끝에서 써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계에 이르면 고통은 끝이 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삶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하겠지만, 그럴 때의 고통은 생명이자 희망이다.

고통스러웠던 것만큼 나는 또 고독했다. 지금 나는 내게 최악이었던 시기와 조금도 다를바 없이 외롭다. 하지만 고독은 나를 더 이상 달랠 수도 없고 아프게 할 수도 없는 독약과도 같다. 나는 그 독성에 대한 저항력이 충분히 강해질 만큼 그것을 많이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독이 아니라 단지 고독이 변한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 받아들일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며 고맙게 받아 마실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독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색의 힘을 과대평가해 왔으며 사색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했다. 사색을 하는 동안 나는 패배자가 되기도 하고 승리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사색을 통해서 배운 것이 없으며 내가 읽은 글의 수많은 저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으로부터 얻은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단번에 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수없이 많은 본보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새기고 따를 수 있는 근사한 순간들 가운데 일부를 경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처럼 보기 드문 순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이 그와 같은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칸트나 쇼펜하우어, 셀링을 통해서 체험한 것은 <마태 수난곡>이나 만테냐의 그림,《파우스트 Faust》 등에서 체험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 철학이란 창조적인 철학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제자나 독자 혹은 비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자는 모든 존재가 성숙과 성취의 순간에 느끼는 것, 이를테면 여인이 출산할 때나 예술가가 창작할 때 혹은 나무가 계절과 해가 바뀔 때 느끼는 것을 자신의 세계 창조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그런 것을 ‘단지‘ 무의식적으로 체험하는 반면에 철학자는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그저 의식 하나에 그처럼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물의 범위를 끊임없이 내 의식의 시야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지니는 가치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 사이에서 복잡하지 않고 막힘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뿐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물체이며, 로마 웅변가의 유명한 비유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몸 안에서 무의식은 위胃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논쟁을 벌일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의 존재가 좁고 깊은 호수라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수면이 바로 의식이다. 그곳은 밝은 빛을 비추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다.

수면에 있는 물 분자 자체는 쉴 새 없이 바뀐다. 끊임없이 밑에 있는 물 분자가 위로 올라오고, 또 위에 있는 물 분자가아래로 내려가면서 흐름이 생기고 보충을 하기도 하고 위치이동이 일어난다. 또한 어느 물 분자나 한번쯤은 위에 머물고 싶어한다.

물로 이루어진 호수처럼 우리의 자아 혹은 우리의 정신 역시 수천, 수백만 개의 분자, 즉 끊임없이 성장하고 교체되며, 무언가를 소유하고 기억하며 표현하려는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

호수에서 우리의 의식이 보는 부분은 좁은 수면뿐이다. 정신은 수면 밑에 펼쳐진 무한하게 넓은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넓고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 좁은 수면의 밝은 부분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교체가 진행되는 정신은 풍부하고 건전하며 다행히도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도 없이 많은 생각들을 마음속에 품는다. 그런 것들은 밝은 표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결코 없으며 밑에서 고통스럽게 썩어 간다. 그런 생각은 부패해 가며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의식에 의해 계속 거부를 당하게 되고 의심과 우려의 대상이 된다. 해롭다고 인식되는 것은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모든 윤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사실상 해롭거나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속하며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윤리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지 관념적인 입장이나 어떤 미학적인 염세주의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삶이 슬픔과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는 것보다 고통을 느끼는 데 더욱 재능이 있다. 그리고 숨 쉬는 것과 잠자는 것, 먹는 것, 소화시키는 것 등 가장 단순하고 본능적인 행위는 모두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고통스럽고 번거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이기며 자포자기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내적으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기쁘고 유쾌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가지려 한다. 게다가 평범하고 건강하며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처럼 그럴싸한 것들에게는 대단한 가치를 둔다.

한편 자연은 그런 사람들의 인생행로에서 최고로 멋지고 복잡한 것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 바로 유머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혹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별로 잽싸지 못한 데다가 지나치게 즐거움을 좇으며 위안받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때때로 흔히 유머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깊고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만 자라는 수정과도 같으며, 어쨌든 그것은 인류의 생산물 가운데 좀 더 나은 것에 속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힘든 삶을 그대로 견뎌 내고 심지어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 유머는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들, 즉 건강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항상 정반대로 작용하여 마치 억제할 수 없는 삶의 기쁨과 유쾌함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머를 들으면서 건강한 사람들은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큰 소리로 웃어 댄다.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쓴다고는 하지만, 유머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제목과 주제는 모두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상그들의 주제는 예외 없이 단 한 가지뿐이다. 즉 별난 슬픔과더러운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사, 그리고 삶이 그토록 비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근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구두 수선공은 구두 수선공으로 남아야 하는 것처럼 은자도 은자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직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기웃대는 행동을 할 때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고, 사람들도 그것을 납득하겠지만, 보통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당시에는 삶을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지금의 나는 삶을 사랑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 고립감은, 나의 내면에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까닭 모를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게임 규칙에 따라 인생을 유쾌한 단체 게임으로 여기고 함께 즐기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좋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은 얼마나 빨리 배우게 되는지,
또 게을러빠진 개나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돼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육체적인 나쁜 습관과 나태함은 정신적으로도 그와 같은 상태를 수반하는 법이다.

나태함이 이성보다 더 강하고, 게을러서 살찐 배가 조심스럽게 호소하는 정신보다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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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개정증보판 포레스트 에디션)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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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이 가진 특유의 섬세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는 말들의 이면에 숨겨진 뜻을 보다 더 깊이있게 들여다 본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 말들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읽으면서 저자가 왜 유명한 프로 작사가인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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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자가 라디오 DJ를 하면서 청취자들과 나눴던 ‘실연‘ 과 관련된 글로 시작한다.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 인연의 헤어짐이라는 것에 있어서 그 이유를 반드시 나에게 귀속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잘못이나 문제보다는 단지 양 당사자들 간의 어떤 타이밍같은 것이 어긋나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하게 귀책사유가 나에게 있는 경우도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틀어졌을 때 과도하게 자기자신을 탓하며 비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취지로 말한 것임을 참조해서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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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소재로 글이 더 이어진 뒤 마지막에는 작사를 본업으로 하는 저자가 직접 썼지만 아직 출시된 곡들에는 반영되지 않은 창작 가사들이 소개되어 있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눈길을 사로잡거나 공감이 되는 가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건 꼭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이 끝났을 뿐인데."

선택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선택을 받았다가 되돌아간 마음이니까 그게 참 받아들이기가 힘든 일이긴 한데…. 내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죠. 이건 그저 상대의 마음 온도가 식어가는 속도같은 게 두 사람이 맞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인 거죠.

좀 수줍어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 수치심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눈치라는 게 조심성이기도 하니까, 뭔가 남들 시선을 너무 걱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적당한 조심성은 생명력 있는 어른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소소한 일탈을 해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늘 먹던 음식이 아닌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고,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음악 장르를 들어보는 그런 소소한 일탈들이 모여 단조로운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낭만은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행복에 더 충실한 단어예요. ‘세상이 보기에 어떻고 나의 역할은 이래야 하고‘ 이런 거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져서 나만의 세상을 그려나가라는 의미더라고요.

문득문득 환기하지 않으면 ‘이 단어의 원래 뜻이 뭐였지?‘ 하게 되는 너무나 좋은 단어들이 있어요. 낭만 또한 그런 단어인 거 같습니다.

후회는 많은 선택권이 있을수록 더 커집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거든요.

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반드시 한 가지를 결정해야 할 때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선택한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후회밖에 없는 그 선택도 ‘그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는 거죠.

수많은 노랫말을 만들어왔지만 실제로 발표된 곡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이 몰랐었는지 좀 알 것 같아 또 넘어질 나란 걸 알 것 같아 이제야 겨우 기댈 법을 좀 안 것 같아 어떡해야 힘을 좀 빼는지도

설렘은 내게 불안이라서 늘 겁이 났어

참 별일 다 있단 생각을 하지 살아가는 일이란 참 모를 일이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픔이 추억이 되고 미워한 사람이 친구가 되고 궁금할 것도 없었던 널 사랑하기도 하고 흘려듣던 옛 노래가 마음에 들어오고

세상은 참 이렇게 모를 일이야 그게 참 고마운 거야 하루하루 새로운 게 알듯 말듯 하기에 여전히 난 가끔은 설레이니까

어쩌면 말이란 건 각자가 그리는 그림

우린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헤아리고 또 헤아리면 그걸 사랑이라 부르죠

세상의 모든 건 결국 지나간다고

우리의 내일을 말하지 마 지금을 부디 흘리지 마

이 안에 이곳에 나라는 세상에 네가 숨을 쉬고 있어 니 안에 그 곳에 너라는 세상에 내가 숨을 쉬고 있기를

좋을 때, 슬플 때, 힘들 때 결국에 마음이 닿는 곳은 결국 너 이럴 땐 어쩔 땐 생각해 널 떠올리려 눈 뜨는 것 같다고

풀지 못한 문제가 있어 너라면 어떤 길로 답을 찾아 갔을까 그러면 답이 좀 보이곤 해

긴 밤엔 별을 셀 수 있어서 깊은 꿈을 꾸어서 더 먼 곳을 볼 수 있는 나를 또 만나게 돼

내게 제일 어울리는 리듬을 가슴속에 품으면 그게 내 숨인 걸 이제 알 것 같아

기억해, 그날의 아픔을
기억해, 그 모든 추억들

슬픔이라는 건 내 맘대로 버릴 수가 없다는 걸 배운 거야 니가 없는 이곳에서

넌 니가 진짜로 원한 게 뭐라고 생각해?
또 그게 옳다고 생각해?
Don‘t let it go, don‘t let it go

올려봤던 하늘에 그 달빛을 기억해 다시 머릿속에 그린다 그리고 난 꿈꾼다 나를 잃지 않도록

오늘도 부딪혀 난 툭 털고 지나쳐 난 좀처럼 안 미쳐 난 끓는점이 달러

이 세상에 난 하나뿐이길래 내가 그린 선을 따라가 네모난 종이엔 어울리지 않아 I draw my way

나를 구겨 넣으려 하지 마

그래 난 틀리진 않아 좀 달라 잘 봐, 우린 전부 남달라

이 세상에 날 보내주었길래 나는 나를 믿고 살아가 기나긴 줄 뒤에 기다리지 않아 I got my way

꽃이 피면 그땐 니가 날 알아보겠지

늘 날 비껴가던 봄이 내게도 온다면 단 한 줌의 흙으로 한 줄기 빛으로 드센 바람결에도 끝내 버틴 뿌리로 흐드러진 꽃을 피워 누가 기억해줄 한 송이로

내 이름 곁에 누군가 의미를 남겨준다면 지친 적 없이 꿈을 꿨다는 말로 날 불러주기를

걸음을 멈춰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면 그 순간은 찰나라 해도 슬픔이 없기를 나의 기나긴 기다림의 이유였다고 믿을 수 있게

이제서야 나보다 더 작아진 그대를 보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내가 비겁해

그댄 나의 커다란 뿌리였고 항상 나를 품은 그늘이었고 마주보지 못한 태양이었고 나보다 더 나의 이름이었어

매일이 버거운 건 당연했어 내 청춘에게 난 가장 못됐던 사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 어느 순간의 나였어 울고 웃었던 건 당연했어 나는 나를 제일 몰랐던 사람

멀리서 비로소 보이는 이제야 당연한 것들 소중한 건 늘 가까이에 그리고 조금은 하찮은 것들 그렇게 선명해진 너

예민하게 수집한 단어로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사람, 그 단어들로 연결된 문장으로 감각을 노래하는 사람.

노랫말은 시와 달라서 너무 생경한 단어를 쓰기도 어렵고 지나치게 난해한 표현을 써서도 안 된다. 들을 때 귀에 쉽게 감겨 와야 하니 누구나 쓸 법한 일상어가 주재료다.

보통의 언어들이 지닌 힘

말을 쓰고 다루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사는 방식과도 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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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을 읽다보니 오래간만에 읽게 되었다. 오늘은 과학과 종교에 관련된 논쟁 중 하나인 유신론과 이신론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다소 추상적인 주제들이기에 좀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본문을 통해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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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드는 생각은 참으로 다양한 사상과 생각들이 발현되었다가 공존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류가 되는 사상과 비주류로 밀려나는 사상이 생기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우주나 자연의 법칙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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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저자는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의 유무에 따라 예전의 학자들과 오늘날의 학자들을 구분짓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학자들이 자기 분야 외의 분야들까지도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다른 분야의 학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원활했지만, 요즘은 각각의 분야가 워낙 세분화되고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분야만 연구하기도 벅찰정도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제한된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로 저자는 학자들이 받게 되는 연구비나 영예같은 것들이 독창적인 것을 발견함에 따라 주어지는 것일 뿐, 어떤 분야를 초월하는 폭넓은 학식이나 지혜에 따라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순수한 학문이나 철학에 대한 폭넓은 앎도 아예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시간을 투입한 것에 대한 어떤 물질적 또는 기타의 다른 보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한 행동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에 더해 타분야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제약 등으로 인해 예전의 학자들과 오늘날의 학자들의 성향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유신론은 지식의 두 원천이 될 수 있는 이성과 계시 모두에 뿌리를 둔다. - P79

이와는 반대로 이신론은 이성을 맨 끝에 놓고 유신론자들에게 그것을 사용해 계시를 정당화해 보라고 요구한다. - P79

계몽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18세기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합리성의 시험대 위에 올려 놓을 수 없다고 되받아쳤다.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심오한 진리가 존재하며 신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자신이 택한 수단을 통해 그 진리를 계시할 것이다. - P79

이신론의 결정적 단점은 이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감성적인 측면에 있었다. 순수 이성은 냉혹하기 때문에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신성한 비밀을 벗어 버린 의례에는 아무런 감성적인 힘이 없다. 왜냐하면 의례 참석자들이 자신의 충성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높은 힘에 복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위험과 비극의 시기에는 비이성적인 의례가 더욱 강한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비롭고 무오류적인 존재에 대한 복종, 즉 구원을 위한 봉헌을 대신할 것은 없다. - P80

내세에 대한 공식적 인정, 즉 초월을 향한 믿음의 도약을 대신할 것은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과학은 매우 좋아하지만 과학으로 신의 능력을 재려 하지는 않는다. - P80

일찍이 그리스 인문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계몽사상의 취지는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었다. 계몽사상이 만들어 낸 지식은 인류를 미개한 세계에서 한 단계 위로 끌어올려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P81

하드리아누스 방벽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가 픽트 족을 몰아내고 국경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쌓은 고대의 방벽, 영국 잉글랜드 북부의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걸쳐 있으며, 약 120킬로미터에 달한다.) - P81

너무 많은 권위가 주어진 과학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경스러운 힘으로 돌변할 우려가 있다. - P81

신의 개입이 없는 과학과 기술의 창조는 사실 엄청나게 강력하며 근대 문명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 - P81

국가들은 세계를 파괴할 기술로 서로를 협박한다. - P82

오래전부터 과학을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 아니라 파우스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한 사람들은 계몽사상의 프로그램을 정신의 자유와 생명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다. - P82

위협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경멸하는 것이다!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개인적 상상력의 탁월함과 불멸에 대한 자신감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하여 더욱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탈출하여 낭만주의 혁명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 P82

워즈워스의 "말로 할 수 없는 힘의 호흡"을 통해서 눈은 감기고 마음은 높이 치솟으며 중력에 대한 거리의 역제곱 법칙은 날아가 버린다. 정신은 무게와 측정 단위가 미치지 않는 또 다른 실재로 들어가 버린다. 물질과 에너지에 속박된 우주를 부정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당당히 경멸하며 무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83

철학에 꽃핀 낭만주의는 반란, 자발성, 열정, 영웅적 비전 등을 높이 평가했다. 낭만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가슴으로만 느끼는 열망을 추구하며 인간이 무한한 자연의 일부이기를 꿈꾸었다. - P83

계몽사상가 목록에 종종 등장하는 장자크 루소는 실제로는 낭만주의 철학사조의 창시자이자 극단적인 공상가였다. 그에게 있어서 학습과 사회 질서는 인류의 적이었다. - P83

1749년(『과학과 예술에 대한 논의 (Discourseon the Sciences and the Arts)』)에서 1762년(「에밀 (Émile)』)까지의 작품에서 그(루소)는 "잠자는 이성"을 크게 칭찬했다. - P83

그(루소)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책을 포함한 지적 도구를 버리고 감각과 건강을 즐기는 최소주의적 세계였다. - P83

루소는 인류가 본래 평화로운 자연 상태의 고귀한 야성을 지녔는데 문명과 학문이 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종교, 결혼, 법률, 정부는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권력자들의 속임수이다. 이러한 상류 계급의 속임수를 위해 일반인이 지급하는 대가는 해악과 불행일 뿐이다. - P83

루소가 매우 부정확한 인류학을 고안한 반면, 괴테, 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 요한 헤르더 (Johan Herder),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이 이끄는 독일 낭만주의는 과학과 철학에 형이상학을 재도입했다. 그 성과물인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은 감성과 신비주의 그리고 과학적 가설의 혼합물이었다. - P83

그들 가운데 가장 걸출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과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문학에서 불멸의 공헌을 세웠지만, 본인은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문학가의 그것보다 위에 두었다. - P84

그(괴테)는 과학을 아이디어와 구체적 실재에 대한 접근으로 보았고 그것을 진정으로 존중했다. 그는 과학의 기본 교의를 이해하고 있었다. 예컨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분석과 종합이 자연스럽게 번갈아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 P84

한편 그(괴테)는 뉴턴 과학의 수학적 추상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물리학이 우주를 설명한다면서 너무 멀리 나아가 버렸다고 불평했으며 실험 과학이 채용하는 "기술적 조작"을 경멸했다. 사실 그는 뉴턴의 광학 실험을 반복하려 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 P84

인류의 영혼과 과학의 엔진을 결합하려는 숭고한 목적 - P84

그(괴테)는 심원한 정신적 감각으로 자연을 사랑했으며 누구나 자연에 대한 친근감과 심오한 감정을 양성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 P84

"자연은 환상(illusion)을 사랑한다. 자연은 사람들을 안개로 감싸고 빛을 향해 밀고 간다. 자연의 환상과 함께하지 않는 자에게 자연은 폭군과 같은 엄벌을 내린다. 그 환상을 받아들이는 자를 마음으로 감싼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이 자연에게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 P84

사실들 자체는 부분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우주적 흐름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85

독일 낭만주의의 선도적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셸링은 과학적 프로메테우스의 무력함을 시가 아닌 추론으로 보여 주려 했다. 그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모든 것의 우주적 통일성을 제안했다. - P85

셸링은 자연이 살아있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완벽한 자기실현의 궁극적 상태를 향한 느낌과 더 큰 이해를 통해 진보하며 탐구자와 알려진 것을 통합하는 창조 정신이다. - P85

독일의 철학적 낭만주의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초월주의(New England transcendentalism)에 반영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뉴잉글랜드 초월주의의 제안자는 랠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이다. - P85

초월주의자들은 급진적인 개인주의자들로서 잭슨 시대에 미국 사회를 압도했던 과도한 상업주의를 거부했다. 그들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풍 속에 만들어지는 정신적 우주를 상상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럽 낭만주의보다는 과학을 잘 받아들였다. 이것은 『씨앗 속의 신념(Faith in a Seed)』을 필두로 한 소로의 작품들에 나타난 정확한 자연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다. - P85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서민과 서부인들을 위한 강력한 정책을 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잭슨 시대‘라고 불렀으며, 그가 정치적으로 확립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념은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지배적인 이념이 되어 훗날까지 영향을 미쳤다.) - P85

그들(초월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완전히 과학자라 할 수 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하버드 대학교 비교동물학 박물관 관장이자 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창립 위원이었던 루이스 애거시즈(Louis Agassiz)는 지질학자이자 동물학자였으며 최고의 재능을 지닌 강사였다. 이 위대한 사람은 우주가 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셸링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탈선을 한 것이다. 루이스 애거시즈의 우주에서 과학의 신성은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었다. - P86

계몽사상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인간 정신세계에 관한 탐구를 포기했고 철학자와 시인은 한 세기 동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보는 뜻하지 않게 과학 전문가들을 이롭게 만들었다. 이로써 연구자들이 형이상학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86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학과 생물학 지식은 급격히 성장했다. 동시에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 이론 등의 사회과학은 기초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만들어진 영지를 장악하며 새로 등장한 고위 귀족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지식의 거대한 가지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생성된 통일된 계몽사상의 비전에서부터 나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라져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 P86

신학의 빚을 지기는 했지만 거만하게도 비종교적인 방향으로 흘렀던 계몽사상은 서양 정신에 새로운 자유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모든 형태의 종교적 권력이나 세속 권력을 포함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두려움을 뿌리쳤고 자유로운 연구 윤리를 도입했다. 또한 인간을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모험하는 존재로 그렸다. - P87

두 세기 동안 신이 인간에게 새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목소리는 일찍이 르네상스 시대에 계몽사상의 선각자로 활동했던 조반니 피코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가 1486 년에 썼던 다음 축도문에 잘 드러나 있다. - P87

우리는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아니며, 멸하지도 불멸하지도 않도록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훌륭히, 마치 그대 자신의 창조자가 된 것처럼 그대가 원하는 형태로 그대 자신을 만들 수 있으리라. - P87

그러나 1800년대 초반 이러한 멋진 이미지는 퇴색되고 있었다. 이성은 무시되고 지식인들은 과학의 지도력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지식의 통합에 대한 전망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 P87

계몽사상의 정신이 정치적 이상주의와 개별 사상가의 희망을 바탕으로 존속된 것은 사실이다. 이어지는 수십 년 동안 손상된 나무 밑동에서 솟아나오는 식물줄기처럼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과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의 공리주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역사적 유물론, 찰스 퍼스(Charles Peirce),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같은 새로운 학파들이 등장했다. 그렇지만 핵심 의제는 만회될 가망 없이 포기된 것으로 보였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사상가들을 몰두하게 만들었던 거대 담론은 이제 거의 신빙성을 잃었다. - P88

과학은 제 갈 길로 갔다. 과학자, 과학적 발견 그리고 전문 학술지는 15년마다 두 배로 늘었다. 이것은 170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현상으로 1970년 무렵에야 주춤하기 시작했다. - P88

끊임없이 확대되는 과학의 성공은 우주가 질서 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에 다시 믿음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의 이러한 필수 전제는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최초로 생각해 낸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 안에서 더 굳건히 자라났다. - P88

그렇지만 그 중심 방법인 환원주의의 화려한 성공은 계몽사상 프로그램 전체의 복구와는 정반대로 작용했다. 과학적 정보가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별연구자들은 지식의 통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없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더욱 깊이 밝힐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들은 1700년대 후반 생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가는 길목으로 여겨진 개념이자 금단의 영역인 마음의 물리적 토대를 밝히는 일에는 더욱 주저했다. - P88

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데에는 더 소박한 이유가 있었다. 과학자들이 그 일을 할 만한 지적 에너지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는 장인(匠人)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전문 분야에만 집중한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세계의 드넓은 윤곽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최첨단 분야에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만의 발견을 하기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왜냐하면 경계 부분의 연구는 비용도 많이 들고 위태롭기 때문이다. - P88

수백만 달러짜리 실험실에 소속된 생산성 있는 과학자들은큰 그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으며 그것에 이득이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 P88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발된 2,000명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에 대한 상징으로 옷깃에 달고 있는 장미 장식에는 과학을 뜻하는 금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자연 철학을 뜻하는 보라색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대부분의 선도적 과학자들의 시선이 그 금에만 고정되어 있으니. - P89

유전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리학자나 ‘끈 이론(string theory)‘이 바이올린과 연관돼 있다고 추측하는 생물학자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학에서 연구비와 영예는 발견에 주어지는 것이지 학식이나 지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 왔다. - P89

정치적 노련함을 이용하여 대법관까지 올랐던 프랜시스 베이컨이 영국 국왕에게 지식을 통합하는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자금을 개인적으로 간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 P89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던 데카르트도 형식적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생활비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연구비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위와 얼음 틈의 곰들의 땅"인 더 관대한 스웨덴 궁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그곳에서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 P89

이와 동일한 극단적 전문화는 사회과학과 인문학도 괴롭혔다. 전세계의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 속에서 독창적인 학자로 남는다는 것은 마치 다국어를 사용하는 다문화권 도시 캘커타에서 특정한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과 같다. - P89

(오늘날의)직업 학자들은 대개 그 집단 안에서 전문 지식과 연구주제를 가지고 경쟁하는 일 외에는 달리 무언가를 할 수조차 없다. 성공적인 학자가 된다는 것은 세포막의 생물물리학, 낭만주의 시대의 시, 초기 미국사 같은 다른 제한된 공식 연구 영역에 종사하며 일생을 보낸다는 것을 뜻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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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감이라는 것이 체력에서 온다는 얘기를 했었다.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덧붙이며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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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저자의 얘기를 읽기 전부터도 체력이 진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하루하루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다보면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저자도 본문에서 고백했지만 젊을 땐 진짜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몸에 안좋은 것들을 아무리해도 비교적 금방 회복되는 게 느껴지지만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아마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좋았던 때라는 것을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좋든 싫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꾸준한 운동과 자기 관리를 한다면 좀 더 말랑말랑한 ‘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저자의 경우처럼 영감이 필요한 일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일이든 간에 좋은 컨디션으로 롱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너무 오래 앉아있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운 운동이라도 꾸준히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운동해서 남주는 거 아니고 결국 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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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쳇바퀴를 굴리다‘ 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 글의 제목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딱히 그렇게 부정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해준다. 뭔가 예상이 되는 것은 뻔하고 재미없어보일 수도 있지만 미래에 대해 불안하지 않은 안정적인 상태일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게 저자의 얘기였다. 이는 물론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저자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사람의 성향과는 별개로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냥 막연하게 안좋게만 보이는 것에도 그 이면에는 좋은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가급적 긍정적인 면들을 보려고 하는 태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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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3 ‘자존감의 언어‘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보통의 언어는 바로 ‘기특하다‘ 이다. 여기서 저자는 타인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기특하게 여기기 위해 꼭 거창한 일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사소한 것들으로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이 한 것들에 대해 기특하다고 토닥여주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져보는 것도 마음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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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나오는 글중에 ‘완벽의 비결‘ 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의 창업자인 에드윈 캣멀이 했던 말이 소개되는데, 핵심은 시작은 별볼일없었지만 계속해서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진화해나갈때 완벽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것이었다. 완벽해보이는 것 뒤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완벽해보이고 사람들은 그 겉모습을 부러워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노력들은 잘 보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부러워만 하지말고 그에 걸맞는 대가를 마땅히 지불하는 것만이 완벽에 가까워질수있는 유일한 비결임을 항상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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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걱정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오는데, 특별히 인상깊게 느껴졌던 얘기 중에 문제가 명확할 경우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기에 걱정을 할 시간조차도 없다는 말이 와닿았다. 걱정의 늪에 빠지는 건 그것이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뜬구름 같은 걱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막연한 걱정거리들이 떠다닐 경우 책을 읽음으로써 그것들을 떨쳐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렇게 해보면 막연했던 걱정거리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읽고있는 책의 내용에 집중하게 되어 좋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근심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하신 분들이 있다면 내가 하는 방식으로 근심걱정을 날려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기에 추천하는 바이다.

30대 중반 언덕을 넘길 때쯤, 가사가 예전 같은 속도로 나오지 않는 시기가 있었다. 이때 나는 오만하게도 ‘감이 떨어졌구나‘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은 겸허해짐과 동시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제대로 된 것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예전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뇌‘라는 것은 결국 몸뚱이의 일부이니 피가 쌩쌩 돌고 산소가 공급되어야 원활히 돌아갈 터이고, 튼튼한 몸이 받쳐주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시간이 있어야 ‘영감‘이라는 게 오더라도 잡을 기력이 있는 것이다. (건강이 자산이라는 말... ‘젊은이‘로 분류되는 나이에는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이던가!)

영감뿐이랴.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은 의지, 힘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근성, 새로운 기회가 오기까지 잠복하고 버티는 힘.... 모두 결국 체력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게 많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다루느냐에 따라 내일의 질이 달라질 뿐이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인생‘이라는 말은 주로 비관적으로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패턴‘이 만들어지는 순간 설렘과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음악도 다음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지루해진다. 또한, 패턴이 남발되는, 클리셰 범벅인 드라마는 사랑받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태도는 의외로 이런 관용구들이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쳇바퀴‘라는 표현이 인생을 비관하는 용도로 쓰이면서부터 ‘반복되는 일상‘이란 것은 멋도 맛도 없는 시간의 배열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쳇바퀴 같은 삶은 정말 불행한 걸까?

인간은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동시에, 그 안정이 오면 회의감을 느낀다.

‘나는 이 쳇바퀴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다.‘

예측 불허의 내일들이 펼쳐져 있는 시간은 막상 그곳에 있을 때는 주로 암담하다. ...(중략)...불안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알 수 없는 내일 때문 아니겠는가.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감은 섬광보다는 네잎클로버를 닮았다. 클로버 무더기가 있다면 그 안에 네잎클로버는 무조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일은 엄청난 행운같지만,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이 아프도록 찾아 헤맨 시간과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창작자들은 구구절절 말을 하지 않지만, 걷고 이야기 나누고 누워 있고 유튜브 따위를 보는 모든 순간, 머릿속 한편에 ‘해야 할 일‘의 회로가 쉼없이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느 요소가 이야깃거리의 단초가 되어 생각이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영감은 늘 축약본의 형태로 알려진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쉽게 좌절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설령 후질지언정, 기다리는 자에게 영감은 반드시 찾아온다.

"기특한 순간이 많아지면 그게 자존감이 되는 것 같아."

어렴풋이 품고 있는 생각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말해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몇 년을 주기로 단어는 유행을 탄다. 힐링, 웰빙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시대가 어렴풋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에 제목이 붙여지면, 그 단어는 한동안 수많은 문화를 지배한다. 요즘 그런 단어가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 버티는 막대기 같은 거라면, 자존감은 꺾이고 말고부터 자유로운 유연한 무엇이다. 자존심은 지켜지고 말고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만 자존감은 철저히 내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순간은 자존감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선행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욕망이 부록처럼 딸려온다. 어릴 때 칭찬에 길들여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내성이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점이기도 하다. 허나 선행이 누군가의 칭찬과 거래되는 순간 자존감 통장에는 쌓일 것이 없다. 나의 대견함을 ‘알아주는‘ 주체를 타인에게 넘겨버릇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내가 생각하는 스스로가 대견한 순간은 굉장히 작은 것들이다.

나의 존엄을 가꾸어 나가는 일은 결코 거창할 필요만은 없다. 존엄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창씨개명에 맞서고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존엄한 사람들은 일상 속 하찮은 순간들이 정갈한 이들이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 생각해서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않았던 깨알같은 장면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요히 자신을 토닥여주는 습관을 가져보자.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건 달콤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내면을, 방치되어 있던 모습들을 다 끄집어낼 수 있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형태로의 사랑이든 마찬가지예요. 로맨스이든 아니든 사랑은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똑바로 마주볼 수 있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순간은 사실 대단치 않은 것들일 때가 많죠. 나만의 독특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무장해제되곤 하니까요.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하는 총체적인 그 연애의 모습이 저는 항상 탱고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패턴 속에 있지만 엇박이 있고, 굉장히 기쁜 멜로디 속에 흥이 차오르다가도 극단적으로 슬퍼지고...

"탱고는 실수가 나서 발이 엉키거나 스텝이 꼬이는 것, 그것조차도 탱고다."

연애에 실패하신 모든 분들, 그것조차 다음 사랑이 시작되는 하나의 조각이라고 생각을 하시면서 ‘그래,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이런 탱고 속에 살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양쪽이 불완전한 모양으로 퍼즐 조각처럼 딱 맞춰지는 것이 연인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은 때로는 마법 같아요. 그냥 집 앞에 빵 사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중에 너무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면 제 앞의 장소가 뮤직비디오가 되어버리거든요. 별거 없는 내 하루가 그 한 곡으로 인해, 영화처럼 변하는 거예요.

향기에는 기억이 함께 담긴다

향을 통해 내 안에 감정, 기억이 생생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대요. 향기가 기억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주는 거죠.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더라고요.

‘내가 뭐든 될 것 같고, 만사가 뭐 이렇게하면 이렇게 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능력치의 벽을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미래를 그릴 수가 없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모양새이며 내가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잘났는지를 볼 수 있는 기능이 작동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아,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나서는 그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예쁘지 않은 풀을 잡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언어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대요. 그들은 모든 식물과 동물에는 각각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모든 것이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작물과 잡초를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살다 보면 유난히 ‘내가 잡초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 같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그럴 때 인디언들의 생각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그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세상에 존재 이유 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을 테니까요.

꼭 아픔에 아픔을 더해야만 낫는 통증이 있죠. 바로 ‘근육통‘ 입니다. 통증이 아주 심한 부위를 만지면 너무 아프기도 하지만 묘한 시원함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게 실컷 주무르고 나면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도 근육이 있죠. 그렇다면 내 마음의 통증도 근육통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무조건 피하기보다는 그 아픔을 즐겨보는 겁니다. 실컷 앓고 나면 조금은 시원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가끔 마음이 복잡해질 때 호흡을 해보는데,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냥 내 호흡에만 집중해도 마음속에 좀 뿌연 것들이 가라앉으면서 ‘내가 지금 왜 복잡하고 왜 두근거리고 또는 왜 불안, 초조한 것인지‘ 딱 떠오르는 경험들을 몇 번 했어요.

너무 힘들 때는 가만히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요. 바닷속에 해조류 같은 게 뒤엉켰는데 내가 거기 얽매여 있다가 그걸 발로 탁 차면서 수영해나가는 이미지를 떠올리죠. 그러면 실제로 그 심상이 뭔가 내 온몸에 영향을 미치는 듯 그 고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는 기분을 맛볼 때가 있어요.

"어떤 작품이든 시작할 땐 다 형편없죠. 매일 하는 회의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도 사실 대부분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수정하면서 더 분명한 형태로 진화하니까요."

결국, 완벽한 결과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하늘에서 떨어진 능력이 아닌 열정과 끈기라는걸요.

처음엔 위로를 준다고 함은 자고로 더 나은 것을 이야기해야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때로는 가사가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때, 그래서 힘들어하는 가사 속의 화자가 자신들과 다름없음을 이야기할 때, 거기서 더 위로를 느끼더라고요.

상대방을 간파하는 거 같은 제일 쉬운 말이 뭐냐면 "사실 마음 많이 약하지?"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대개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곤 하죠. 이처럼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약한 모습을 한 부분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죠.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약한지 모르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가끔 잊어버리는 거 같아요.

설렘은 결국 긴장감에서 오는 거고, 긴장감이라는 건 서로 모르는 데에서 서로를 예측할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에 기인하는 거니까요.

설렘은 뒤돌아봤을 때 너무 아름답고 순수하고 촉촉한 거 같은데, 막상 진행 중일 때는 좋은 날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날들도 많아요. 왜냐하면 모든 게 불확실하고, 저 사람 마음을 모르겠고, 오늘 마음 내일 마음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다보니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어요.

사랑은 계속 변해가면서 다양한 단계의 얼굴을 보여주는 거 같더라고요.

설렘이라는 것은 지나고 보면 앞면만 생각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 같지만, 그 뒷면은 수없이 불안한 밤들, 입맛이 떨어졌던 저녁 식사들, 이런 게 분명히 있을거예요.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거 같아요."

걱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안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우리가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들은 대부분 걱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대단히 명확한 문제의 경우에는 그걸 우리가 몸으로 해결하고 다니느라 가만히 멍하게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겨를도 없습니다. 사실 사서 하는 걱정들이 대부분이죠.

알면서도 가끔 멍하니 있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거든요. 중력이 있는 거 같아요. 걱정에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100퍼센트 점점 침전할 수밖에 없는데 ‘아, 이거 아니지. 이거 내 생각이지‘ 이렇게 헤엄쳐서 나오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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