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과학 분야 중에서도 물리학에 나올법한 내용이 하나 나온다. 내가 과학 분야에 그다지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개념인지 정확히 그 명칭을 확언할 수 없으나, 뒤에 나오는 내용들을 통해 추론해보자면 아마도 상대성이론 쪽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관찰자가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 이런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과학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의 깊이가 좀 더 깊었더라면 읽자마자 직관적으로 이해했을텐데 그러지 못한 게 살짝 아쉬웠다. 어쩌면 이러한 아쉬움은 과학 분야의 책을 좀 더 읽어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 소설에 나온 물리학 개념과 관련하여 그나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은 바로 내가 개인적으로 읽다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엔드오브타임》이다. 물론 인터넷 검색창이나 챗GPT같은 AI 플랫폼에 물어보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지만, 물리학과 관련된 전반적인 큰 흐름을 살펴보는데는 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단은 당장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이나 AI플랫폼을 활용하고, 이후에 물리학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면서 큰 흐름을 잡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모든 사물의 운동 속도는 예외 없이ㅡ정지한 사물조차도ㅡ빛의 속도와 일치한다고 나는 읽었다.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와 시간 속에서 운동하는 속도를 합하면 일정하게 빛의 속도가 된다. 즉, 공간 속에서 빠르게 운동할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광속에 가깝게 비행하는 우주선을 탄 사람은 늙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 방정식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 P80

이따금,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와 똑같이 멈춰 있는 보도블록들, 나무와 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들도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흐르는 시간 속을 날아가고 있구나. 순수한 시간의 속력을 견디고 있구나. - P80

그렇게 기다린다.
파고드는 발목의 통증, 추위, 달아난 잠 대신 밀려드는 허기, 타들어오는 갈증 속에서 빛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있다. - P81

한지에 먹을 입히기 시작한 첫 순간 이후, 삼촌의 생활은 잠시도 그 그림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날씨에 극도로 민감했는데, 기압과 습도에 따라 물과 먹이 번져가는 양상과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마른다는 것은 모세관 현상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을. 그림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 됐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수시로 그림의 물기를 확인해야 했고, 적절한 시기에 물을 더 뿌려줘야 했다. 더 힘 있게 번져가도록 할 부분과 얼마 안 있어 멈춰야 할 부분을 택해 물의 양을 조절해야 했다. 콩알만 한 종이죽 뭉치에 물을 흠뻑 적셔 그림에 붙이면, 그 부분의 물의 밀도가 높아져 그쪽으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시각적 예민함 이상의 감각이 필요했다. 먹의 감각, 종이의 감각, 물과 공기의 감각, 무엇보다 시간의 감각이 필요했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도 그것들을 놓쳐선 안 되었다. - P84

이 방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그 의문들을 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복잡한 의문들이 가지를 뻗어갈 줄은 몰랐다. - P85

지금 저 그림들을 느슨히 묶어놓은 솜씨는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다. 누군가가 일일이 풀어서 그림들을 펼쳐본 것이다. 알고 있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무방비 상태로 저런 일을 당한다. 심지어 육체가 부검당하기도 한다. - P86

입술을 다문 채 나는 서 있다. 어떤 분노는 이렇게 지속된다. 혼란과 무력감, 고통을 연료로 밑불처럼 낮게 탄다. 머리를 뜨겁게 하지 않고,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한다. - P86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 P88

같게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네 얼굴인걸. - P88

존 애덤스가 피아졸라의 음악을 평하며 네루다의 시를 인용한 부분이 있다. 피아졸라의 음악은 ‘흠집 많은 인간의 혼란, 땀과 연기에 찌든, 백합 향기의 오줌 냄새를 맡는, 음식 자국과 피에 물든, 낡은 옷처럼, 주름진 육신처럼, 감시, 꿈, 불면, 예언, 사랑과 증오의 말들, 어리석음,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따위로 순결을 잃은 영혼‘의 음악이라고.
그 말을 그대로 서인주의 그림에 적용할 수 있다. - P89

짙은 색의 크레용을 격렬하게 겹쳐 칠해 거의 검어져버린 화면 속에서, 욕망 없이 벌거벗은 몸들이 칼자국처럼, 깊은 흉터처럼 꿈틀거린다. 성별도, 나이도 분명치 않은 사람들의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몸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수직 또는 수평으로, 때로 비스듬한 대각선으로 몸을 뻗고 구부려 마침내 그들이 다다르려하는 곳은 어떤 심연의 수심인가. - P90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에는 모세혈관들 같은 무수한 섬유질의 길들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길들을 따라 퍼져가는 먹의 모양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잡아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가끔은 그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 P94

1밀리미터 두께도 안 되는 한지가 마치 한없는 깊이를 가진 듯 물과 먹이 흐르는 공간이 된다니, 어쩐지 나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졌다. - P94

삼촌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 피를 홀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 P102

인주도, 자신의 피가 먹이 되어서 종이 속을 흐른다고 느꼈을까. 멎지 않는 피처럼 시간의 혈관을 더듬어 간다고 느꼈을까. - P103

모르겠다. 네가 왜 갑자기 이 일을 한 건지. 대체 왜. - P103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그림을 인주는 그렸다.
삼촌의 그림과도 닮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 P103

인주의 그림은 너무 어둡고 탁해, 가까이서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반면 삼촌의 그림은 멀리 떨어져 서서 전체를 파악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비슷한 점도 있었다. 유혹하지 않는다는 것. 이 세계에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제야 그것이 이 세계에 부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어떤 것을 그린다는 것. 그러나 그것들을 구체적인 공통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P103

인주의 그림은 초월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림 속의 사람과 나무는 마치 검은 불꽃들처럼 타올랐다. 팔과 다리, 가지와 뿌리가 투쟁하듯 화면의 다른 끝을 향해 뻗어나갔다. 격렬한 그 불길을 타고 하늘과 땅이 맺어졌다. 검은 피로 범벅이 된 그 결혼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 그림들을 오래ㅡ충분히 오래ㅡ바라보고 나면 예상치 못했던 고요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촌의 그림에 배어 있는 침묵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 P104

인주의 그림과 비교한다면, 삼촌의 먹그림은 계단 없이 천장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육체 없이 태어난 그림, 혹은 육체의 과정이 완전히 제거된 뒤 정신만 남은 그림이라고 할까. 별들은 하얗게 타올랐지만, 그 불꽃에는 어떤 고통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의 그림들은 고통너머에 있거나, 그것이 무화되는 곳에 있거나, 엄청난 밀도로 응축돼 보이지 않게 되는 곳에 있었다. - P104

정신 차려.
시간이 없어. - P106

누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데, 어떻게 서로의 입술을 찾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따스한 입속에서, 갓 태어난 물고기같은 혀들이 어떻게 더듬어 헤엄쳐 다녔는지 모른다. - P112

빛도 형체도 부피도 없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질량과 자력을 가진 검은 구멍들이 은하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영원히 멈춰 있거나, 영원히 연장될까. 검은 구멍의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형체를 늘어뜨리며 빨려들어간 죽은 별은, 마침내 구멍의 심장부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만나게 될까. 부피 없이 뭉쳐진 전 세계의 그림자를, 무자비한 암흑의 총량을 통과하게 될까. 수억년 전에 폭발한 별의 형상이 어둠의 핏속을 더듬어 우리에게 오는 동안, 죽은 별의 몸이 검은 구멍 속에서 겪는 것은 무엇일까. - P114

삼촌의 흰 별이, 아니, 인주의 흰 별이 검푸른 먹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오래전, 삼촌의 방을 나오면서 뒤돌아보고는 저건 보석 같아. 하고 중얼거렸었다.
물의 결정이자 불의 한순간.
0과 무한. - P114

너무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덮쳐오고, 미처 들여다보기 전에 바스라지며 사라진다. 사라지는 짧은 틈마다 흰 별이 먹 속에서 타오른다. 타는 듯한 뜨거움이 두 눈에 고였다 사라질 때마다, 이지러졌던 모든 사물이 얼음처럼 선명해진다. - P114

두렵다.
두렵지 않다.
아니, 두렵다. - P115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실형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건이란 진술되기 나름이니까요. - P119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된다면, 그런 단어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입술을 열어 그걸 발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찬가지로, 세계의 모든 형상이 하나의 결정, 단 하나의 점으로 응축된다면, 그때는... - P122

소리 지르고 싶다. 튀어오르고 싶다. 꿈틀거리고, 퍼덕이고 싶다. - P125

치욕은 조용하다.
조용한 우물 밑을 들여다보듯 나는 치욕을 들여다본다. - P126

낮고, 지치고, 차가운 목소리.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목소리.
짓누르는 목소리.
숨을 조이는 목소리. - P127

살려줘. 누구에게인지 모르는 채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캄캄한 구멍들이 벌집처럼 뚫린 건물들도, 수십 미터 허공에 멈춰 있는 부계도 한 겹의 껍데기였다. 심장 박동이 멈추는 동시에 꺼져버릴 거품이었다. - P129

거대한 얼음에 실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택시는 끝없이 원을 그리는 것 같았다.
영원히 그 새벽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 P129

멈추지 않고 생각한다. - P130

흉통이 처음 심장을 찔러왔을 때.
처음으로 죽음과 생명이, 세계와 내가 대등해졌을 때.
흔들리던, 깜박이던 목숨의 촉이 끝내 끊어지지 않았을 때.
그때 삼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단 한순간.
아주 짧게. - P134

내가 그 일을 할 겁니다.
서인주라는 이름을 불멸하게 할 겁니다. 서인주가 가진 건 단순한 미술적 재능만이 아니었습니다. 신화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그 여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 아름다움, 압도하는 그림, 불행한 개인사, 자동차 자살이라는 극적인 최후까지………… 그 여자를 신화로 만들 겁니다. 그걸 위해 내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재산 이상의 것을 바쳤습니다. 앞으로도 바칠 겁니다. - P136

물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말을 끊는다. 뚫을 듯 내 얼굴을 쏘아본다. 감정을 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오히려 강한 감정으로 읽히는 표정이다. - P136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 P137

모든 일이 막힘없이 굴러가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그 여자를 불멸하게 할 겁니다.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해하는 어떤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P137

나는 압도되지 않았다. 그의 광기와 고통, 집착에 압도되지 않았다. - P137

대답 대신 나는 묻는다. - P138

일반상대성의 원리대로, 물질의 질량에 비례해 주변의 공간이 휘어진다면ㅡ그게 행성처럼 거대한 것들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면ㅡ타인의 몸 주위로 구부러진 공간의 만곡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자신의 구부러진 공간 속으로 타인을 불러들였다 내보내곤 하며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리라고. - P139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파동이 그 휘어진 공간의 경계까지 퍼져나가는 거라면ㅡ그 경계의 윤곽을 아우라라고 부르는 거라면ㅡ삼촌의 그걸 아마 나는 느껴보았다고. 눈도 귀도, 코도 살갗도 아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감각으로. - P139

삼촌의 몸과 내 몸이 아직 닿아본 적 없을 때, 손끝 한번 스쳐보지 않았을 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 낮고 연한 그 파동을. 한없이 따스한, 부드러운 공기의 기척을. 똑같은 감각으로 강석원의 그것을 느낀다.
좁은 탁자를 건너 내 얼굴까지 번져온 오싹한 기척을. 살기, 억제된 고통, 끈적이는 슬픔으로 얼룩진 덩어리를. - P140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나는 숨을 멈춘다. 이 남자는 어떤 형태로든 인주를 불행하게 했을 것이다. 인주의 남모르는 근심, 오래 곪은 환부였을 것이다. 연인이었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든, 절반의 사실이든, 전혀 사실이 아니든. - P141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본다. 모른다면 그는 인주의 남자가 아니다. 인주의 허벅지를 관통한 것이 무엇인지, 이십 년 동안 인주의 다리를 절게 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흉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면. - P142

우우우 바람이 소리친다. 반소매 흰 체육복이 펄럭인다.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린다. 창 같은 장대가 손아귀에서 휘청인다.
세차게 장대를 꽂는다.
튀어오른다.
날아오른다.
허리가 거꾸로 호(弧)를 그린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지 않는다. 넘는다. 넘지 못한다. 소리친다.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는다. - P143

확신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어.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 죽었어. 썩어서 사라졌어. - P144

형상도, 소리도, 빛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초에, 양자역학적으로 진동하는 혼돈이 있었다. 확률적인 한순간이 찾아와, 10^-43초의 침묵을 뚫고 존재가 뛰쳐나왔다. 시공간이 씨앗처럼,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소금 한 알처럼 던져졌다. 그 소금이 충분히 부풀 때까지 빛은 없었다. 어마어마한 밀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원소들이 서로 몸을 부딪쳐 응결됐다. 불에 싸여 태어난 별들이 전속력으로 회전했다. 은하가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핵융합 반응을 시작했다. - P148

원시 지구는 끓어오르는 별이었다. 붉은 마그마가 바다를 이루며 넘실댔다. 마그마의 열기 때문에 증발해 올라간 원소들이 허공에서 결합했다. 태고의 비가 지상에 뿌려졌다. 펄펄 끓는 비였다. 아무리 비를 맞아도 마그마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수천만 년을 변함없이. 끓는 비는 내리고 마그마의 바다는 일렁였다.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자 서서히 비가 식어갔다. 비를 맞은 지구도 함께 식기 시작했다. 생명체가 생길 수 있을 만큼 지구가 식는 데 수천만 년이 더 걸렸다. 수천만 년의 비와 수천만 년의 불이 만나 끓어오르는 증기를 뿜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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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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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라는 비교적 생소한 소재를 기반으로 하여 시각에 핸디캡을 가진 ‘그‘와 말하기에 핸디캡을 가진 ‘그녀‘ 사이에 결코 쉽진 않지만 어떤 교감이 이루어지는 과정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문장과 감성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작품 중간중간 나오는 고유한 우리말 표현들은 생소하면서도 신박한 느낌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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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5-10-15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희랍어 시간 펼쳤다가 덮은 책인데요 언젠가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남은 시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0-15 14:37   좋아요 1 | URL
서곡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희랍어 시간은 책 자체는 얇은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문장 하나하나를 그냥 허투루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섬세한 표현들이 많이 나와서 제 경우에는 생각보다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서곡님은 독서력이 대단하신 분이시니 마음먹고 읽으시면 금새 읽으실수 있을 겁니다. 서곡님도 10월 잘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서곡 2025-10-15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과찬 민망합니다 격려와 응원이라고 여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래 전 첨 펼쳤을 때 뭐랄까 이질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생경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다를 수 있겠지요 님께서 한강 작품을 꾸준히 읽으시는 거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열독 즐독하시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0-15 14:58   좋아요 1 | URL
예 실은 저도 읽으면서 처음에는 좀 난해하게 느껴졌는데, 그냥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다보니 윤곽을 알 수 없었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근데 완독은 했지만 100% 이해했다고는 저도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합니다. 다른 분들이 쓰신 리뷰나 감상평 같은 것들을 좀 더 읽어보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부모-자식간의 관계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명령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자식 자신의 유전적 적합도와 충돌하더라도 부모 의 유전적 적합도라는 이득에 복무하게끔 자식을 강제할 수 있다‘(p.109) 는 말을 했었다.

오늘도 이에 대한 얘기가 이어지는데, 독자분들 중에 이 알렉산더의 얘기가 자신에게 해당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듯하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알렉산더의 말이 나에게 해당되는 편이라 생각되어 좀 더 주의를 집중하여 읽어볼 수 있었다. 나름 흥미로운 주제였다.

알렉산더는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이기적 경향, 부모 이익에 반하게끔 행동하는 경향은 퍼져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자녀가 장성했을 때 또한 갖게 될 자기 자녀에게, 부모 이익에 반하게 행동하는 이기성이 유전되어 자신의 번식 성공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 P111

알렉산더가 품은 이런 생각은 "모든 부모-자식 간 상호 작용은 두 개체 중 하나, 즉 부모에게 이익을 주려고 진화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번식 성공이 증진되지 않는다면 어떤 유기체도 부모의 양육 행동이나 부모 양육을 확장하도록 진화할 수 없다"(Alexander, 1974, p. 340) 라는 확신에서 비롯한다. - P111

알렉산더는 확고하게 이기적 유기체라는 패러다임 내에서 사고하며, 동물이 자신의 포괄 적합도를 증진하려고 행동한다는 중심 정리를 옹호하고, 이 점이 자식이 부모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을 방지한다고 이해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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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저자는 대한민국 엔터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고, 최근에는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TV나 유튜브 등을 통해 저자의 인터뷰 또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은 것들도 봤던 기억이 있다. 책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증을 가지고 시작해본다.




왜 태어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죽기 때문이다. - P8

가장 중요한 건 진실을 ‘아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친구를 만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재미있는 일을 하거나, 불우이웃을 돕거나, 종교 행위를 하면서 공허한 마음을 달랜다. 마음의 병은 그대로 있는데 진통제를 먹으면서 증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물론 잠시 괜찮아지긴 하지만 근본적인 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 P9

(・・・・・・)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도서 9장 3절 - P9

우린 이 미친 마음에서 벗어나 답을 찾아봐야 한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 P10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 P10

나는 책에 빠져 살았다. - P17

사랑에 대한 나의 환상이 남들과 달리 유난히 컸다 ...(중략)...  남들에게 사랑이 막연한 환상이라면, 나에게는 꼭 이뤄야 하고 또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환상이었으며, 남들에게 사랑이 이뤄야 할 여러 목표 중의 하나라면, 나에게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공부도, 가수도, 음악도, 사업도 나에겐 언제나 이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 P27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이 얼마나 파워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이 사랑으로까지 이뤄지는 것이 내 인생의 확고한 목표가 되었고, 그걸 위해서 나는 반드시 정말 특별하고 멋진 남자가 되어야 했다. - P28

남들에게 사랑이 막연한 환상이라면, 나에게는 꼭 이뤄야 하고 또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환상이었으며, 남들에게 사랑이 이뤄야 할 여러 목표 중의 하나라면, 나에게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 P30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P31

멀어져야 할 그와 그녀의 사이는 더 깊어졌고, 좁혀져야 할 나와 그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 내 기준점이 더 올라가버린 것이다. 여신을 만나려면 내가 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신이 더 대단해져 있었다. 난 오히려 안에서 의욕이 더 불타올랐다. 반드시 그보다 더 특별하고 멋진 남자가 되겠다고. - P47

내 인생의 목표가 사라지니 나 자신을 미친듯이 드라이브했던 원동력도 사라졌다. - P53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끼면서 이게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P57

이 남자가 내가 그동안 좇고 있던 목표였단 말인가? 갑자기 두려웠다. 만일 그가 신이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면, 그녀가 여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착각이었을까…………… 그럼 그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특별한 사랑‘도 혹시 환상이었을까……………. - P67

광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나는 연예인의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한 회의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어느 시점이 되면 ‘연예인이 정말 내 적성에 맞나?‘ 하고 회의가 든다는데, 나는 점점 더 신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꾸었던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꿈을 잃어버렸다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 P71

‘20년 뒤를 보자‘ - P72

20년 뒤에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나는 몸 관리, 춤 연습, 노래 연습, 음악 공부를 매일 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가수들이 놀 때, 쉴 때, 잘 때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아껴 썼다. 불규칙한 가수생활 속에서도 매일 해야 하는 루틴들을 빠짐없이 했고, 가수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무조건 음악 작업을 했다. - P73

나는 지금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의 일들을 한다. 계절당 옷 두 세트를 정해놓고, 그 두 세트만 교대로 입고, 바지는 고무줄로 되어 있는 바지만 입으며, 신발도 발을 한 번에 쏙 집어넣을 수 있는 것만 신는다. 시간에 대한 강박이 이때부터 생겨난 것 같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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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와 함께 희랍어 수업을 듣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여자와 함께 수업을 듣던 한 대학원생이 한 질문인데, 역시 대학원생이라 그런지 질문에서 예리함이 느껴졌다. 지금 학습하고 있는 희랍어의 의미를 활용하여 신의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도출해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독자인 나 또한 신의 본질적인 속성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어서 두번째 밑줄친 문장은 여자와 같은 수업을 듣던 철학과 학생의 질문인데, 앞서 대학원생이 했던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학생의 질문도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공통된 속성을 언급한 뒤 이와 비슷한 속성을 가졌지만 예외가 되는 사례를 언급함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파고들려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느껴졌다.

신령한 것, τὸ δαιμόνιον, to daimonion과 신적인 것, τὸ θεῖον, to theion 의 차이가 궁금한데요. 전 시간에 θεωρία , theoria에 ‘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신적인 것, τὸ θεῖον , to theion도 ‘본다‘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 - P104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 P105

허기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눈부신 조도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비교적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라곤했어. 그 차갑고 선명한 공간이 마치 얼어붙은 낙원 같아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시간을 끌었어. - P109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 P113

찬란한 것,
어슴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 - P115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느낀다.
단지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가고 있다고, 부스러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 P116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 P117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 P117

플라톤의 후기 저작을 읽을 때, 진흙과 머리카락, 아지랑이, 물에 비친 그림자,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작들에 이데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오직 그 의문이 감각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 안의 전극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어. - P117

모든 이데아는 아름다움이며 선함이며 숭고함이라고 너는 말했지. - P118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러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데이는 좋음의 이데아와 관계맺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니. 서울과 베네치아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의 광장들이 같은 하루에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이. - P118

하지만 말이야.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 P118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눈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 - P118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가장 미약한 아름다움,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라니! 너는 지금 동그란 삼각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 P119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ㅡ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ㅡ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 P120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 P120

그 새벽에, 왜 나는 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왜 너처럼 용기를 내서, 대범하게 상처를 감수하며 되물을 수 없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 P120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 P120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 P120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P121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華嚴. - P121

물리적 실재와 시간.
무無에서 뜨겁게 폭발하며 태어난 세계.
전진하기 전에 영원히 서성이고 있었던 시간의 씨앗.
그래, 시간.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고 불렀던 것.
그 수수께끼를 한 순간 쏘아져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을, 그 안에서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너는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했지. - P122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 P123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살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 P124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P124

ἐπὶ χιόνι ἀνὴρ κατήριπε
χιὼν ἐπὶ τῇ δειρή.
ῥύπος ἐπὶ τῷ βλέφαρῳ.
οὐ ἐστι ὁρᾶν

αὐτῷ ἀνὴρ ἐπέστη
οὐ ἐστι ἀκούειν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P127

그렇지 않다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할 거라고. 단지 아주 뿌옇게 될 뿐이라고.
그게 뭔지 나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어요.
오른쪽 눈을 감으면, 그때 이미 아주 나빴던 왼쪽 눈으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으니까. - P146

혈육들을 추억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어둡고 단단하던 그의 얼굴이 연해진다. 어렴풋이 밝아진다. - P146

아무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탈리아의 다른 어떤 것도. 미술품이며 성당, 음식 같은 것도. 단지 거기, 카타콤베 묘지만은 잊을 수 없어요.
..... 그곳은 죽은 자들의 도시더군요. - P153

여러분 눈앞에,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면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 - P153

・・・・・・ 토할 것 같았어요.
내가 보고 있는 흙이 무서워서.
그 흙이 내 몸에 묻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어요.
너무 어두웠어요.
모조리 똑같아 보이는 세 갈래 갈림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 P154

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핏자국 위에 핏자국이 덧씌워진다. 담담함 위에 담담함이, 미소 위에 미소가 짓눌러진다. - P155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호......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 P157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시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 암석들의 단층처럼 날카롭게 어긋나 다시는 그녀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과 겹쳐질 수 없을 것 같았다. - P160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어떤 감정도 없이, 먼 친분이 있을 뿐인 타인을 기억하듯 그녀는 그날의 자신을 기억한다. - P164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 P165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 P166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 P167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 P167

안개 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려온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야 하던 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려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 P168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 P169

가늘게 떨리는 획과 점 들이 두 사람의 살갗을 동시에 그었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 입술도 눈도 없다. 떨림도, 따뜻함도 곧 사라진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 P170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P175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 P177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 - P183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184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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