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풍경이나 사람, 사물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장하나하나가 정말로 섬세하게 느껴졌다. 소설 속 배경은 크게 일제시대와 해방이후로 나눠볼 수 있는데 소설 속 내용에 몰입하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마치 그 시대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듯한 느낌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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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시대가 막을 내리고 광복이 찾아온다. 이후에 친일파들에 대한 재판들이 열리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는 부분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괴롭게 한 일본군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친일파들을 모조리 척결해야한다는 의견과 목숨을 부지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할 수 밖에 없었다는 두 의견이 대표적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기에 단정지어 얘기할 수 없지만, 양 쪽 모두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이명보라는 인물과 김성수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전자는 독립운동에 힘썼던 인물이고, 후자는 소위 말하는 친일파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려진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이 둘이 서로 아는 관계로 이명보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김성수에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 받는 장면도 나오기는 하나, 김성수라는 캐릭터 자체의 무게중심은 애국심에 불타는 쪽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안위 쪽에 좀 더 쏠려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인물간의 구도가 있는데, 이명보와 김성수라는 두 캐릭터에 수반되어 옥희나 그 주변의 인물들 그리고 한철과 정호까지 얼키고 설킨 채로 이어져 있다.

아직 끝까지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슬슬 막바지에 치닫고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만약 내가 소설 속 시대인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어떤 캐릭터와 가장 유사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에 대해 문득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각해봤는데, 내 자신의 실제 성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떤 한 캐릭터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보게 되었다. 굳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여기서 밝히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기에 따로 말하진 않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각자 사람이 처해있는 각종 환경과 입장이 다들 다르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자체도 달라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가 약간은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막말로 사람은 생긴대로 사는 동물(?)이라, 자신의 부모님의 직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의 진로에 있어 어떤 커다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고, 가정환경이라든가 성장배경에 따라 정말 다양한 길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살펴보면 어릴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찢어지게 가난한 채로 성장해온 캐릭터도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집안 배경이 좋아서 유복하게 자라난 캐릭터도 있으며, 어릴적 가정환경이 불우한 나머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이른 나이에 사회에 나와서 일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캐릭터들도 나온다.

어떤 캐릭터가 되었든 간에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존 본능에 따라 거기에 맞게 적응하기도 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존재이다.

지금 나는 어떤 것에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고 자신이 그에 걸맞게 잘 살고 있다면 그대로 가면 될 것이고 혹시라도 그 의미나 가치가 헛된 것이라면 또다른 의미나 가치를 찾거나 부여하고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다가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내게 주어진 인생을 가치있고 보람되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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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부분을 더 읽으면서 어떠한(?) 계기로 인해 옥희와 한철 그리고 옥희와 정호가 다시 재회하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들을 추억해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서 화해하는 모습들을 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별히 정호가 옥희에게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아쉬움을 나타내는 모습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들에게도 뭔가 마음에 짠한 여운을 남겨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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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 되고 시간도 어느정도 지난 무렵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잡아들이는 일을 하는데, 정호가 예전에 고려공산당의 일원이었던 이명보와의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게 된다. 소설 속 수사과정을 보면 약간은 억지로 끼워 맞춰 넣는듯한 느낌도 받지만 이게 또 묘하게 앞에서 나왔던 뭔가 의미있었던 물건(?)들이 겹쳐지면서 정호에게 불리한 증거로 이용되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에는 이 물건(?)들이 정호의 목숨을 살렸던 물건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물건들이 정호의 인생의 장애물(?)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물건임에도 시간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생각해보도록 한다는 느낌도 살짝 받았다.

생각을 조금 확장하여 우리 일상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너무나도 귀하디 귀했던 물건이 어느 순간 내 발목을 잡는다든가 하는 물건이 혹시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소설 속 시대 상황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이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한 번 쯤 생각해봐도 괜찮은 주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독자마다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 다를 것이기에 특정한 것으로 일반화하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각자가 소중히 여겼던 물건들을 생각해보며 주변 친구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 주제를 놓고 수다를 떨어보는 것도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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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전 마지막 부분에 정호가 군중들의 돌팔매질에 맞아 죽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지러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로마군인들에게 채찍에 맞고, 침뱉음을 당하며 조롱당했던 장면과 묘하게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제 작가의 의도가 그러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장면도 독자들에 따라 느끼는 바가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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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에서는 화자가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주인공은 옥희다.

밑줄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옥희는 정호와 한철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좋지 못한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것을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좋지 못한 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흐릿해져서 기억을 더듬으려 해도 잘 생각나지 않는 반면, 좋았거나 행복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흐릿해지기보다는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더욱더 선명하게 떠오름을 고백한다.

이러한 옥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예전의 추억들, 기억들을 더듬어 돌이켜볼때 과연 어떨지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해봤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도 살면서 안좋았던 기억들보다는 좋았던 기억들이 보다 선명하게 그리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인간의 본능안에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들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자하는 어떤 시스템이 확립되어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이 한번 보거나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잊지 않고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좋은 경험도 물론 하지만,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좋지못한 경험을 하게 될 경우 그러한 모든 것들을 잊지않고 기억할 경우 감정적으로 울분이 차올라 넘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이유로 감당하기 힘든 어떤 고통이 새롭게 찾아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간에 소설로 다시 돌아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옥희가 좋은 것만 기억하고 떠올리려는 저 모습은 뭔가 희망을 놓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위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독자인 나의 마음 또한 왠지모르게 훈훈해졌다.




명보는 인연을 믿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서로 만나게 해주는 보이지않는 실타래가 우주의 섭리에 따라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하고 좋은 인연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연이었다. 이는 하늘이 정해준 천륜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단절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터였다.

반면 그가 이제야 막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으니, 돌이킬 수 없는 악연 또한 그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년이란, 인생의 모든 행복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들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삶을 위해 지불하기에 죽음은 아주 작은 대가였다.

빠르든 늦든, 결국 될 일은 되기 마련이라는 걸 한철은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었다.

이를 알게 되고부터 그는 남에게 좀 더 관대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경험해 온 엄청난 규모의 일들을 겪거나 일으킬 능력과는 거리가 먼,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아닌가. 부품 공급자들,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 그리고 그의 조용하고 성실한 수행원도.

"그때만 해도 제 말을 믿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하지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믿으면, 결국 인생도 그 믿음을 따라 잘 풀려 나가더라고요."

"아, 자신감이란 타고나는 게 아니에요. 만약 처음부터 완벽한 자신감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말밖에 안 되지요."

"자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갖게 만드는 건 세상에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인에게 닥친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는 것이죠. 운 좋게도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해 충분한 믿음을 지니고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떠나지 마. 내 곁에 있어줘.‘ 한철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이 목구멍에 걸린 채 뭉쳐서 그의 목을 꽉 메웠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대신 한철은 간신히 이렇게 말을 꺼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있었지. 다른 누구에게서도 당신에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은 느끼지 못할 거라고.... 지나보니 그 말이 맞았어."

"나도 그래, 천 번도 더 그래."

나는 모래시계 안에 갇혀 있었던 거라고.

"확률상 나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어야 했을 사람이야.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아…………"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일들은 조금 다르게 했다면 좋았을걸 싶어. 삶의 끝이 가까워지니 이제야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손으로 옥희의 작은 손을 감쌌다.

"아버지는 늘 그 호랑이가 환생한 우리 어머니였을 거라고 생각하셨어."

정호는 옥희의 눈을 들여다봤다. 옥희의 얼굴도 삶의 풍파에 많이 쓸렸지만, 그 검고 빛나는 눈만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모습 그대로였다. 모래시계 안에서조차 영원히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정호의 마음이 아려왔다.

"그게 과연 맞는 말인지는 나도 몰라…………. 그냥 아버지 당신께서 그렇게 믿고 싶으셨던 거겠지.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셔서 다른 삶을 살면서도 그분을 지켜주려 하셨던 거라고."

"왜냐면, 옥희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연이니까. 길거리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하잖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연은 백년가약을 맺는 부부의 연이겠지.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인생에서 제일 아쉽고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점이야…………. 이번 생에서 너랑 그런 인연이 되지 못했다는 거."

정호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옥희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평생 마음에 묻어두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 모두 이미 아는 사실이었고, 또한 떨어져 있는 동안 경험한 모든 것을 돌이켜볼 때, 정호의 일생에서 가장 진실하게 선언할 수 있는 이 고백을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훨씬 더 일찍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옥희야,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보석을 다 너한테 갖다줄 텐데…………."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들이 항상 그렇듯, 당시 느꼈던 갑작스러운 감정들은 이후에 오히려 더 깊고 충만하게 발전해 옥희가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다시 떠올릴 때마다 새로운 빛깔과 향기를 띠었다.

그 순간 정호는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기생들의 행렬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꽃을 던진 어느 아름다운 소녀에게 첫눈에 반했던 바로 그 지점에 그가 지금 서 있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옥희를 만난 순간이었다.

결국 정호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래서 이 말을 전할 수 없다는 게 그에겐 큰 아픔으로 남았다. 나는 너를 사랑해.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또 다른 돌이 그의 귀를 적중했고, 군중의 야유는 점점 흐려져갔다. 정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길이 끝나는 곳을 향해.

비단으로 감싸인 채 두 겹의 나무상자 안에 숨겨져 있던 그 물건들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건 나 뿐이었다.

제주는 모든 것이 본토와 달랐다. 일단 바다부터 그랬다. 제주의 바닷물은 모래사장 근처에서는 밝은 청록색이다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에메랄드빛 초록에서 사파이어의 파랑으로 점점 더 깊은 색채를 띤다.

공기에서는 소금의 짠 내음과 잘 익은 감귤의 새콤한 향기가 풍겼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내쫓지도 않았다. 섬사람들은 육지에서 온 사람을 경계했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푸른 파도를 바라볼수록 내 마음은 행복했던 기억들로 더 쏠리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몇몇 이미지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끔찍한 사건의 면모를 자세하게 기억해 내기란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제는 막상 그날 저녁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정확히 어떻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아주 선명하게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은 오직 아름다운 부분들뿐이다.

이웃 마을의 이장이 쓰던 중고 흑백 텔레비전 한 대를 구입한 뒤에야, 나는 마침내 동네 안에서 약간의 존경과 인정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 마을 전체에서 텔레비전을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의 매일 저녁 마을 사람들 전체가 뉴스를 보기 위해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몇 달이나 물에 떠 있기와 물장구치기를 꾸준히 연습한 끝에, 나는 마침내 숨을 참고 해저로 잠수하는 단계를 허락받았다.

물속에서, 나는 과거의 ‘나‘들의 무게가 깊은 해저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나는 그 모든 고통과 후회를 겪었던 그 사람이 더는 아닌 것 같았다.

제주도에 와서 내가 또 하나 알게 된건, 여기서는 봄여름에도 코스모스가 핀다는 사실이었다.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 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있을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번역자는 그 책의 가장 꼼꼼한 독자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를 써본 경험이 있는 저자가 영어로 쓴 원문은 마치 이중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예술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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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드립백 콜롬비아 엑셀소 디카페인 #4

1년 전엔 이 포장 디자인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얼마전 알라딘 커피가 리뉴얼 하면서 기존에 있던 드립백 포장 디자인도 전체적으로 바뀐듯 하다.

뭐 껍데기보다는 안에 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한 법이니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예전 디자인에 익숙해져있어서 그런지 아직은 생소하다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또 적응 되고 뭐 그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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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소설 속 배경이나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었고, 밑줄 친 문장 중에서는 뭔가 와닿는 문장들도 있어서 좋았다. 이와 더불어 내 감성도 한 층 더 깊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미 너무 초췌하고 앙상해져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팔꿈치를 잡을수 있을 정도였다. 군복은 마치 옷걸이에 걸어둔 것처럼 그의 말라빠진 몸에 겨우 걸쳐진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굶주림은 여전히 그를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한때 자신이 짐승들을 향해 달리고, 쫓고, 또 죽일 만큼 강한 힘을 가졌었다는 게 지금은 아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세상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버림받은 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야마다는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해 곰곰이 성찰했다. 아무도 그의 부재를 진심으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미네코는 물론이고 어쩌면 이토 아쓰오조차도.

야마다에게는 그의 삶이 최소한의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마무리된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힘이 빠져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야마다는 차가운 땅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일단 그런 자세를 취한 이상 아예 누워버리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마다는 숲속 바닥이 그의 침대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그의 담요인 양 몸을 쭉 펴고 누웠다. 이렇게 있다 보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고 마침내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게 신기했다.

바로 그 순간 야마다는 자신이 어디서 이 모습을 보았는지 생각해 냈다. 아주 오래전, 여기서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산 속에서 바로 이렇게 눈 위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시체나 다름없이 보이던 그 남자.

당시의 야마다는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리라는 걸 짐작조차 못했지만, 그 이후 일어났던 모든 일을 조화롭게 맞물리게 하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이 수정처럼 또렷한 의식의 물결 속에서 그를 압도했다.

논리적으로든 비논리적으로든 발생했던 불가역적인 사건들, 그 모든 일이 그를 정확한 최종 목적지인 이곳에 안착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왜‘라는 물음조차, 이제 새하얀 저 하늘에서 깨끗하게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알겠군."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 어쩌면 속으로 생각하기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언어가 목구멍을 떠나 음성이 되었는지, 혹은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의식의 단편으로만 남았는지도 더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소리를 냈다 한들, 그걸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야마다는 마침내 평온을 찾았다.

한 청년이 정호의 오른편 골목에서 부리나케 달려가는가 싶더니,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거리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일본이 항복했다!" 그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한국은 독립국이다!"

마지막 빗방울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댐처럼, 사람들이 숨 막히는 속도로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정호는 곧 수백 명, 그리고 수천 명 이어 수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로 얼싸안고, 노래하고, 울고,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들도 더는 낯선 이가 아니었다.

이 열정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가장 위대한 사랑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이 감정을 억누를 수없어서 정호는 크게 울부짖었다.

황홀함의 절정에 빠져 목을 놓아 흐느끼는 순간,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울컥한 짠맛에 목구멍이 콱콱 막혀 오고 그렁그렁한 눈물로 눈시울이 흐려져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지금, 정호는 극도의 환희, 자유라는 이 감각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다.

하지만 정호의 냉담한 침묵 앞에서 옥희는 그들이 다시는 예전 같은 친구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널 연화한테 데려다 주려고 왔을 뿐이야." 마침내 정호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사람은, 그가 살아있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야 비로소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여파 중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고 할 만했던 건 시장에서 아편을 하나도 구할 수 없게 되어 강제로 마약을 끊고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 일이었다고 연화는 말했다. 그 과정을 겪느라 거의 죽을 뻔했지만 이제 더는 아편을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인생이란 게 얼마나 웃기니. 이모가 조금만 더 오래 사셨다면 미국에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옥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는 이 월향의 편지가, 자신의 비참한 몰락을 가져온 이 나라를 탈출해 세계를 반 바퀴돌아야 닿는 먼 곳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 볼 기회인 셈이었다.

옥희는 앞으로 그 어떤 새로움에도 손을 뻗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아픔을 겪었으므로.

옥희는 이제부터는 좋은 일들만 그의 앞길에 있으리라 믿었다. 오직 크나큰 평화만이 깃들기를. 이제 그가 막 건너가게 될 바다의 이름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작별을 고한다 해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가끔 화를 내거나 슬퍼하기도 하지? 사랑 때문에 기쁨도, 즐거움도 느끼고?"

인생은 곧 바퀴였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바퀴를 잘 굴려 어디로든 갈수 있었다. 반면 어리석거나 운이 나쁜 사람은 그 바퀴에 깔려 무참히 짓밟힐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그 바퀴를 앞쪽으로 굴러가게 하는 일에온 힘을 쏟았다. 먹고 자고정사를 나누고 아이를 갖는 것처럼 흔히 인생의 휴식 혹은 쾌락이라 여겨지는 일조차도, 실은 무의식중에 그저 그 바퀴를 앞으로 굴리는 일에 불과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멈추는 순간은 오직 죽음을 맞이할 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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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초반에 일본군 장교가 산에서 길을 잃고 혹독한 추위에 떨며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산의 지리를 잘 아는 조선인 길잡이가 그 일행에 있었다. 그 때 이 길잡이 덕분에 이 일본군 장교는 무사히 하산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된다. 그 때의 인연으로 그 일본군 장교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그 조선인 길잡이에게 자신(일본군 장교)의 이름이 새겨진 은제 담뱃갑을 주면서 혹시라도 목숨을 위협 받을 때 누구에게라도 이 담뱃갑을 보여주면서 얘기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소설 속 시대 배경으로 그게 1910년대 였고, 오늘 읽은 부분은 어느덧 30여년이 지난 1944년이었다. 그 사이에 당시 조선인 길잡이였던 남경수는 운명을 달리했고, 그의 아들인 남정호는 아버지의 유품인 그 은제 담뱃갑을 물려받게 되는데, 정호가 아버지의 유품이기에 자신의 몸뚱아리처럼 지켜왔던 이 은제 담뱃갑이 오늘 읽은 부분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30년 전 정호의 아버지에게 은제 담뱃갑을 줬던 일본군 장교와 포로로 잡혀서 먼 이국 땅에서 총알받이로 전쟁터로 끌려갈 예정이었던 정호가 만나게 된다.

소설 초반부에 잠깐 나왔다가 한 400페이지 넘게 나오지 않던 인연의 끈이,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작지만 강력한 전율이 느껴졌다. 일제시대의 그 냉혹한 현실 속에서 조금이나마 온기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정호는 이보다 더 오랫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눕지도 못한 채 버텨냈던 과거의 순간들을 되새겨 보려 했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엔 자신이 앞으로 더 오래살아서 뭔가 끝까지 해봐야 된다는 확신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지금 그는 인생에서 볼 일은 이미 다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에서 고통을 끝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정호의 손이 담뱃갑을 쥐는 순간, 장교의 군홧발이 그의 손목을 밟아 땅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거칠게 짓이겼다.

이마를 쓸어 땀을 닦은 뒤 장교는 마치 동물들이 다 잡은 먹잇감을 데리고 장난을 치듯 여유롭게 정호의 배를 한 번 세게 걷어찼다. 일격을 맞은 정호는 몸을 낮게 웅크린채 허리춤 안에 들어 있는 칼을 남몰래 더듬어 잡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나?" 장군이 정호의 얼굴 앞에 담뱃갑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정호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그를 죽일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셨다."

장군은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손으로 담뱃갑을 요리조리 신기한 듯 돌려보았다. 잠시 그 물건에 완전히 매료되어 경계를풀고 무방비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정호가 엄지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칼자루를 더듬은 순간,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정호를 깊이 응시했다.

"네 아버지에게 이걸 준 사람이 바로 나다…………. 우리는 거의 30년 전 평안도 산속에서 우연히 만났고, 네 아버지 남경수가 내 목숨을 구했다. 그때 난 그에게 보답하고자 나중에어떤 어려움을 맞닥뜨린다면 아무에게든 이걸 보여주고 목숨을 건지라고 했지. 그게 바로 내가 될 줄은 전혀 몰랐군." 장군이 말했다. "이걸 내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호는 그 장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생전의 아버지를 알았고, 심지어 아버지에게 어떤 믿음의 징표까지 보답으로 남긴 적이 있다는 것만 겨우 깨달을 뿐이었다. 자신이 평생 소중하게 간직해 온 아버지의 유품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새 이 남자를 죽이겠다는 생각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네가 어디선가 이 물건을 훔쳤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듣자 하니 네 말은 전부 진실인 것 같군."

"왜 내 말을 그렇게 쉽게 믿는 거지?" 정호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네 생김새가 네 아버지와 똑 닮았으니까." 장군이 담뱃갑의 각인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봐, 여기. 내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야마다 겐조."

"이제부터 내 말 잘들어. 지금 나는 편지 한 통을 썼다. 이 편지를 소지한 사람은 제5군단 사령관인 야마다 겐조 장군이 파견한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쓰여 있어. 이걸 가지고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 군대에 속한 누군가가 널 심문하거나 강제로 연행하려 할 때 이 편지를 보여주면 풀려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이런 식으로 잡히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알겠나? 한 번 보내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넌 당장 떠나야 해. 행운을 빈다."

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오직 신선한 공기의 자취를 따라 자유로 향하는 길을 필사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짐승처럼 잔뜩 웅크린 몸으로 그는 달렸다.

나는 살고 싶어.

그저 그는 언젠가 정호가 했던 말을 떠올릴 뿐이었다.
삶을 단단히 붙잡거나 미련 없이 놓아주거나, 그 둘 중 하나를 고를 명확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자신은 매번 죽음을 거부하는 쪽을 택해 왔다고 정호는 말했었다.

"난 한때 사랑했거나 아꼈던 모든 사람을 잃었어."
옥희의 목이 메었다. "이제 내겐 싸워서 지킬 것도 없어."
"아, 그런 건 상관없어.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그게 바로 관건이란 말이야."

"무섭냐고? 아니. 뭣 때문에?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기 마련이야. 내 손으로 죽인 사람들도 많고. 이러다 언젠가는 내 차례도 오겠구나 싶을 만큼 많았지. 하지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은 소인배들에게나 있는 일이지. 그리고 내겐 계획이 있거든." 이토는 옥희 쪽으로 바짝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나면 조선은 독립을 얻게 될 거야. 여기 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겐 끔찍한 선고란 말이야.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는 본토로 돌아간다."
남자는 빈 잔에 사케를 한차례 더 따라 마셨다.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설득도, 아니 설득의 가망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수들은 결코 옥희를 두렵게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행동으로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언제나 인간들이었다.

다른 이들의 염려 혹은 의심 섞인 눈초리에 그는 이내 탁자 위에 있는 자그마한 검은 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것은 평생 서둘러 먹이를 구하고 어딘가에 쟁여두어야 한다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명에 투신하고 있는 개미 한 마리였다. 야마다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 개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한 말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종말이 임박한 전투의 목전에서 최고 사령관이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이었고, 병사들 역시 그의 의도를 알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혼자였다.

이처럼 극명한 패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대일본제국군 장성에게 선택지는 명예롭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었다. 누구라도 야마다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조차 놀랍게도, 야마다는 곧장 몸을 돌리고는 숲이 무성한 산등성이를 향해 온 힘을 다해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숲에 닿기 직전에 그 세 발 중 최소한 한 방이 자신에게 명중했음을 확신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죽는다는게 바로 이런 느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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