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 P109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 P109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 P110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 P110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 P111
삽시간에 저고리를 태운 불이 치마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봤다. 무명 치마의 마지막 밑단이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연기로 지은 저 옷을 날개옷처럼 걸쳐주기를. 말 대신 우리 침묵이 저 연기 속으로 스미고 있으니, 쓴 약처럼, 쓴 차처럼 그걸 마셔주기를. - P121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 P122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 P127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 그 대답은 사태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 - P132
질문은 어떤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대답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질문을 해소하는 진술 속에 있지 않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그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데, 바로 그 ‘변화‘ 안에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되고마는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 P132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히려 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질문을 숙고하던 사유가 끝낼 수 없는 사유의 운동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의 운동을 중단한 순간이 될 수 있다. - P133
인간적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결국 저마다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폭력으로 얼룩진 어떤 끔찍한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가 더이상 인간이 아니기를 바랄 때에만, 인간적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몸짓을 진지하게 수행할 때에만, 간신히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할 수 있다. - P133
"되기(=생성)는 결코 관계 상호 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이 되기는 자기 자신(생성 그 자체ㅡ인용자)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ㅡ자본주의와 분열증 2』 - P134
"말과 침묵, 어둠과 빛, 꿈과 생시, 죽음과 삶, 기억과 현실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사이에만 있을뿐 아니라, 그것들을 안팎으로 둘러싸며 가득차 있다. 내 말들이 그 공간을 진실하게 통과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 P134
두 요소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탐구가, 거기에서부터만 물어질 수 있는 어떤 질문들이, - P134
왜 죽으면 안 되는 걸까? 왜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다른 존재자들을 그리고 다른 인간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며 상처주는 것을 동반하거나 최소한 그런 사태 전반을 외면하는 것인데도. - P135
『채식주의자』 안에서도 이미 질문은 변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인간적 상황이 인간 이외의 것들을, 심지어 다른 인간들을 파괴하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능한가?‘ , 그리고 나중에는 ‘그러나 인간적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윤리적 몸짓은 다만 죽음으로 귀결되는가? 그 결론을 우리는 수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왜 죽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가? 윤리적 몸짓 안에서 우리가 인간적 삶을 껴안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 P136
‘살아 있으라! 너의 삶을 거둬가고 대신에 평화로운 휴식인 죽음을 선물할 나무는 세상에 없다. 너의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 있으라!‘ - P138
우주의 모든 물질은 본래 하나였으며 동일한 중성자가 양자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다른 물질이 되었던 것뿐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기로 하자면, 우리 모든 존재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아무리 볼품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이미 0이었고 무한이었다. - P140
이동주의 먹그림,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했던 서인주의 작업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 불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바람, 그 바람의 결마다 맺혀 있는 에너지의 실핏줄을 재현하며 무한의 춤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P141
무한의 춤에 연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하며 그 춤을 이어서 추기 위해서, 비가시적인 그 바람을 향해, 그 바람에 관통당하며 나아가라는 명령이 그들의 작품에서 울려나오며 이 소설의 제목(바람이 분다, 가라)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이동주와 서인주의 먹그림에서 생명의 불꽃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불꽃에 힘입어 우리 안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141
삶은, 세계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어서,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 P143
우연히 허락된 아슬아슬한 삶의 가능성은 언제고 허물어질 듯 위태롭고, 그 위태로움은 무엇으로도 해결 불가능하고, - P143
『희랍어 시간』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이해 속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삶을 수락하고 선택하더라도 ‘그것‘(삶의 척력? 죽음의 인력?) 앞에서 인간은 다시 침묵과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는 것이다. - P144
이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고자 했다. 군인들의 총에 맞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듯 그 죽음에 온 힘으로 마음쓰면서, 어찌해볼 수 없는 일에 자신의 삶을 걸었거나 삶의 경로를 이탈시켰다. - P150
그들이 한 일은 그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 인간적인 어떤 것을 보존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권력이 ‘인간이란 죄책감 없는 폭력 그 자체이거나 폭력 앞에 굴복하는 냄새나는 몸뚱이일 뿐‘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할 때,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 P150
인간이 그런 식으로 훼손될 수는 없다, 인간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훼손될 수는 없다고 항의하고 있는 한에서, 동호가 자기 책임이 아닌 정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한에서, 은숙과 선주가 자기 책임이 아닌 동호 혹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한에서, 그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며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희생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인간적 삶을 힘겹게 그러나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 P151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 P151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P152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는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결핍으로 인해서 타자의 이의 제기와 부인에 노출되고, 절대적 내재성 (혹은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포기할 수 있다. 바로 그 노출과 포기 속에서, 타자에 의해 나의 실존이 근본적으로 부단히 의문에 부쳐지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결핍은 충만함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로 이어진다. 이 초과를 위해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152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질 뿐이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절대적 내재성에 대한 환상 속에서 "스스로 자기 고유의 자기 동일성과 자기 결정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거기에 겉으로 보아 온전할 뿐 가장 병적인 전체주의의 기원이 있다." - P153
어떤 타자가 가장 강력하게 나에게 이의 제기하고 나의 자리를 부인해서 내가 스스로를 초과할 가능성을 이끌어내게끔 하는가? 죽어가는 타인이. - P153
죽어가는 타인 앞에서,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P153
죽어가는 타인과의 마주침, 나의 실존에 대한 이의 제기에의 노출, 인간의 결핍은 개인적 결단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원리로 놓여 있다고 - P154
"영원히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마지막 기도는 죽은 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오와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히 등을 돌리지 않고자 하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역설적으로 회복을 향하는 기도가 돼요. 자신을 허물고 자신 밖으로 간절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자의 기도라는 점에서요." - P155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차원이 있겠는가? 언제나 이미 도래하는 소년과도 같은? 그것을 전제한 뒤에야 비로소 인간적 삶을 껴안을 수 있는?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차원은 어떤 것인가? - P155
노랑부터 파랑까지의 색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색들이 칠해질 수 있는, 아직 칠해지지 않은, 어떤 텅 비어 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새하얀 캔버스와도 같은. 캔버스의 ‘흰‘은 그러므로 노랑, 검정, 빨강, 파랑과 같은 여타의 색깔과 대등한 색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색이고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색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소리들을 가능케 하는 소리의 잠재태인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 P157
"흰색은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인 것이다. (......)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의 무요, 태어나기의 무인 것이다." - P158
모든 ‘존재자‘들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개방하는 ‘존재‘의 차원이 앞서야만 한다고 할 때, 바로 그 ‘존재‘가 이를테면 ‘흰‘빛이다. 그러므로 ‘흰‘은 단순한 하얀색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그것의 밑바닥 어디에선가 잠재태의 색채들이 현실화의 표면을 향해 우글거리며 올라오는 중이다. - P158
희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얼룩덜룩한 유령들이 결코 드러나지 않을 눈빛을 한 채 산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흰‘은 하얗지 않고 순수하지 않고 잡(雜)하다. - P158
다른 얼룩들 틈에서라면 잘 보이지 않았을 작고 희미한 얼룩도 그 얼룩 본연의 색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너무 쉽게 얼룩지는 배경색이 ‘흰‘이다. 그러나 무슨 색으로 얼룩지게 하든 ‘흰‘은 계속해서 다른 색들을 칠할 수 있게 하는 궁극의 가능성의 심층이며, 모든 소리들을 가능하게 하는 침묵이자, 무엇인가를 태어나게 하는 무. 소진시킬수 없는 여백이다. 그것은 너무 쉽게 훼손되고 마는 것이지만 결코 완전히 훼손시킬 수는 없는 근본적인 차원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 P159
물론 인간은 끝없이 훼손되고 끝없이 더럽혀질 수 있지만 언제나 끝없이 그 위에 다른 윤곽선을 그리고 다른 색을 칠해볼 수 있는 ‘흰‘의 차원이 있다고. 그 ‘흰‘의 차원에서 살아남기를 선택한 자들이 삶으로부터 내팽개쳐질 수 있는 만큼 그와 반대로 죽어가는 타인에게 온 힘으로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고. - P162
‘흰‘은 언제나 흘러넘치는 과잉으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적대적으로 차갑게 인간의 현존의 문장들을 여백 속에 빠뜨리고 지우고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현존이 다시 비롯된다. 그것이 ‘궁극의 가능성‘이다. - P163
인간은,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있지만 않다면, 그의 현존을 가지고 이 궁극적 가능성과 충돌한다. 무규정적이라기보다 초규정적으로 충만한 궁극적 가능성은 그가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언제나 그곳을 향해 가는 그의 본래적 미래, ‘앞선 거기‘(Vorbei)다. - P163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시간은 그저 중립적으로, 기계적으로, 시계가 째깍거리며 흘러가듯, 미래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궁극의 가능성인 ‘앞선 거기‘를 향해 달려나가려 할때, 그 ‘앞선 거기‘가 그의 일상과 부딪히고 그로 하여금 그의 일상을 다르게 보게 하며 그것에 이의 제기하게 하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이탈하게 하는 한에서만 시간은 흐른다. - P164
인간의 본질이 그 자신의 궁극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나가는 데 있다면, 인간이 곧 시간이다. - P164
"앞서 달려감에서 현존재(인간ㅡ인용자)는 그의 장래로 존재하며 나아가 현존재는 이 장래적 존재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로 되돌아간다. 그의 궁극적 존재 가능성에서 파악된 현존재는 시간 그 자체이다. 현존재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현존재이다." - P164
(하지만 일상에 매몰된 인간들은 그 자신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중략)... 그들이 알고 있는 ‘시계의 시간‘은 전혀 시간이 아닌데도, 오직 그것만이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상인들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시간이 아닌 시계의 시간을 ‘시간‘으로 부르는 대신 본래적인 시간은 ‘시간의 바깥‘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 P164
‘존재‘의 차원, 즉 ‘흰‘을 사유하는 것은 ‘시간‘을 사유하는 것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흰‘의 공간에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것(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 자신의 현존을 잃고 우리 자신을 초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런데 그것이 궁극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일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거기에 대번에 시간의 문제가 개입한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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