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초반에 일본군 장교가 산에서 길을 잃고 혹독한 추위에 떨며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산의 지리를 잘 아는 조선인 길잡이가 그 일행에 있었다. 그 때 이 길잡이 덕분에 이 일본군 장교는 무사히 하산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된다. 그 때의 인연으로 그 일본군 장교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그 조선인 길잡이에게 자신(일본군 장교)의 이름이 새겨진 은제 담뱃갑을 주면서 혹시라도 목숨을 위협 받을 때 누구에게라도 이 담뱃갑을 보여주면서 얘기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소설 속 시대 배경으로 그게 1910년대 였고, 오늘 읽은 부분은 어느덧 30여년이 지난 1944년이었다. 그 사이에 당시 조선인 길잡이였던 남경수는 운명을 달리했고, 그의 아들인 남정호는 아버지의 유품인 그 은제 담뱃갑을 물려받게 되는데, 정호가 아버지의 유품이기에 자신의 몸뚱아리처럼 지켜왔던 이 은제 담뱃갑이 오늘 읽은 부분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30년 전 정호의 아버지에게 은제 담뱃갑을 줬던 일본군 장교와 포로로 잡혀서 먼 이국 땅에서 총알받이로 전쟁터로 끌려갈 예정이었던 정호가 만나게 된다.
소설 초반부에 잠깐 나왔다가 한 400페이지 넘게 나오지 않던 인연의 끈이,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작지만 강력한 전율이 느껴졌다. 일제시대의 그 냉혹한 현실 속에서 조금이나마 온기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정호는 이보다 더 오랫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눕지도 못한 채 버텨냈던 과거의 순간들을 되새겨 보려 했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엔 자신이 앞으로 더 오래살아서 뭔가 끝까지 해봐야 된다는 확신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지금 그는 인생에서 볼 일은 이미 다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에서 고통을 끝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정호의 손이 담뱃갑을 쥐는 순간, 장교의 군홧발이 그의 손목을 밟아 땅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거칠게 짓이겼다.
이마를 쓸어 땀을 닦은 뒤 장교는 마치 동물들이 다 잡은 먹잇감을 데리고 장난을 치듯 여유롭게 정호의 배를 한 번 세게 걷어찼다. 일격을 맞은 정호는 몸을 낮게 웅크린채 허리춤 안에 들어 있는 칼을 남몰래 더듬어 잡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나?" 장군이 정호의 얼굴 앞에 담뱃갑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정호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그를 죽일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셨다."
장군은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손으로 담뱃갑을 요리조리 신기한 듯 돌려보았다. 잠시 그 물건에 완전히 매료되어 경계를풀고 무방비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정호가 엄지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칼자루를 더듬은 순간,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정호를 깊이 응시했다.
"네 아버지에게 이걸 준 사람이 바로 나다…………. 우리는 거의 30년 전 평안도 산속에서 우연히 만났고, 네 아버지 남경수가 내 목숨을 구했다. 그때 난 그에게 보답하고자 나중에어떤 어려움을 맞닥뜨린다면 아무에게든 이걸 보여주고 목숨을 건지라고 했지. 그게 바로 내가 될 줄은 전혀 몰랐군." 장군이 말했다. "이걸 내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호는 그 장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생전의 아버지를 알았고, 심지어 아버지에게 어떤 믿음의 징표까지 보답으로 남긴 적이 있다는 것만 겨우 깨달을 뿐이었다. 자신이 평생 소중하게 간직해 온 아버지의 유품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새 이 남자를 죽이겠다는 생각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네가 어디선가 이 물건을 훔쳤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듣자 하니 네 말은 전부 진실인 것 같군."
"왜 내 말을 그렇게 쉽게 믿는 거지?" 정호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네 생김새가 네 아버지와 똑 닮았으니까." 장군이 담뱃갑의 각인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봐, 여기. 내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야마다 겐조."
"이제부터 내 말 잘들어. 지금 나는 편지 한 통을 썼다. 이 편지를 소지한 사람은 제5군단 사령관인 야마다 겐조 장군이 파견한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쓰여 있어. 이걸 가지고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 군대에 속한 누군가가 널 심문하거나 강제로 연행하려 할 때 이 편지를 보여주면 풀려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이런 식으로 잡히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알겠나? 한 번 보내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오직 신선한 공기의 자취를 따라 자유로 향하는 길을 필사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짐승처럼 잔뜩 웅크린 몸으로 그는 달렸다.
그저 그는 언젠가 정호가 했던 말을 떠올릴 뿐이었다. 삶을 단단히 붙잡거나 미련 없이 놓아주거나, 그 둘 중 하나를 고를 명확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자신은 매번 죽음을 거부하는 쪽을 택해 왔다고 정호는 말했었다.
"난 한때 사랑했거나 아꼈던 모든 사람을 잃었어." 옥희의 목이 메었다. "이제 내겐 싸워서 지킬 것도 없어." "아, 그런 건 상관없어.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그게 바로 관건이란 말이야."
"무섭냐고? 아니. 뭣 때문에?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기 마련이야. 내 손으로 죽인 사람들도 많고. 이러다 언젠가는 내 차례도 오겠구나 싶을 만큼 많았지. 하지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은 소인배들에게나 있는 일이지. 그리고 내겐 계획이 있거든." 이토는 옥희 쪽으로 바짝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나면 조선은 독립을 얻게 될 거야. 여기 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겐 끔찍한 선고란 말이야.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는 본토로 돌아간다." 남자는 빈 잔에 사케를 한차례 더 따라 마셨다.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설득도, 아니 설득의 가망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수들은 결코 옥희를 두렵게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행동으로 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언제나 인간들이었다.
다른 이들의 염려 혹은 의심 섞인 눈초리에 그는 이내 탁자 위에 있는 자그마한 검은 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것은 평생 서둘러 먹이를 구하고 어딘가에 쟁여두어야 한다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명에 투신하고 있는 개미 한 마리였다. 야마다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 개미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한 말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종말이 임박한 전투의 목전에서 최고 사령관이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이었고, 병사들 역시 그의 의도를 알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극명한 패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대일본제국군 장성에게 선택지는 명예롭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었다. 누구라도 야마다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조차 놀랍게도, 야마다는 곧장 몸을 돌리고는 숲이 무성한 산등성이를 향해 온 힘을 다해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숲에 닿기 직전에 그 세 발 중 최소한 한 방이 자신에게 명중했음을 확신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죽는다는게 바로 이런 느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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