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꿈의 다른 정황은 흐릿해 잡히지 않고, 하얗고 목이 긴 새 한 마리가 마른 땅 위에 서 있던 것만 떠올랐다. 새가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부터 흰 빛이 빠져나갔다. 내 눈앞에서 새의 목 아래까지 투명해졌다. 흰 날갯죽지로 덮인 몸뚱이 아랫부분과 가늘고 긴 두 개의 다리만 남았다. 이제 더 노래하면 완전히 투명해지겠구나, 생각하다 눈을 뜨자 깊은 밤이었다. - P7
나는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유리잔을 들어 그의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을 수 있었다. 유리잔을 깨고 예리한 사금파리로 그의 목을 겨눌 수 있었다. - P14
인주는 언제나 자신의 그림 귀퉁이에 굵은 8B 연필로 구슬 주(珠) 자를 썼어요. 그 먹그림에 서명이 없는 건, 그걸 그린 사람이 그런 행위를 싫어했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완성해놓고도, 그게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믿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P15
태연한 거짓말들을 키보드에 두드려갔을, 지금 담배를 집고 있는 그의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손가락들을 차례로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나는 말했다. - P15
기다리는 답신은 오지 않았다. 내가 보낸 메일의 수신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메일을 보낸 뒤 사흘 동안 나는 수없이 컴퓨터를 켰다 껐고, 그때마다 몸속에서 무엇인가가 함께 켜졌다가 캄캄해졌다. - P16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침묵할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을 갖기 위해서다. - P17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 P17
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우리 은하와 같은 나선은하들의 원반에는 젊은 별들과 밝은 구름 덩어리들이 실들에 꿰어져 돌고 있는 듯한 모습의 나선팔들이 있다. 이 나선팔들에서 지금도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있다. - P17
이미 태어난 뜨거운 별에서 나오는 강한 빛이 주위의 물질을 밀어붙인다. 늙은 별이 터지며 나온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간구름을 수축시킨다. 자극받은 성간구름은 계속 수축한다. 이 수축된 성간구름이 별이 되기 위해서는 구름의 질량이 일정한 값보다 커야 한다. 이것이 중력수축에 필요한 ‘진스의 임계질량‘이다. 구름의 질량이 임계질량을 넘어서는 순간 별의 일생이 시작된다. - P18
초신성이 폭발하면, 그 은하를 구성하는 10억 개의 별들의밝기를 합한 것만큼의 빛이 수일 동안 방출된다. 지구가 속한 은하에서 초신성이 폭발했던 15세기의 기록들은 밤마다 그 빛으로 책을 읽올 수 있을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 P18
흰 점 같은 별들 위로 거대하고 둥글게 퍼져나가는 불꽃을 나는 들여다본다. 붉으면서 푸르고, 희면서 검다. 죽음이면서 시작이다. 늙은 별이 폭발한 바로 그 에너지로, 희부연 성간구름들 속에서 새 별이 태어난다. - P18
나를 놓고 싶지 않다. 지금은 나를 놓아서는 안 된다. - P17
......인간에게는 느껴지지 않지만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씩,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돈다. 적도 위에 있는 사람은 초속 460미터로 지축 둘레를 회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동시에 지구는 한 해에 한 바퀴씩, 초속 3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인간이 만든 어떤 로켓보다 빠르게 지구는 우주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천체들은 이와 같은 숙명적인 반복운동을 하고 있다. - P19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 태양 역시 우리 은하의 중심을 축으로 공전한다. 태양의 공전 속도는 초속 250킬로미터다. 우리 은하에는 별들이 1천억 개쯤 있는데, 원반에 있는 별들은 모두 태양과 비슷한 속력으로, 같은 시계 방향으로 공전한다.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으로부터 8천 파섹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약 2억 년 뒤에 우리 은하를 한 바퀴 돌고 현재의 자리로 되돌아올 것이다. - P19
12킬로미터 높이의 대류권과 그 너머의 성층권, 열권을 합한다 해도 대기권의 높이는 고작 450킬로미터,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에 불과하다. - P20
나에게 중요한 건 그리는 순간이니까. 그게 전부니까. - P28
이해하기 위해 나는 거기 서 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 때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 대상을 보고, 들여다보고, 또 본다. 대체 이것들은 뭘 의미하는 건가. 이 작업들에 바쳐진 인주의 일 년은. 마지막이 되어버린 일 년은. - P30
이 그림들의 사진을 보여주면, 홀치기염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판화가 아니냐고 묻기도 하고, 물방울의 입자를 찍어서 한지에 감광액을 발라 인화한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P31
소금이나 세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럼 어떻게? 먹과 물만으로 가능해요. 먹이 마르기 전에 물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먹이 번져가게 하는거란 말입니까? 세제나 소금, 아교를 쓰지 않으면 불가능할 텐데요. 아니요. 먹과 물의 농도가 다르니까, 삼투압의 원리와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면...... 이만큼, 이 손바닥만큼 번져나가는 데 열흘이 걸려요. 그러니까 저만한 크기의 그림이 완성되려면 두 달에서 석 달쯤 걸렸을 거예요. 전문가들의 생각과 다르군요. 식물이 자라는 속도와 비슷한 거라고 했어요. - P32
그것들은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지 증거가 되지 않아요. - P33
그 사람의 방식으로 이해한 거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 P33
.....당신에게, 그걸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 P33
책을 쓴 건, 그게 나에게 남겨진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쓴거라고 할 수도 있어요. 내가 설령 그 여자의 삶을 왜곡한다 해서, 그 여자가 살았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 P34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냉정하게 생각하기 위해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 P35
그는 매우 논쟁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다. 긴 대화가 오가는 동안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고, 공격적이면서도 침착했고, 확신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가 평생을 헤쳐나올 수 있었던 무기이자 연장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세 치의 혀와 능란한 글. - P36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는 인주를 사랑하고 있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도. - P36
안 됩니다. 그는 갑자기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안 됩니다. 그 순간 나 역시 그를 이해했다. 그의 고통을. 숨겨진 집착을. 더이상의 요구는 불필요했다.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나가지요. - P37
모든 도시들, 국경선과 흙과 바다, 숲과 골목과 시궁창, 무덤과 개들, 나무들, 연인들, 감옥, 전쟁터, 교실과 극장, 장례행렬, 덜컹거리는 지하철, 고함치는 노천 시장 들은 450킬로미터의 대기권 안쪽에 있다. 더러 융기하고 더러 가라앉은 지각 위에 넓거나 좁은 무수한 도로들 틈에, 450킬로미터의 납작한 두께 안에 삶이 펼쳐져 있다. - P38
납작함 속에서 치열하게, 납작함 속에서 안이하게, 납작함 속에서 웃고 말하고 병들고 춤춘다. 납작한 세계의 안쪽을 땀 흘리며 껴안는다. 죽음의 순간까지, 아니, 죽음 뒤에도 육체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다만 시선과 생각들, 의식들만이 이상한 생명처럼, 혼령처럼 성운 사이의 텅빈 어둠 속을 헤엄쳐 다닌다. - P39
이제는 아니지・・・・・・보이저호가 있으니까. 1978년 우주 공간으로 진수된 보이저호가 해마다 보내온 사진들이 신문들과 과학잡지에 컬러 화보로 실리면, 삼촌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오려 작업실 책상 앞에 붙여놓곤 했다. 그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감동이나 충격을 받은 일은 오히려 되도록 말하지 않았다. - P39
앞으로 오십 년 안에 보이저호는 태양계를 벗어날 거야. 그때부턴 별들 사이의 무한하고 텅 빈 공간 속으로 끝없이 나아가겠지. ・・・・・・그렇게 은하의 중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쯤이면, 지구에선 수억년이 흘러 있겠지. - P39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글을 시작할때만은 종이에 쓰는 것이 희곡을 쓰던 때의 버릇이었다. - P40
소박하게 살면 빠듯이 살아질 만큼의 수입이란, 불필요한 욕망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편안한 것이었다. - P40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백지 앞에 앉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를. 쓰레기 위에 덮인 눈 같은 생활의 고요가 물기와 썩은 고깃점들에 뒤범벅이 되는 순간의 예감을. 그러나 지금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팔 년 만에, 백지 위에 무엇인가를 쓰려고 한다. - P40
어떻게든, 강석원의 글과는 전혀 다른 것을. 전혀 다른 사실들을. 분명한 건 하나뿐이다. 내 말들은 그의 말처럼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 일사불란하지 않을 것이다. - P41
나는 더듬을지도 모른다.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내 말들로 그의 말에 부딪칠 거다. 부서질 거다. 부술 거다. 조각조각 부수고 부서질거다. - P41
생명이 타들어간다고 느낄 때 물을 마시게 되는 것은 물이 생명이기 때문일까. 몸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 P41
내일 인주의 방으로 갈 것이다. 열쇠 수리공을 불러 새로 열쇠를 맞춰서라도 들어갈 것이다. 삼촌의 그림을, 아니, 인주의 그림을 볼 것이다. 이해하려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으면 쓸 수 없기 때문이다. - P42
지금은 여기서,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원히 연장되는 시간을, 정적을 견뎌야 한다. - P42
고대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젊은 신 마르두크는 모든 신들의 어머니 티아마트ㅡ혼돈ㅡ를 죽인 뒤 그 몸통을 반으로 갈라 하늘과 대지를 만들고 머리로 산과 강을 만든다. - P43
몽고의 신 오치르바니는 태초의 바다에 사는 뱀ㅡ혼돈ㅡ로순을 잡아 우주의 중심인 수메르 산에 세바퀴 감고 머리를 부숴버렸다고 전해진다. - P44
중국의 반고 신화에서는 오랜 세월 잠자던 거인 반고가 태어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근원인 알을 깨뜨리는데, 맑은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한 것은 가라앉아 땅이 된다. 후대로 내려와 장자에 이르면 혼돈은 숙과 홀이 뚫어준 일곱 개의 구멍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 P44
붉은빛의 불덩어리 새든, 태초의 바다에 사는 뱀이든, 근원의 알이든 혼돈은 죽는다. 머리가 부서지고, 깨뜨려지고, 구멍이 뚫려 죽는다. 그 죽은 몸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초목과 짐승들이 태어난다. - P44
우주의 시작은 양자역학적인 물리량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뒤를 따질 수 있는 고전적인 시공간은 태초 이전에는 무의미하다. 고전적인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주의 에너지는 0이지만, 시공간은 양자역학적 혼돈 상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확률적 순간, 에너지의 벽을 뚫은 시공간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적용된다. 오랜 혼돈이 갈라지고 천지가 창조되는 짧은 시간, 우주는 급팽창하고 물질이 생성된다. 놀랍도록 신화에 가깝게, 플랑크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10^‐43초, 그 찰나의 찰나에. - P44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 해. - P45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 P45
큰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친밀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이 사람은 말했어. 작은 그림을 그린다는 건, 스스로를 경험 밖에 두고 거기서 그 경험을 환등기나 축소경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했지. 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면,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서 어떤 것도 한눈에 볼수 없게 된다고 했어. - P46
도록을 넘겨갈수록 로스코의 색채들은 어두워졌다. 말년의 그림들은 짙은 푸른빛과 검정, 회색, 진한 갈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분할된 화면들은 어두운 정신과 더 극단적으로 어두운 정신의 끈질긴 대비처럼 보였다. 그 사이사이로, 불안할 만큼 밝고 생경한 색채의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 P46
얼핏, 그의 죽음을 즈음해 형성되고 있었을 내 첫 세포를 생각했다. 어머니조차 모르는 사이 연붉은 자궁안에 막 한 점으로 맺혔을 그것을. 바로 그 무렵, 북반구의 2월 하순, 차가운 흙 속에서 아직 썩지 않았을 그의 손을. - P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