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 이어서 오늘도 초월론과 경험론에 대한 얘기가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각 논리의 특징들을 비교해보면서 마음에 와닿는 논거들을 취사선택하며 읽어나가는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경험론에 대한 얘기에 뒤이어서 저자는 ‘도덕 감정‘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저자는 이 개념을 근거로 하여 윤리라는 것도 결국에는 생물학에 기반하여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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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에 대한 얘기 이후에는 종교에 관한 얘기가 이어지는데 일단은 전반적인 종교의 특성에 대해 나온다.

초월론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 형태를 취한다. 신적 또는 자연적 질서에 내재하는 하나의 최고 원리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 원리를 알아내어 거기에 합치하는 수단을 발견할 만큼 현명하다. - P433

경험론자의 관점은 객관적으로 고찰될 수 있는 윤리적 논증의 기원을 탐색하며 인과 사슬의 방향을 전도시킨다. 개인은 일정한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닌 존재로 간주된다. 문화적 진화를 통해 어떤 선택들은 격률들로 정착되고, 그 다음에는 법률들로 굳어지며, 만일 그 성향 또는 강제력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신의 명령이나 우주의 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으로 고착된다. - P433

일반적인 경험론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강력한 선천적인 느낌과 역사적 경험이 일정한 행위들을 더 선호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경험했고 그 귀결들을 중시했으며 그것들을 표출하는 코드들에 따르는 데 동의했다. 이 코드들에 맹세하고 우리의 개인적 존경심을 바치며 그것을 어겼을 경우 처벌을 감내하도록 하자. - P434

경험론적 관점은 도덕적 코드들이 인간의 본성 중 어떤 성향들에는 잘 순응하고 다른 성향들은 억누르도록 고안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 P434

당위는 인간 본성의 번역이 아니라 공공 의지의 번역이다. 그리고 이 공공 의지는 인간 본성의 요구와 유혹을 이해함으로써 점점 더 현명해지고 안정적으로 될 수 있다. - P434

경험론적 관점은 헌신의 힘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유입되면서 약해질 수 있다는 점, 그 결과 어떤 규칙들은 신성을 잃고 낡은 법률은 폐지되며 한때는 금지되었던 행동들이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새로운 도덕적 코드들이 고안될 필요가 있으며 이 코드들 또한 때가 되면 신성화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경험론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 P434

만일 경험론자의 세계관이 옳다면, 당위는 일종의 사실 명제에 대한 속기(速記)로서 사회가 하고자 선택한 것(혹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코드화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주의적 오류는 자연주의적 딜레마로 환원된다.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 당위를 어떤 물질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해결책은 윤리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 P434

윤리적 코드들이 생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을 통한 진화의 산물 - P434

도덕 감정은 현대 행동과학에서 정의되는 바의 도덕적 본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본능의 귀결에 따른 판단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런 감정은 후성 규칙들, 즉 정신 발달의 유전적 성향들로부터 유래되는 것으로, 보통 감정에 의해 조건지워지며 개념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결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 P435

도덕적 본능의 기본적 기원은 협동과 배신간의 역동적 관계이다. 어떤 종에서든 본능이 형성되는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이 같은 협동과 배신의 역동성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명확히 판단하고 충분히 조작할 수 있는 높은 지능이다. 이런 수준의 지능은 복잡한 정신 계획들을 미래로 확장할 수 있는 지능으로서 ...(중략)... 이런 능력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데, 어쩌면 고등 영장류 중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도 가질지도 모른다. - P435

유전성을 가진 형질 목록 중 도덕적 소질과 가장 가까운 것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감정 이입)과 어린이와 그를 돌보는 자 사이에서 생기는 애착이다. - P437

도덕적 소질이 유전된다는 증거 외에 협동 성향을 지닌 개인들이 일반적으로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많은 후손을 남긴다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여기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진화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협동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유전자들이 전체 인류에서 우세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P437

이러한 과정이 수천 세대를 내려오면서 반복되면 도덕 감정은 불가피하게 생기기 마련이다. 아주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이런 본능들은 양심, 자존심, 자책감, 공감, 수치심, 겸손, 도덕적 분노 등의 다양한 형태로 모든 개인들이 생생하게 경험한다. 이런 본능들은 명예심, 애국심, 이타성, 정의, 동정심, 자비, 구원 등의 보편적인 도덕적 코드들을 표현하는 관습들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문화적 진화를 몰고 간다. - P437

이 도덕적 행동에 대한 선천적 성향이 가지는 어두운 일면으로는 이방인 혐오증(xenophobia)이 있다. 개인적인 친밀함과 공통 이득이 사회적 거래에서 중요한 까닭에 도덕 감정은 선택적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을 신뢰하게 되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진정한 동정심은 언제나 매우 드문 일이다. - P437

부족들은 세심하게 정의된 각종 협정과 관습을 통해서만 서로 협동한다. 그들은 다른 경쟁 집단들이 꾸민 음모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쉽게 상상하며, 심각한 갈등의 시기에는 자신의 경쟁 집단들을 쉽게 말살하고 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성스러운 상징과 갖가지 의식을 통해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견고히 한다. 그들이 받드는 신화는 위협적인 적들에 대한 승리의 서사들로 가득 차 있다. - P438

도덕성과 부족주의를 보조하는 본능들은 쉽게 조작된다. 문명이 발달하면 이런 조작은 더욱 심화된다. - P438

성장 중인 농경 사회는 처음에는 평등 사회였다가 점차 계급 사회로 변해 갔다. 잉여 농산물을 바탕으로 부족 사회에서 점차 국가로 발전해 나가면서 세습 군주와 성직자 계급이 권력을 획득했다. 낡은 윤리적 코드들은 점차 강제적 규율로 탈바꿈했으며 어김없이 지배 계급의 이익에 기여했다. 이 즈음에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신의 명령은 윤리적 코드들에 대해 강력한 권위를 부여했으며 이 또한 지배자의 편에 섰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 P438

나는 뇌의 진화론적 기원이나 물리적 기능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오늘날의 철학자들이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가정들을 중심으로 윤리학적 논의들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윤리학만큼 자연과학과의 결합이 절박하게 필요한 분야는 인문학의 다른 영역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439

인간 본성의 윤리적 차원들이 이런 방식으로 충분히 탐색되기 시작하면 도덕 논증의 선천적인 후성 규칙들이 결속, 협동성, 이타성과 같은 단순 본능들을 그저 한데 모아놓은 형태가 아님이 판명될 것이다. 오히려 이 규칙들은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여러 분위기들과 선택들에 직면하여 우리의 마음(정신)을 이끌며 복잡하게 얽힌 채 움직이는 수많은 알고리듬들의 앙상블임이 드러날 것이다. - P439

구석기 시대의 평등주의적이고 부족주의적인 본능들은 여전히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본능들은 인간 본성의 유전적 기초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대체가 불가능하다. 이방인이나 경쟁 집단에 대한 성급한 적대감과 같은 경우에서 보듯이 이런 본능들은 일반적으로 잘못 적응되어 위험을 끊임없이 초래하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본능들 위로는 문화 진화에 따라 형성된 새로운 제도들을 조정하는 논증과 규칙의 상부 구조가 나타난다. 이런 조정들은 질서와 부족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너무 일시적인 것이라 유전적 진화를 통해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것들은 아직 유전자 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 P440

윤리학이나 정치학 모두 자연과학에서 인증된 이론의 세례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 본성에 대한 검증 가능한 지식을 그 바탕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과적 예측과 이것에 기반을 둔 건전한 판단을 산출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 P440

윤리적 행동의 심층적 근원들에 대해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확실히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기획에 있어 지식의 가장 큰 공백은 도덕 감정의 생물학이다. - P440

도덕 감정의 정의 :  우선 실험심리학에서 정확하게 기술한 다음 신경반응과 내분비 반응들을 분석함으로써 정의한다. - P440

도덕 감정의 유전학 : 윤리적 행동의 심리학적·생리학적 과정들의 유전성을 측정함으로써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좀 어렵더라도 마침내는 규정적 유전자(prescribing gene)를 확인함으로써 접근 가능할 것이다. - P441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작용의 산물인 도덕 감정의 발달 : 이 연구는 다음의 두 가지 수준에서 수행될 때 가장 효과적이다. 서로 다른 문화들의 출현의 일부분으로서 윤리 체계들의 역사. 그리고 다양한 문화들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인지 발달. 이와 같은 탐구들은 이미 인류학과 심리학에서 잘 수행되고 있다. 앞으로는 생물학의 기여로 인해 더욱 발달할 분야들이다. - P441

도덕 감정의 심층적 역사 : 왜 도덕 감정들이 애초부터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 아마도 이것들이 유전적으로 진화해 온 기나긴 선사 시대 속에서 생존과 번식적 성공에 기여했기 때문이리라. - P441

사람들은 본성상 너무 똑똑하고 따지기를 좋아해서 그 어떤 것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 P442

변화는 수많은 세대에 걸쳐 천천히 올 것이다. 왜냐하면 낡은 신념들은 명백히 그릇된 것일때조차도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니까. - P442

윤리철학을 과학과 손잡게 만드는 논리가 종교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는 초유기체(superorganism)에 비유된다. 종교도 생활사를 가진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완성되고 번식하며 충분히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죽는다. 생활사의 각 단계에서 종교는 자신의 자양분이 되는 인간들을 반영한다. 종교는 인간 현존의 중요한 규칙을 표현하는데, 삶을 존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이 규칙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적이다. - P442

전형적으로 성공적인 종교는 예찬자 집단으로 시작하여 이교도들에 대해 관용을 보일 수 있게 될 때까지 힘과 포괄성을 증대시킨다. - P442

각 종교의 핵심에는 창조 신화가 있다. 그것은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선민들(그 믿음 체계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중심에 다다르는지를 설명해 준다. 때로는 미스터리, 즉 고차원적인 깨달음의 상태로 힘써 나아간 사제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지침들이나 공식들이 존재한다. 중세 유대교의 카발라(cabala), 프리메이슨주의(Freemasonry)의 삼등급(trigradal) 체계,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의 영목(靈木)에 새겨진 조각들은 모두 이와 같은 비밀스러운 것의 예들이다. - P443

힘은 개종자들을 모으고 추종자들을 집단적으로 결속시키면서 중심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신들에게 말을 걸고 숭배 의식이 거행되며 기적이 목격되는 성지(聖地)가 지정된다. - P443

종교의 신봉자들은 하나의 부족으로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경쟁한다. 그들은 경쟁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말살하고자 하면 거세게 저항한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자를 숭배한다. - P443

종교의 부족주의적 뿌리와 도덕 논증의 부족주의적 뿌리는 매우 유사하여 아마도 동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적 숭배 의식은 매장 의식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매우 오래된 것이다. 매장 의식은 유럽과 중동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출현했는데, 죽은 자를 얕게 판 무덤에 넣고 그 위에 꽃잎이나 황토를 흩뿌렸다. 그 자리에서 영혼들과 신들을 불러내는 의식이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연역과 증거는 도덕적 행동의 원초적 요소는 구석기 시대의 의식보다 훨씬더 오래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 P443

종교는 윤리적 기초 위에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틀림없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도덕적 코드들을 정당화하는 데 늘 사용되어 왔을 것이다. - P443

종교적 충동의 막강한 영향력은 한갓 도덕의 정당화보다 훨씬 대단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흐르는 큰 강줄기로서 폭넓게 퍼져 흐르는 감정의 지류들로부터 힘을 모아들인다. 이들 중 으뜸가는 것이 생존 본능이다. - P443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읊었듯이, "두려움은 지구상에 신들을 만들어 낸 첫 번째 것이었다." - P444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은 영원한 존재를 갈망한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영생을 누릴 수 없다면, 어떤 불멸의 전체에 흡수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짧은 나날이라며 한탄했던 정신과 영혼의 빠른 이행을 어떻게든 영원으로 이어지게 한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괜찮을 것이다. - P444

삶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것은 종교적 힘의 또 다른 원천이다. 교의는 과학이나 예술과 똑같은 창조적 근원에 의지하는데, 이때 그 목표는 물질세계의 신비로운 현상들로부터 질서를 추출하는 것이다. - P444

삶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종교는 부족의 역사에 대한 신화적 서사들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며 우주 속에 우주를 지켜 주는 신들과 영혼들을 거주하도록 한다. 초자연적인 것의 현존은 물론 그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바라는 다른 세계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 P444

종교는 또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맹군인 부족주의를 통해 대단한 권능을 얻게 된다. 주술사들과 사제들은 음울한 운율 속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탄원한다. "신성한 제식들을 신뢰하라. 불멸하는 힘의 일부가 되라. 너는 우리 중의 하나이니라. 네 삶이 펼쳐지는 각 단계마다 너를 사랑하는 우리가 그것을 엄숙한 통과의례로서 표시할 것이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니, 마지막 단계가 완수되면 너는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제2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니라." - P444

만일 종교적 뮈토스(신화 체계)가 문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신속히 창안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신화 체계는 역사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 왔다. 어떤 종에게 있어서든 그와 같은 필연성은 본능적 행동의 표지이다. 즉 설사 학습된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은 감정적 동인을 가지는 정신 발달의 규칙들을 통해 특정 상태들로 나아가게 된다. - P445

종교가 본능적이라고 해서 그 뮈토스의 특정 부분이 허위라는 말은 아니다. 종교가 본능적이라는 말은 종교의 원천들이 일상적 습관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다는 뜻이며 사실상 유전된다는 뜻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가 유전자 속에 암호화된 정신 발달의 편향을 통해 탄생되었다는 말이다. - P445

어떤 사람이 헌신적 믿음과 목적으로 통합된 어떤 강력한 집단 속의 구성원이 된다면, 그는 생존과 번식 차원에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건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전자는 이와 동등한 결의를 하지 못한 경쟁 집단 사람들의 유전자보다 다음 세대로 더 쉽게 전승된다. - P445

집단유전학의 수학적 모형들은 이와 같은 이타성의 진화적 기원 속에 다음과 같은 규칙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이타성 유전자로 인해 발생한 개체의 생존과 번식의 감소를 이타성 덕분에 증가한 집단의 생존 가능성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타성 유전자는 경쟁하는 집단들 전체에서 흔하게 생겨날 것이다. - P445

개체가 대가를 치르면 그 개체의 유전자와 부족이 이득을 얻고 결국 이타성은 확산된다. - P445

종교적 황홀경에 동반되는 감정은 분명 신경생물학적 원천을 가진다. 적어도 한 가지 형태의 뇌기능 장애는 아주 사소한 일상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것들에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는 광적 종교성(hyperreligiosity)과 연결되어 있다. - P446

우리는 마음이 종교적 믿음들을 가지게끔 조성되어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초월론을 기각하지 못하며 그 믿음 자체가 허위임을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 P446

모든 종교적 행동을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대체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신에 대한 믿음의 어떤 측면들은 종교적 행동에 포함된다. 종교적 관례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속죄와 희생은 지배적 존재자에게 복종하는 행위들이다. 이것들은 일종의 지배 위계로서 조직화된 포유동물 사회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이다. - P446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자신의 서열을 과시하고 유지하는 정교한 신호들을 사용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종마다 다양한 양태를 보이지만 넓게 보면 일관된 유사성들이 드러나는 것을 ...(중략)... 볼 수 있을 것이다. -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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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초월론자의 입장을 살펴봤다. 오늘은 이와 대립하는 경험론자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경험론자들은 일단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논리를 펼쳐나가는 점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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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후반부에는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칸트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난해한 건 매한가지다. 읽기는 읽었지만 뭔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건 다행히도 독자인 나만 그랬던 건 아니었나보다. 저자도 본문에서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예 칸트의 철학이 자연 과학적인 관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다소 강도높은 비판도 본문의 글을 통해 스스럼없이 날리고 있었다. 이에 덧붙여 칸트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무어, 롤스 같은 사람들의 견해도 함께 만나볼 수 있었는데, 결국 저자가 이들의 견해에 비판적인 이유는 그들이 자연과학적인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반쪽자리 주장이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일관되게 사회과학이나 종교 분야 등을 비판하는 핵심 논리다.

종교가 인류의 정신에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고 종교적 확신이 대체로 유익하다 - P421

종교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번뇌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망의 자양분이다. - P421

사람들은 종교가 제공하는 확실성을 갈망한다. 신이 모든 인간의 삶ㅡ심지어 노예의 삶마저도ㅡ의 성스러움을 증언하면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왔다가 모든 이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기독교 교리보다 정서적으로 더 강력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 P421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물질주의의 최악의 극단과 마찬가지로 파괴적 측면을 가진다. 역사상 약 10만여 개의 신앙 체계가 존재해 왔다고 추정되며 이중 많은 것들이 민족 간 혹은 종족 간 전쟁을 일으켰다. 특히 서구의 3대 종교들은 수차례에 걸친 군사적 침략과 함께 팽창해 왔다. - P421

종교의 이름이 ‘복종‘을 뜻하는 이슬람은 무력의 힘으로 중동 지방과 지중해 주변, 남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 P421

기독교는 영적인 은총 못지않게 식민지 팽창을 통하여 신세계를 지배했다. 기독교는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 즉 아랍의 이슬람 국가들로 인해 동방 진출에 실패한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던 사건으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이때 십자가는 노예 사냥과 대량 학살을 위한 거듭된 출정에 검을 동반했다. - P422

기독교 지배자들은 초기 유대교의 역사에서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서 이교도들을 깨끗이 몰아내도록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믿음이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말라. 그러니 헷 족, 아모리 족, 가나안 족, 브리즈 족, 히위 족, 여부스 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기> 20장 16~17절, 공동 번역에서 옮김) 100여 개 이상의 도시들이 화염과 죽음에 휩싸였던 이 전쟁은 여호수아의 정벌에서 시작하여 여부스 족속의 예루살렘 성에 대한 다윗의 급습으로 끝났다. - P422

역사적 사실을 들추는 이유는 현재의 신앙들에 대해 비난을 퍼붓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들의 물질적 기원과 또 그것들이 지지하는 윤리적 체계의 물질적 기원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서이다. - P422

모든 위대한 문명들은 정복을 통해 확장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문명들을 정당화하는 종교는 중요한 수혜자가 되었다. - P422

국가가 후원하는 종교의 성원이 된다는 것은 분명 여러 심리학적 차원에서 늘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이었으며, 영적인 지혜는 정복의 시대에 준수되던 야만적인 교의들을 좀 더 완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주요 종교들은 여러 문화들 사이에서 벌어진 다윈주의적 투쟁에서 이긴 승자이며, 그 어떤 종교도 자신의 경쟁자를 용인하면서 번성하지는 않았다. 성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항상 정복 국가의 후원을 받아야 가능했다. - P422

종교적 배타성과 편협성은 부족주의 (tribalism), 즉 자기 부족의 선천적 우월성과 특권적 지위에 대한 신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 P423

부족주의를 종교에 근거하여 비난할 수는 없다. 이와 동일한 인과적 귀결이 전체주의적 이념을 낳았다. 나치즘의 이교도적 신비체(corpus mysticum)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계급 투쟁론은 모두 본질적으로는 무신론 종교의 도그마로서 부족주의에 이바지했으면 했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만일 그 신봉자들이 스스로를 임무에 충실하고 사악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선민(選民)이자 피와 운명의 권리에 따른 정복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나치즘은 그토록 열렬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 P423

메리 윌스톤크래프트(Mary Wollstoncraft)는 남성 우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정곡을 찔렀다. "어떤 남자도 악을 악하기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그 행복은 그가 추구하는 선이다." 이것은 비단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위에 적용될 수 있다. - P423

어느 부족이 남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특히 경쟁하는 다른 부족들과 갈등할 때에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구성원들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동물계 전반에서 볼 수 있는 사회 생활의 제1규칙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집단의 요구에 복종함으로써 생기는 개체 이득의 감소가 뒤따르는 집단의 성공을 통해 생기는 개체 이득의 증가로 상쇄되고도 남을 때 일어난다. 인간의 경우로 치환해 보면 몰락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속한 이기적이고 부유한 사람들이 흥왕하고 있는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심 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대체되는 과정이다. - P423

지상낙원이건 천국에서의 부활이건 간에 미래의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사회적 실존에 있어서의 예속적 명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가 창안해 낸 약속된 보상이다. - P424

집단에 대한 복종과 그 도덕적 코드들은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에서도 반복되며 공식적인 신조와 개인적 신념으로 고착된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규정한 것도 아니고 자명한 진리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유기체들의 생존에 필요한 하나의 장치로서 진화한 것이다. - P424

내가 볼 때 헌신의 유형 중 가장 위험한 것은 기독교 특유의 신앙심이다. 즉 나는 이 세계에 속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제2의 삶을 기다리며 고통ㅡ특히 타인들의 고통ㅡ쯤은 감내할 수 있게 해 주고, 자연환경은 다 써 버려도 된다는 망상을 심어 주며, 신앙의 적들은 잔인하게 다뤄도 좋다고 도닥여 주고, 자살에 가까운 순교를 칭송하게 만든다. 이것은 모두 한갓 환상일까? 글쎄, 그것을 환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회의론자들이 종종 써먹은 지독한 말로 해서 고상한 거짓말이라고 불러야 할지 짐짓 망설이게 된다. - P424

우리는 이 기독교적 헌신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가 그리 강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기도가 질병과 사망률을 줄인다는 통계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정신 작용에 따른 면역 기능의 향상은 가능할지 모른다. 만일 그런 증거들이 있다면 전 세계는 끊임없이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사제가 축복을 빌어 준 두 군대가 충돌하면 한편은 지기 마련이다. - P424

순교자의 정의로운 전뇌(前腦)가 사형 집행인의 총알로 파열되어 그의 마음이 흩어진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과연 수백만의 신경 회로 전부가 어떤 비물질적 상태로 재구성되어 의식적인 마음(정신)이 계속해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424

종말론에서 판돈은 ‘파스칼의 내기‘에 거는 것이다. 즉 잘 살려거든 신앙을 받아들이라는 것.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논증하기를 만일 영생이 있다면 믿는 자는 낙원으로 가는 티켓을 가지게 되고 두 세계(현세와 내세)에서 최선의 것을 얻게 된다. "만일 내가 진다고 해도 나는 별로 잃을 것이 없지만 이긴다면 나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 P425

이제 잠깐 동안 경험론자처럼 생각해 보라. 이런 내기를 슬쩍 피하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만일 두려움과 희망과 이성이 당신에게 신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지시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이 세계를 다룰 때에는 마치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뤄야 한다. - P425

나는 독실한 신앙인이라면 이런 종류의 논증에 대해 분개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분노는 노골적인 이교도(이단자)들을 향해 퍼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껏해야 말썽꾸러기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사회적 질서에 반하는 반역자들에 불과하다. 더욱이 불신자가 동일한 사회 경제적 계급에 있는 신자보다 덜 준법적이고 덜 생산적인 시민이라거나 또는 죽음을 덜 용감하게 맞이한다는 그 어떤 증거도 아직은 없다. - P425

진정한 인격은 종교보다 더 깊은 원천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한 사회의 도덕적 원리들을 내면화한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선택되고 고독과 역경의 시련에 충분히 견딜 만큼 강건한 신조들에 의해 확대된 것이다. 이런 원리들을 우리는 통합성이라고 부른다. 즉 문자 그대로 통합된 자아를 말한다. 이 자아 속에서 개인의 결단들은 선하고 참되게 느껴진다. - P426

인격은 덕의 지속적 원천이기도 하다. 그것은 홀로 우뚝서서 다른 이들의 존경심을 자극한다. 그것은 권위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종교적 신앙과 종종 모순되지 않고 또 그것에 의해 더 강화된다 해도 종교적 경건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P426

과학도 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조직화된 객관적 지식의 축적이며 서로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공통의 이해 속에서 통합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최초의 매개물이다. 과학은 특정 부족이나 종교를 편들지 않는다. 즉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전 지구적인 문화의 기반으로 작용한다. - P426

뇌과학은 정신의 복잡한 기능들을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영적 사유를 구성하는 감정들과 추론들에 대한 물질적인 설명을 뇌과학이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그 어떤 분명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 P426

도덕적 격률들이나 종교적 신념들이 전적으로 정신의 물질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경험론자의 대안적 가정을 고려해보라. 수천 세대 이상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것들은 그 부족의 신앙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생존과 번식 성공 가능성을 높여 왔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감정들을 낳았던 후성 규칙들ㅡ정신 발달의 유전적 편향들ㅡ이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교의(doctrine)를 만드는 능력‘이 하나의 본능이 된 것이다. - P426

윤리적 코드들은 정신 발달의 선천적 규칙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루어진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격률들이다. - P426

종교는 한 민족의 근원과 그들의 운명 그리고 왜 그들이 특정한 제식들과 도덕적 코드들에 동의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의 앙상블이다. - P427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믿음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즉 민족에서 그들의 문화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창출된다. 위로부터, 즉 신이나 다른 비물질적 원천으로부터 문화를 거쳐 민족에 이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 P427

우리는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관해 엄청난 지식을 쌓아 오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현명해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큰 위기에 부딪칠 때마다 초월적 권위에 항복하고 싶은 유혹이 존재하며 아마도 이것은 당분간 더욱더 그럴 것이다. 여전히 교의를 만드는 능력을 지니며 또 여전히 쉽게 신에 매혹되기 때문이다. - P427

경험론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은 순전히 그것이 조장하는 논증 형태의 정서적 결함 때문이기도 하다. 경험론은 냉혹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성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는 확신을 주는 시(詩)가 필요하며, 통과의례를 포함하여 매우 중요한 순간들에 직면하게 되면 자신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갈망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례가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멸(不滅)을 필사적으로 바란다. - P427

민족의 역사는 장엄한 기념식의 중요한 의례 속에 잘 드러난다. 이런 의례들은 성스러운 상징들을 드러내 보인다. 이것은 의례의 지속적인 가치로서 모든 고도의 문명들에서 대체로 종교적인 형태를 띤다. 성스러운 상징들은 문화의 뼈대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것들을 대체하려면 수세기가 걸릴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우리가 숭배하던 신성한 전통들을 포기했다면 비참한 시절을 맞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다소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 P428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신의 가호 아래" 를 빼 버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비극적 오독이다. 무신론자든 독실한 신자든 간에 누구나 성경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맹세를 하게 하고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는 소리가 계속 들리도록 하자. 민간 의례를 진행할 때마다 축복을 내려주십사고 사제, 목사, 랍비에게 기도를 청하고 반드시 머리를 숙여 사회적 존경심을 표하도록 하자. 성찬식 전에 부르는 성가와 청원의 기도가 폐부를 찌르듯 다가올 때, 개별 종파적 신앙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부족(tribe)의 영혼 그리고 신 자체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그러나 이런 경외심을 갖는다고 해서 소중한 자아가 증발되거나 인류의 참된 본성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 P428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힘은 그 어떤 표지든 간에 진리와 지식과 인격 속에 존재한다. - P428

유대-기독교의 신자들은 성경에서 "교만이 사망을 부른다." 라는 말을 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꾸로 되어야 옳다. 즉 파멸이 자긍심을 부른다. 경험론은 이 공식으로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 P428

경험론은 우리가 신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해 신이 피조물의 정점으로서 우주의 중심에 놓은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현기증 나는 이론을 파괴했다. 우리가 하나의 종으로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혼자라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신에게 진 빚을 거의 갚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나 우리의 모든 희망을 좌우하고 있는 지구상의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더 겸손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신들이 있어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이런 발견을 해 내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우리 힘만으로 성취해 내기 시작한 것에 대해 찬탄해 마지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 P429

그(칸트)는 인간이 도덕 법칙을 준수하거나 위반할 수있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도덕적 행위자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감각적 충동들의 강제로부터 독립된 자기 규정력을 지니고 있다." - P429

그(칸트)는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언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정언 명령은 일체의 다른 고려와는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도 선하며 다음과 같은 규칙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동시에 네가 바라는 준칙이 되도록 행위하라." - P430

가장 중요하고 또 초월론적인 당위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 - P430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원인과 결과의 체계인 반면 도덕적 선택은 자유 의지의 문제인데 자유 의지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도덕적 선택을 하거나 단순한 본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의 영역을 초월하여 자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자유의 영역은 유일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허용된다. - P430

하나의 개념이 이해되기 어려운 것은 때로 그것이 심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틀렸기 때문이다. 그의 개념들은 우리가 이제 알게 된 뇌의 작동 기제와 관련된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 P430

그(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관점에 따르면 도덕 논증은 윤리적 원리들을 밝혀내기 위해 심리학이나 사회과학 등을 끌어들일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학문들은 단지 인과적 그림만을 그려 낼 뿐 도덕적 정당화의 근거를 밝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로부터 규범적 당위로 이행하는 것은 논리학의 기초적인 오류를 저지르는 것으로 무어는 이것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칭했다. - P430

존 롤스(John Rawls)는 그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년)에서 다시 한 번 초월론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정의를 태생적 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공정함(fairness)으로 정의하는 매우 그럴듯한 전제를 제시했다. 이것은 삶에 있어 우리 스스로의 지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한 가운데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롤스는 그런 가정을 하면서 인간의 뇌가 어디서 유래했고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공정함으로서의 정의가 인간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으며, 따라서 포괄적인 전제로서 실행가능하다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 P431

20세기도 저물어 가지만 초월론은 종교적 신앙인들뿐 아니라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수많은 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이들은 마치 이전의 무어나 롤스가 그랬듯이 자신들의 사유를 자연과학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길을 선택했다. - P431

"당신은 절대 존재로부터 당위로 나아갈 수 없어. 하나의 유전적 성향을 기술하고 그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유전적 격률로 전환된다고 상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우리는 도덕 논증을 특수한 범주 속에 넣고 필요할 때 초월론적 지침을 사용해야만 하네." - P431

당위가 사실(존재)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윤리적 격률들의 객관적 의미에 주목한다면, 사실을 당위로 번역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P432

윤리적 격률은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신의 계시나 인간 세계 바깥에서 오는 천상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르다. 또 그것은 정신의 비물질적 차원에서 울려 퍼지는 독립적인 진리와도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뇌와 문화의 물리적 산물에 가깝다. 자연과학들에 대한 통섭적 관점에서 보면 윤리적 격률은 사회 계약의 원리들이 규칙들과 명령들로 굳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원들이 다른 이들도 이에 따르기를 바라면서 기꺼이 공동선을 위해 받아들이는 행동 코드들인 것이다. - P432

격률은 공적 감정에 대한 가벼운 찬성에서부터 법률을 거쳐 신성하고 불변의 것이라 간주되는 정전에 이르는 동의의 단계들 중 제일 극단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간음(姦淫)에 적용되면 다음처럼 읽힐 수 있다.

더 나아가지 말도록 하자. 이것은 올바른 것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간음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음은 죄를 지었다는 느낌을 야기할 뿐 아니라 사회로부터 일반적으로 승인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간음을 막아야 하는 다른 이유이다.(우리는 간음을 해서는 안 된다.)

간음은 단지 승인되지 않을 뿐 아니라 법에도 저촉된다. (거의 확실히 간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신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지 말도록 명령하셨다. (우리는 절대로 간음을 해서는 안 된다.) - P432

초월론적 사유에서는 인과의 사슬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즉 종교나 자연법칙에서 주어진 당위로부터 법률 체계를 거쳐 교육으로 내려가고 최종적으로는 개인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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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에 내리면 다크 초콜릿 맛과 은은한 헤이즐럿 향이 느껴지고 나중에 얼음 넣어서 마실 땐 은은하게 위스키 향이 느껴집니다. 묘한 매력이 있는 커피입니다. 다만 물조절을 잘 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물을 가급적 적게 넣고 마시는 게 겉봉에 써있는 맛과 향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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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개체군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개체군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이 자연선택이 안정적으로 일어날 경우 각각의 개체들이 생존과 번식에 최적인 상태인 최적값의 평균에 가까워지는 것을 일컬어 ‘안정화 자연선택‘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이러한 선택에 역행하거나 엇나가는 개체들이 있다면 그 개체들은 생존하거나 번식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서 이 안정화 자연선택이라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이것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시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사회에도 얼마든지 적용해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예로 공무원 집단 같이 비교적 경직된(?) 집단 내에서 남들과는 달리 독특하게 튀기보다는 그냥 무던히 묻어가려는 사람이 많은 현상도 어쩌면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조직전체적으로 봤을 때 바람직한 전략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저 개인의 생존만을 생각했을 땐 괜히 튀는 행동을 하다가 조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낙인 찍혀서 조직생활이 피곤해지거나 또는 그만둬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그냥 대다수의 다른 직원들처럼 무던하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쓸데없이 튀지 않는 것이 조직생활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기주장이 너무 센 나머지 조직의 목표보다 개인의 목표를 앞세운다거나 하는 등의 선택을 할 경우 그 개인의 행복지수는 올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조직으로부터 배제될 위험도 함께 올라갈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조직생활보다는 개인적으로 일해도 무방한 직업을 갖는 게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결국 어떤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하든 아니면 개인 단위로 일을 하든 관계없이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적합한 방식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잘 살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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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 11장 ‘윤리와 종교‘ 라는 제목의 글이 이어진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와 관련한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것은 바로 윤리라는 것이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것인지의 여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저자의 얘기가 인상깊게 다가왔다.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질문에서 윤리라는 것이 원래부터 존재해왔다는 논리가 초월론이고,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논리가 경험론이다. 저자는 이 대립하는 두 논리의 입장을 각 논리의 근거에 입각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개인적으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느 한 쪽의 편만 일방적으로 들기가 참으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각자의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개개인 각자가 스스로 좀 더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논리에 순응해서 그 쪽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성향을 하나로 획일화할 수 없듯이 서로 간에 대립하는 어떤 논리라는 것도 어느 한 쪽으로만 쏠리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것이 우선순위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가 우선하는 가치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가치관이나 생각을 이루는 뿌리가 달라지고 거기서 파생되는 잔가지와 같은 다양한 생각들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각각의 논리에 따른 생각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질 것이고 이는 접점이라는 것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갈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차이에서 시작했지만 그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속성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수학에 나오는 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한 꼭지점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각도로 뻗어나가는 화살표 또는 직선이다. 그 둘은 지향하는 방향이 엄연히 다르기에 어느 한 쪽이 자신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이상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월론과 경험론으로 대변되는 신학과 과학의 경우도 어쩌면 이와 유사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이라는 것이 언제 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궁극에 가서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웃을지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웃을지 지금으로선 아무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을 좀 덧붙이자면 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든 아니면 그 반대이든 간에 그냥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상대방에게 존립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는 선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근데 참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어서 이 문제가 참으로 쉽지 않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인간 사회가 참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고 차라리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고 사는 게 속편하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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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후반부에선 초월론자의 입장을 위주로 살펴봤는데, 다음 포스팅에선 경험론자의 입장을 살펴보겠다.

안정화 자연선택(stabilizing natural selection)이 일어나면 최적값에서 이탈한 경우들은 점점 제거되고 그 최적값이 진화 기간 동안 규준(norm)으로서 유지된다. - P399

"가장 큰(또는 가장 밝은, 또는 가장 잘 보이게 이동하는) 개체를 잡아라." - P400

빼어난 미(美)의 희귀성은 초정상 자극(supernormal stimulus)으로 알려진 현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 P399

사실 아름다움과 연관된 산업 전체가 정상을 벗어난 자극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아이섀도와 마스카라는 눈을 크게 보이게 해 주고 립스틱은 입술을 빛나게 해 주며 연지는 뺨의 홍조를 유지해 준다. 또한 적절한 색깔의 파운데이션은 얼굴 윤곽을 선천적 이상형에 맞도록 부드럽게 재조정해 주고 매니큐어는 혈액 순환이 손끝까지 이르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머리 염색은 머리카락을 풍부하고 젊어 보이게 만들어 준다. 이런 모든 것들은 젊음과 생식 능력이라는 자연적인 생리 신호들을 모방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 P401

의상과 상징적 문양은 정력을 과시하고 지위를 선전한다. 고대 예술가들이 유럽의 동굴 벽에 동물 그림이나 잘 차려 입은 주술사들을 그리기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옷에다 구슬을 매달고 벨트에는 구멍을 뚫고 동물의 송곳니로 머리띠를 장식해 왔다. 이런 증거들은 시각 예술의 캔버스가 본래 인간의 신체 그 자체였음을 보여 준다. - P401

미국의 미학사가인 엘런 디새너예이크는 예술의 일차적 역할이 인간과 동물 그리고 무생물 환경의 특수한 특징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또 항상 그래 왔다고 말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그러한 특징들에 선천적으로 민감하다. 그 특성들은 정신 발달의 후성 규칙들을 탐색해 나가기 위한 가장 좋은 출발점들이다. - P401

예술은 일상적 존재의 외양적 혼돈 상태로부터 질서와 의미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비한 것을 향한 우리의 갈망에 자양분을 준다. 우리는 잠재의식을 넘나들며 표류하고 있는 어슴푸레한 형상들에 마음이 끌린다. 우리는 불가해한 것, 즉 닿을 수 없이 멀리 있는 시공간을 꿈꾼다. 왜 우리는 그토록 미지의 것을 사랑해야만 하는가? 아마도 그 이유는 뇌가 진화했던 구석기 시대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우리가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다고 믿는다. 나는 자연주의자로서 이 형성기 세계의 공상들에 대해 명확한 지리적 이미지를 사용한다. - P401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쉽고 열렬하게 아주 친숙한 영역에서신비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 P402

오늘날은 지구 전체가 우리의 본거지이다. 전 지구적 정보망은 온 사방으로 뻗어 있다. 그런데도 신비한 영역은 없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 영역이 우리 앞마당에서 후퇴했고 어렴풋이 보이던 산 너머로 후퇴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신비의 영역을 별들에서, 알 수 없는 미래에서,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하는 초자연적인 것의 가능성에서 찾는다. - P402

우리 조상들은 두 세계ㅡ알려진 세계와 미지의 세계ㅡ를 통해 인간의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했다. 이 두 세계의 뮤즈, 즉 과학과 예술이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우리를 따라와 탐구하고 발견하라. - P402

칼라하리 사막의 부족들은 사막의 빈약한 자원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계획을 세워야 하고 세심하게 행동해야 한다. 지형과 계절마다 변하는 생태계에 대한 지식은 특히 중요하다. 부족들은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수자원의 분배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임을 알고 있다. - P403

칼라하리 사막의 부족은 대략 50명에서 7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공동생활을 하며 매우 협동적이다. 집단이 1년에도 몇 번씩 모든 소유물을 등에 짊어진 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개인은 생존에 별 필요가 없는 물자들을 축적하는 법이 거의 없다. - P405

집단을 하나로 결속하기 위해서는 예절과 호혜주의가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 P405

칼라하리 사막의 수렵인들은 동물을 철저히 의인화함으로써 동물행동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적하고 있는 동물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 상상도 하고 주변의 세계에 직접 자기 생각을 투사하기도 하며 유추하기도 한다. - P406

수렵-채집인들은 동물의 행동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이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닌 가치들에 기반을 둔 동기들을 통해 동물들의 행동을 감독한다. - P406

각 종은 고유한 행동 습관(kxodzi)의 지배를 받고 자신만의 언어 (kxwisa)를 지닌다. - P406

실제로 문자 사용 이전의 사람들은 물질세계와 비물질 세계의 등가성을 믿고 합리적 설명과 비합리적 설명이 동등하다고 믿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이 각종 신화와 토템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을 어떻게 창안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비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들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 P406

문자 사용 이전의 사람들이 실제로 지각하는 세계는 완전한 자연세계의 작은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원시인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신비한 것을 향할 수밖에 없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족을 비롯한 현대 수렵 채집 부족들의 일상 경험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 주변의 신비한 환경으로 뻗어 나간다. 나무나 바위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고 동물도 생각할 줄 알며 인간의 생각은 몸에서 밖으로 투사되어 물리적 힘을 가진다. - P407

우리 모두는 기대와 달리 여전히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생태계를 유지하는 수천 종의 생물들(동식물과 미생물) 중 겨우 하나 정도나 알까 말까 한다는 점에서 수렵 채집인들과 대학 교육을 받은 도시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우리는 공기와 물과 흙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생물-물리적 힘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심지어 가장 유능한 자연학자의 평생 연구를 집대성해 놓아도 생태계의 희미한 윤곽 이상을 추적하기란 불가능하다. - P407

설명들은 공간적으로는 분자로부터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는 100만분의 1초 단위에서 1,000년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통섭적으로 설명하면 생물 조직의 상이한 수준에 있는 단위들이 재조립될 수 있다. - P408

확장된 시공간 속에서 과학과 예술이 뜨겁게 양손을 맞잡을 수 있다 - P409

정의나 인간의 권리와 같은 윤리적 격률들이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 낸 창안물인가? ...(중략)... 이런 입장들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의 종으로서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완전히 달라진다. 또한 이 선택은 종교의 권위를 평가하고 도덕 논증(moral reasoning)의 방식을 결정한다. - P411

올바른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의 축적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는 도덕 논증이 모든 수준에서 자연과학과 본질적으로 통섭적임을 믿는다. - P412

인간 정신 외부에 도덕적 지침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초월론자(transcendentalist)와 그것들이 단지 인간 정신의 고안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험론자 - P412

종교적 확신과 비종교적 확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윤리적 초월론자의 확신과 경험론자의 확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서 서로 가로질러 교차되는 결정이다. - P412

즉 윤리가 독립적인 것임을 믿는 윤리적 초월론자는 무신론자일 수도 있고 신의 존재를 가정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하게 윤리가 인간의 창안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경험론자 또한 무신론자이거나 창조자로서의 신을 믿을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유태-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입법자로서의 신을 믿는 것은 아니다.) - P412

윤리적 근거의 선택지들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도덕적 가치들(신으로부터 나온 것이건 아니건 간에)의 독립성을 믿는다.

VS.

나는 도덕적 가치들이 오직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일 뿐임을 믿는다. 신은 별도의 문제이다. - P412

의혹과 타협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덕적 행위의 독립적 원리들로 이루어진 자연법 (natural law)이라는 성배 - P413

이 관점(초월론)에 따르면, 인간은 부지런히 논증을 개발함으로써 이 자연법을 발견하고 그 일상적 삶의 과정들속에 엮어 넣을 의무를 가진 존재이다. - P413

「독립선언문」에서 그(토머스 제퍼슨)는 하나의 초월론적 문장 안에 세속적 가정과 종교적 가정을 함께 섞어서 모든 가능성들을 교묘하게 다 포함시켰다.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이 권리들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있음을 자명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미국의 민간 종교의 주요한 전제이자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과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휘둘렀던 정의의 검이었으며, 여전히 미합중국의 다양한 국민들을 한데 결속하는 중심 윤리로서 살아남아 있다. - P413

자연법 이론의 이와 같은 결실이 신성과 함께 호소될 때에는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초월론적 가정이 문제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고상한 성공의 이야기 뒤에는 무시무시한 실패의 이야기가 덧붙여져야 한다. 이 사상은 과거에 악용된 적이 많았다. 예컨대 식민지 정복, 노예 제도, 대량 학살 등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또 저 엄청난 전쟁들이 일어났던 것도 양쪽 편에서 자신들의 명분을 어떤 방식으로든 초월론적으로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P414

"오, 우리는 신의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얼마나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가!" 뉴먼 추기경(John Henry Cardinal Newman)의 탄식이다. - P414

우리는 경험론을 더 진지하게 취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윤리는 사회 전체를 통해 한 가지 코드의 원리들로 표현되기에 충분할 만큼 일관적으로 선호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것은 정신 발달의 유전적 성향ㅡ계몽사상가들의 "도덕 감정(moral sentiments)"ㅡ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서 다양한 문화들을 가로질러 폭넓게 수렴되지만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각각의 문화 속에서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 코드들은 외부인들이 그 선악을 어떻게 판단하든지에 상관없이 어떤 문화가 번성하고 어떤 문화가 쇠퇴하는지를 규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 P414

경험론적 관점의 중요성은 그것이 객관적 지식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윤리적 코드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도덕 감정을 얼마나 현명하게 해석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 코드의 틀을 만드는 사람들은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또 정신이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 P414

윤리의 성공은 또한 다른 행동들과 반대되는 특정한 행동들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은 특히 도덕적으로 모호한 행동일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 통섭을 이루는 많은 지식들이 필요하게 된다. - P415

경험론의 주장은 도덕적 행동의 생물학적 근원을 탐색하고 그 물질적 기원이나 편향을 설명함으로써 이미 없어져 버린 과거의 윤리적 기준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지속성 있는 윤리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한다는 것이다. - P415

초월론과 경험론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존재 유무를 두고 벌어졌던 투쟁의 21세기 버전이 될 것이다. 그 투쟁의 결과는 도덕 논증이 오늘날처럼 신학과 철학의 관용구 속에만 남아 있게 되거나 아니면 과학에 기반을 둔 분석으로 바뀌게 되는 것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어떤 세계관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는가, 혹은 적어도 어떤 것이 올바르다고 널리 인정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 P415

과학적 방법의 핵심은 사실에 기반을 둔 논리를 엄격히 따름으로써 다른 입장에 서 있는 특정 명제들을 거부하는데 있다. - P418

신은 과학을 포섭하지만 과학은 신을 포섭하지 않는다. - P418

과학자들은 특정 주제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다. 그들은 객관적 지식의 범위를 가능한 한 확장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어떤 가설은 받아들이고 다른 가설들은 기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식은 단지 실재의 일부분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 P418

과학적 연구는 놀랄 만큼 다양한 인간의 정신적 경험 전체를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이라는 관념은 모든 것, 즉 단지 측정 가능한 현상뿐 아니라 개인이 느끼고 잠재의식적으로 감각하는 현상들까지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다. 여기에는 영적인 통로를 통해서만 소통될 수 있는 계시 현상도 포함된다. - P418

왜 모든 정신 경험이 양전자 방사 단층 촬영을 통해 눈에 보여야만 하는가? 과학과는 달리, 신의 관념은 우리가 탐색할 수 있는 물질세계 이상의 것에 관계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물질세계 바깥에 놓여 있는 것으로 향하도록 한다. 신앙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에 다다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 P418

만약 자연법칙들보다 더 상위의 힘이 없다면 그 법칙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과학은 이러한 신학적 질문에 해답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 보자. 왜 무(無)가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인간의 이성적 이해를 넘어서 있고, 따라서 경험적 영역 바깥에 있다. - P419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이 관찰했던 대로 신의 지배적 손길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자유는 불행으로 치닫는다. 이 경고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원래 계몽사상가들이 가졌던 권위와 다름없는 권위를 갖게 된다. - P419

"신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을 너그럽게 봐 줘서는 안된다. 인간 사회를 결속시키는 약속, 계약, 맹세 등은 무신론자들에게는 그 어떤 지배력이나 존엄성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사유 속에서조차 없어져 버리면 모든 것이 해체되기 때문이다." _로크 - P419

17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인 로버트 후크(Robert Hooke)는 새로 창립된 왕립 학회 (Royal Society)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왕립 학회라는 본질적으로 계몽적인 조직의 목적은 신학, 형이상학, 도덕, 정치, 문법, 수사학, 논리학 등을 배제한 상태에서 자연물과 인공물(유용한 기술, 제조, 정비, 엔진, 실험을 통한 발명 등)을 개선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 P420

경험론의 극치인 다윈 진화론은 대담하게도 창조를 무작위적 변이와 주변 환경의 산물로 환원시켜 버린다. 공공연히 무신론자임을 자처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조차도 다윈주의에는 절망했다. 그는 다윈주의의 숙명론을 비난했으며 다윈주의가 아름다움과 지성, 명예, 열망 등을 맹목적으로 조합된 물질이라는 한갓 추상적 개념으로 강등시킨다고 힐난했다. 생명에 대한 이처럼 메마른 관점, 즉 인간이라는 존재를 뛰어난 지능을 가진 동물쯤으로 환원시키는 이 같은 견해야말로 나치즘이나 공산주의가 저지른 대량 학살적 참사를 정당화해 줬다고 생각한 저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 P420

시간이 지나고 또한 과학의 역사가 진행되면 새로운 증거가 지배적이던 이론을 뒤집어 왔다. - P420

유신론은 인간의 정신, 즉 감히 말하건대 불멸의 영혼을 설명할 때 강력한 힘을 가지는 이론이다. - P421

과학이 너무 과도한 주장을 하게 되면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신의 물리적 영역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신이 과학자에게 부여한 능력 덕분이다. 과학이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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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달 전에도 큰 선거가 하나 있었고, 그 이전에도 크고 작은 선거들이 있었다. 보통 이런 선거들이 있을 때마다 여러 방송사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각 후보들의 당선 확률을 예측하는 방송들을 많이 하곤 한다. 그 방송들을 보다보면 종종 듣게 되는 고정멘트 중 하나로 ˝신뢰수준은 95%±2.5% 입니다˝ 같은 것이 나온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 멘트의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독자인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여기 나오는 신뢰수준이라는 것은 통계 분석 모델 자체의 정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특정 후보가 당선될 확률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다만 위에 나오는 ± 2.5%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표본 통계상으로 당선될 것으로 예측한 후보가 실제로 당선 되었을 땐 +2.5%만큼 분석 모델의 정확도가 올라가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표본 통계상 당선될 것으로 예측되었던 후보가 실제로는 낙선할 경우 -2.5%만큼 분석 모델의 정확도가 낮아진다는 말이다.

솔직히 오늘 이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신뢰수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몰랐었는데, 오늘 독서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정확히 알게 된 것 같다. 향후에 있을 선거 개표 방송들을 볼 때는 거기에 나오는 데이터들을 좀 더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비단 선거 개표 방송 뿐만아니라 통계분석이 들어가는 다른 어떤 데이터들을 볼 때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잘 아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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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나오는 내용에서 개인적으로 뇌리에 박혔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데이터와 관련된 분야의 집합 구조에 대한 것이었다. 밑줄도 치긴 했지만 정리 차원에서 내가 이해한 방식대로 다시 한 번 적어보자면 빅데이터는 데이터 사이언스의 부분집합이고, 데이터 사이언스는 통계학의 부분집합이고, 통계학은 수학의 부분집합이라는 것이다.

내가 부분집합이라고 표현한 개념을 저자는 본문에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논리구조와 관련이 있다. 보다 상위 개념에서 논리적인 비약과 같은 한계가 있다면 작은 범위 안에서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맞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넓은 범위로 놓고 보면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저자는 데이터 분석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가능하다면 데이터 분석 없이도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추는 게 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데이터 분석이라는 도구는 통찰력과 같은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세부적인 분석으로 들어가서 활용될 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은 2차적인 문제일 뿐 결국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와 같은 본질적인 것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인 듯하다.


그리고 여기 별도로 자세히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에서는 기본적인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몇 가지 사례들이 등장한다. 모기의 개체 수와 모기약 판매량간의 관계 그리고 야구장 치킨 판매량과 팀 성적간의 관계 등이 나오는데, 사례를 통해 독자인 내가 느낀 핵심은 바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두 변수 간의 추세에 비례 또는 반비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상관관계가 있을 수는 있어도 인과관계가 있다고 까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우리가 보통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우는 명제라는 개념에 대입하여 독자들에게 설명해주는데, 어떤 복잡한 수식이 없어도 3단 논법 같은 기본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어떤 결론을 도출하고 그것들을 응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데이터 분석도 결국 기본적인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다면 그저 아무런 의미없는 숫자놀음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오늘 느낀 것을 나만의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는 어떤 그림의 일부분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큰 그림을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려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드론 카메라가 하늘 위에서 지상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며 조망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그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 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출구조사 결과 A 후보가 40%의 득표율로 당선이 예상됩니다. 이 출구 조사는 95%±2.5%의 신뢰도를 가집니다." 선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멘트다. 이 말의 의미는 A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 당선되지 않은 결과를 포함하여 통계를 낼 경우는 92.5% (=95%-2.5%)의 가능성으로, 반대로 실제 당선된 결과를 포함하면 97.5%(=95%+2.5%)의 가능성으로 결과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 P67

신뢰 수준이 99%±0.5%라면 어떤가? 이 선거에서 A후보가 당선된다고 볼 수 있는가? 대답은 역시 "아니오"이다. 여전히 A후보는 당선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당선이 되었을 경우의 신뢰 수준은 99.5%(=99%+0.5%)이고, 당선이 되지 않을 경우의 신뢰 수준은 98.5%(=99%~0.5%)로 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P67

통계의 신뢰 수준은 샘플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샘플의 크기가 작으면 통계값이 사실이더라도 믿을수가 없다. 그 이유는 오차 범위에 따른 변화폭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 P67

어떤 사건의 결과 여부는 그 다음 사건(즉, 미래)의 예측(혹은 분석)에 대한 오차 범위만을 결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 P69

예측한 결과가 맞았으니, 우리의 데이터 분석이 맞다는 식의 논리는 틀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데이터 분석(모델)의 타당성은 해당 사건(혹은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전혀! - P70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데이터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 - P72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주는 수학 이론이 바로 회귀분석 Regression Analysis이다. 회귀분석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의 관계를 추정하는 통계적 기법으로 이를 통해 데이터의 패턴을 이해하고 미랫값이나 결과를 예측하는 데 사용한다. - P72

제대로 된 분석을 위해서는 각 변수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그리고 분석에 필요한 충분한 데이터가 수집되어야 한다. - P73

데이터 분석을 시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각 데이터 변수들(x, y 같은 것들)간의 관계를 알려고 하는 것이지만, 데이터 변수들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가 1차 함수 꼴(선형적)인지, 2차 함수 꼴인지 혹은 그 이상의 함수 꼴인지를 알지 못하면 정확한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없다 ...(중략)... 이것이 바로 데이터 분석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다. - P75

데이터 분석만으로 현상을 보다 보면, 어이없는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 P75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나오는 결과는 변수들 사이에 상관관계correlation를 알려주는 것이지, 인과관계 Causality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 P78

데이터만으로는 변수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석할 수 없다. - P78

데이터 분석이 이러한 한계를 갖게 된 데에는 선형성과도 관계가 있다. 변수들의 관계에서 선형성이 보장될 경우 그에 대한 역함수가 항상 존재한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y = f(x)의 관계가 성립하면 x = g(y)를 만족하는 함수도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 P78

데이터 과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데이터 분석은 이러한 선형성을 전제하고 동작한다. 하지만 실제 자연 현상이나 사회현상은 이러한 선형성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 P78

올바른 데이터 분석을 위해서는 변수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지 않고서도 상식처럼 알 수 있는 포인트는 놓쳐서 안 된다. - P78

변수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인사이트는 데이터 분석 능력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우선하여 나온다 - P79

데이터들 사이의 인과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수학, 물리학에 대한 지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어떤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말빨"(치킨 판매량과 야구 경기력을 빅데이터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기사를 써낸 기자의 말발)이 아닌 "수학적 언어로 묘사(물리)하고, 풀어가는(수학) 훈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P79

수학은 자연 현상의 문제를 풀어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는 언어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영어(혹은 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듯, 많은 과학자들은 수학을 이용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간다. - P80

집합과 명제는 수Number가 아닌 어떤 것Something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동시에 누군가의 논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 P80

절대적인 명제에서 값이 바뀌는 것은 "(기본 혹은 최초) 전제가 바뀌는" 경우 밖에 없다. - P83

집합 사이의 관계로 인해, 빅데이터(A)는 데이터 사이언스(B)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고, 데이터 사이언스는 통계학(C)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통계학은 수학(D)의 한계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 P84

(수학 대비) 통계학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한계는 바로 데이터의 추출(샘플링)이다. 이러한 데이터 추출은 데이터 사이언스의 측정과도 연결된다. 통계학을 적용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데이터가 추출(혹은 측정)되어 수치 형태로 저장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화려한 통계 기법이 있다 하더라도 데이터를 추출할 수 없다면 통계학 적용이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통계학의 한계는 데이터 사이언스(B)에도 심지어 빅데이터(A)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아무리 데이터의 양이 많아지고 현란한 분석 기법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측정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집합들 사이의 관계는 데이터의 속성과 그 속성에 따라 결정되는 한계로 그대로 이어진다. - P85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사실상 거의 대부분) 현상에 대한 성찰이나 통찰은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조건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훨씬 많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으로 간략화하기 힘든 사회라든가 문화라든가 신념이라든가 철학 같은 경우에는 전제조건에 따라 성찰이나 통찰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다. - P85

"서는 곳(조건)이 바뀌면 풍경이 바뀐다" - P86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건과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맞거나(참) 절대적으로 틀린(거짓) 명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 P86

대부분의 명제들은 조건에 의해 답이 달라질 수 있다. - P86

데이터 사이언스(혹은 데이터 분석)를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데이터를 이용하여 어떠한 주장을 하고자 함에 있다. 데이터를 이용한 주장에서 반드시 참인 사실(혹은 명제 혹은 분석)을 두고 이를 거짓이라고 하는 명제 또한 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데이터를 얼마나 화려하게 분석했는지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잘못된 분석이 된다. - P88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떤 이가 데이터를 이용한 주장을 한다고 했을 때, 반박 논리에 반드시 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명제가) 반드시 참인 경우 혹은 반드시 거짓인 경우라면, 데이터의 진실성 여부와는 상관이 없게 된다. - P89

논리적으로 반드시 참(혹은 반드시 거짓)이 된다면 그걸로 수학적인 증명이 끝난 거다. 아무리 데이터 분석을 한다고 해도 더 이상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박은 아무리 데이터 사이언스 할아버지가 와도 절대 반박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데이터 사이언스가 날고 기어도 그 기본 전제인 수학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문제로 정의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분석할 것인지 고민할때는 이 같은 절대 진리를 위배하는 것은 아닌지 잘 따져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단순히 분석 기술을 잘 아는 것과는 다르다. - P89

빅데이터는 아무리 큰 데이터라 하더라도 데이터라는 모집합Superset에 속한 부분 집합Subset일 뿐이다. - P93

빅데이터는 데이터 사이언스나 전산학 혹은 통계학을 하는 입장에서 컴퓨터로도 다루기 까다로운 큰 데이터일 뿐이지 그 이상의 어떤 대단한 무엇도 아니다(빅데이터가 마치 모든 걸 해결해줄것인냥 생각할 필요가 없다). - P94

빅데이터의 가장 쉬운 정의는 현재 자신의)컴퓨팅 파워로 연산하는데 어려운 사이즈나 복잡도를 가지는 데이터를 의미한다. - P94

현재 시대에서 빅데이터로 분류되는 크기의 데이터들도 10년 뒤가 되면 일반 데이터로 분류될 수 있다 - P95

빅데이터는 현재의 컴퓨터 성능으로 다루기에 까다로운 큰 데이터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준 또한 세월에 따라 변한다. 지금의 빅데이터가 불과 몇 년 뒤에는 그냥 개인 PC에서 처리 가능한 수준의 그렇고 그런 데이터가 될 수도 있다. - P96

논쟁에서 데이터가 조작되었다고 논리를 펴기 시작하면, 상대방 또한 같은 논리로 방어를 하기 때문에 오류라고 인정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논쟁은 절대 끝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데이터를 두고 논쟁하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 P98

데이터를 가지고서 논쟁한다고 할 때, 남이 가져온 데이터가 조작된 것처럼 보인다면 필시 내가 가져온 데이터도 문제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중략) 이를 좀 유식한 표현으로 비례적 등가Proportionally Equal라고 한다. 논쟁의 근거가 되는 상대의 데이터가 조작되었다고 말하려면, 내 데이터 또한 조작되었다고 말해야 하고, 내 데이터가 신빙성이 있다(조작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려면, 남이 제시한 데이터 또한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데이터 사이언스적 관점에서도 훨씬 이치에 맞는 일이다). - P99

내가 얻은 데이터가 아무리 높은 신뢰성을 가진다고 해서, 모든 데이터가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P99

수집된 모든 데이터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수집된 데이터가 진실을 밝히는데 충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 P99

데이터에 근거한 어떤 주장(논쟁)을 할 때는 어느 누구라도(어떤 경우에서도) 데이터의 신빙성에 대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나 뿐만 아니라 제 3자(경쟁사든)의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데이터 지상주의나 데이터만이 모든 것을 다 말해줄 거라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특히 내가 수집한 데이터에 있어서는 더더욱). - P99

"데이터는 주장이나 사실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크게는 데이터 수집에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수집에서의 한계는 무엇보다 모집단의 수가 크면 클수록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의미한다. - P101

표본 추출sampling (중략) 모집단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표본을 추출하고 그 데이터를 이용해 통계 지표를 구하는 방법 - P101

샘플링 기법은 상당히 유용하지만 추가적인 문제를 일으키는데, 바로 "데이터 수집의 객관성"이다. 이는 데이터 자체의 객관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즉, 데이터 자체의 객관성‘은 "데이터를 조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데이터 수집의 객관성‘은 "샘플링 데이터가 객관적이다"를 의미한다. - P101

자신의 주장이 혹은 어떤 사실이 맞다는 것을 뒷받침하려고 데이터를 조작하는 경우, 이는 엄연한 범죄 행위가 되며 조작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반감을 사게된다. 하지만 표본 추출을 객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데이터 조작보다 표본의 객관화에 대해서 훨씬 관대하다. - P102

통계를 전공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중략) 미래 예측과 모집단 분석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빅빅빅빅데이터가 있다 하더라도 실현 불가능하다. 지금도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 P103

치약의 주성분에 속하는 불소는 기체화(혹은 분자화)해서 흡입할 경우 아주 극소량이라도 사람을 죽게 (한다) - P106

데이터가 거짓 없이 사실을 기반으로 객관적으로 수집되었다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듣는 사람의 타성(이라 쓰고 "느낌"이라 읽는다)에 따라 그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데이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데이터를 사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성의 문제이다. - P106

요즘 세상은 감성을 중요시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한다. 다만 필자의 관점에서 봤을 땐,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논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물리학적 소양)과 그렇게 바라본 세상을 논리에 맞게 풀어가는 능력(수학적 소양)(이 둘을 합쳐서 "과학적 소양"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이러한 과학적 소양이 빠진 인문학은 진짜 인문학이 아니며 이런 사회는 구성원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똑똑한 존재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 P107

우리가 빅데이터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많은 양의 데이터를 통해서 시장을 예측하고, 경제를 예측하고, 소비자의 성향을 예측해서 더 정확한 미래 전략을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슈에 대한 인과관계를 데이터를 이용해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108

빅데이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데이터 과학에 대한 기본 지식(통계학, 컴퓨터과학, 과학적 소양, 물리학적 소양 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빅데이터는 단순히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 P109

데이터 과학은 데이터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러한 정량화(혹은 수치화)된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사용되는 학문이 바로 통계학statistics이다. 따라서 데이터 과학에서 사용하는 기법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용되는 분석 기법들은 통계학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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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8-13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이 밑줄로 뽑아 주신 글 내용을 예전에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8-13 17:31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그냥 신뢰수준이라는 용어만 예전에 한 번 들어보고 그 의미에 대해선 정확히 몰랐었는데 오늘 독서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잘 몰랐던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도 독서의 유익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