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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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처럼 ‘흰‘ 것과 관련된 다양한 키워드들을 소제목으로 하여 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나 에피소드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저자의 실제 가족사史와 관련된 얘기들이 실려있기에 본문에 나온 내용들이 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뒷부분에 수록된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한강 작가님이 그동안 써왔던 여러 작품들을 보다 더 심도있게 바라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맨 뒤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통해 《흰》이 나오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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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평론가가 ‘시간‘의 진정한 의미와 그 본질에 대해 잠시 언급했었는데,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진다. 책에는 직접적으로 나와있진 않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불가역성‘ 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이 시간이 가진 대표적인 특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평론가는 이러한 ‘시간의 불가역성‘으로 한정지어 생각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의 시간에 대해서도 추가로 언급한다. 이는 다소 철학적인 개념이라 이해하는 것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본문을 따라 쭉 읽어나가다보면 평론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부분은 철학자 하이데거의《시간개념》 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평론가가 평론한 것인데, 한강 작가의 작품을 한층 더 심도있게 바라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확실히 평론가가 바라보는 관점이 나같은 일반인들과는 그 깊이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 - P165

현재의 살아남은 자가 회복되는 것은 과거의 죽어가고 있던 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현재의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소년이 오는 것이다. 소년의 도움으로 인간은 본래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시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키는 것이다. - P166

우리는 시계가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의 바깥에서 과거와 만날 수 있으며 이 만남을 통해서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 P166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 P166

죽은 자의 도움으로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끌어안으며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궁극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본래적 시간으로 뛰어드는 것,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 일상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시간의 바깥에 있는 것이니까. 시간의 바깥에서 시계는 멈추고 눈 한 송이는 전혀 녹지 않는다. - P167

달콤한 것을 먹여 사랑스럽게 보살펴도 우리 육신은 반드시 무너지고, 비단으로 감싸 곱게 보호해도 목숨에는 끝이 있네. _원효 스님의《발심수행장》 - P173

와지엔키 공원의 숲길을 목적 없이 걸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흰》이란 책에 대해, 그렇게 걸으며 생각했다. - P174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 P174

1944년 구월 시민 봉기 이후 히틀러가 본보기로 절멸을 지시했던 도시, 폭격으로 95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 부서진 흰 석조건물들의 잿빛 잔해만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던 칠십 년 전의 그 도시 - P175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 이 책이 나에게 숨처럼 불어넣어준 것 - P176

우리 안의 깨어지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어떻게 훼손되지 않는 부분을 믿어야 했다ㅡ믿고자 할 수밖에 없었다ㅡ.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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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화자의 가족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본문에서 화자의 어머니는 첫 딸아이를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낸 이듬해에 두번째로 사내 아기를 조산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달수를 못 채우고 나온 아이는 얼마 뒤 죽었다고 한다. 화자는 이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전에 낳았던 딸과 아들이 만약 죽지 않고 다 살아남았다면 자신과 자신의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덧붙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러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하여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뭔가 안타깝기도 하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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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다 끝나고 난 뒤에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이《흰》뿐만 아니라 한강 작가가 그동안 출간했던 다른 작품들까지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서 작가님의 작품들이 시사하는 것들을 보다 심도있게 논한다. 개인적으로는 요근래에 거의 다 읽어봤던 작품들이라 해당 작품들을 읽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서 그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하는 어떤 메시지나 질문들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추가로 독자인 내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책들에 나온 심도있는 생각들을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통해 그것의 일부라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나의 지경을 넓혀주었다. 설령 내가 아무리 고민하더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정말 유익했다.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 P109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 P109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 P110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 P110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 P111

삽시간에 저고리를 태운 불이 치마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봤다. 무명 치마의 마지막 밑단이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연기로 지은 저 옷을 날개옷처럼 걸쳐주기를. 말 대신 우리 침묵이 저 연기 속으로 스미고 있으니, 쓴 약처럼, 쓴 차처럼 그걸 마셔주기를. - P121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 P122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 P125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 P127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 그 대답은 사태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 - P132

질문은 어떤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대답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질문을 해소하는 진술 속에 있지 않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그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데, 바로 그 ‘변화‘ 안에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되고마는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 P132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히려 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질문을 숙고하던 사유가 끝낼 수 없는 사유의 운동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의 운동을 중단한 순간이 될 수 있다. - P133

인간적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결국 저마다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폭력으로 얼룩진 어떤 끔찍한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스스로가 더이상 인간이 아니기를 바랄 때에만, 인간적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몸짓을 진지하게 수행할 때에만, 간신히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할 수 있다. - P133

"되기(=생성)는 결코 관계 상호 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이 되기는 자기 자신(생성 그 자체ㅡ인용자)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ㅡ자본주의와 분열증 2』 - P134

"말과 침묵, 어둠과 빛, 꿈과 생시, 죽음과 삶, 기억과 현실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은 사이에만 있을뿐 아니라, 그것들을 안팎으로 둘러싸며 가득차 있다. 내 말들이 그 공간을 진실하게 통과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 P134

두 요소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탐구가, 거기에서부터만 물어질 수 있는 어떤 질문들이, - P134

왜 죽으면 안 되는 걸까? 왜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다른 존재자들을 그리고 다른 인간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며 상처주는 것을 동반하거나 최소한 그런 사태 전반을 외면하는 것인데도. - P135

『채식주의자』 안에서도 이미 질문은 변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인간적 상황이 인간 이외의 것들을, 심지어 다른 인간들을 파괴하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능한가?‘ , 그리고 나중에는 ‘그러나 인간적 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윤리적 몸짓은 다만 죽음으로 귀결되는가? 그 결론을 우리는 수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왜 죽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가? 윤리적 몸짓 안에서 우리가 인간적 삶을 껴안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 P136

‘살아 있으라! 너의 삶을 거둬가고 대신에 평화로운 휴식인 죽음을 선물할 나무는 세상에 없다. 너의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 있으라!‘ - P138

우주의 모든 물질은 본래 하나였으며 동일한 중성자가 양자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다른 물질이 되었던 것뿐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기로 하자면, 우리 모든 존재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아무리 볼품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이미 0이었고 무한이었다. - P140

이동주의 먹그림,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했던 서인주의 작업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 불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바람, 그 바람의 결마다 맺혀 있는 에너지의 실핏줄을 재현하며 무한의 춤을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P141

무한의 춤에 연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하며 그 춤을 이어서 추기 위해서, 비가시적인 그 바람을 향해, 그 바람에 관통당하며 나아가라는 명령이 그들의 작품에서 울려나오며 이 소설의 제목(바람이 분다, 가라)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이동주와 서인주의 먹그림에서 생명의 불꽃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불꽃에 힘입어 우리 안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141

삶은, 세계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어서,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 P143

우연히 허락된 아슬아슬한 삶의 가능성은 언제고 허물어질 듯 위태롭고, 그 위태로움은 무엇으로도 해결 불가능하고, - P143

『희랍어 시간』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이해 속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삶을 수락하고 선택하더라도 ‘그것‘(삶의 척력? 죽음의 인력?) 앞에서 인간은 다시 침묵과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는 것이다. - P144

이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고자 했다. 군인들의 총에 맞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듯 그 죽음에 온 힘으로 마음쓰면서, 어찌해볼 수 없는 일에 자신의 삶을 걸었거나 삶의 경로를 이탈시켰다. - P150

그들이 한 일은 그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 인간적인 어떤 것을 보존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권력이 ‘인간이란 죄책감 없는 폭력 그 자체이거나 폭력 앞에 굴복하는 냄새나는 몸뚱이일 뿐‘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할 때,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 P150

인간이 그런 식으로 훼손될 수는 없다, 인간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훼손될 수는 없다고 항의하고 있는 한에서, 동호가 자기 책임이 아닌 정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한에서, 은숙과 선주가 자기 책임이 아닌 동호 혹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한에서, 그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며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희생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인간적 삶을 힘겹게 그러나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 P151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 P151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P152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는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바로 그 결핍으로 인해서 타자의 이의 제기와 부인에 노출되고, 절대적 내재성 (혹은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포기할 수 있다. 바로 그 노출과 포기 속에서, 타자에 의해 나의 실존이 근본적으로 부단히 의문에 부쳐지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결핍은 충만함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로 이어진다. 이 초과를 위해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152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질 뿐이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절대적 내재성에 대한 환상 속에서 "스스로 자기 고유의 자기 동일성과 자기 결정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은 순수한 개체적 실재로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거기에 겉으로 보아 온전할 뿐 가장 병적인 전체주의의 기원이 있다." - P153

어떤 타자가 가장 강력하게 나에게 이의 제기하고 나의 자리를 부인해서 내가 스스로를 초과할 가능성을 이끌어내게끔 하는가? 죽어가는 타인이. - P153

죽어가는 타인 앞에서,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P153

죽어가는 타인과의 마주침, 나의 실존에 대한 이의 제기에의 노출, 인간의 결핍은 개인적 결단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원리로 놓여 있다고 - P154

"영원히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마지막 기도는 죽은 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오와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히 등을 돌리지 않고자 하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역설적으로 회복을 향하는 기도가 돼요. 자신을 허물고 자신 밖으로 간절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자의 기도라는 점에서요." - P155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차원이 있겠는가? 언제나 이미 도래하는 소년과도 같은? 그것을 전제한 뒤에야 비로소 인간적 삶을 껴안을 수 있는?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차원은 어떤 것인가? - P155

노랑부터 파랑까지의 색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런 색들이 칠해질 수 있는, 아직 칠해지지 않은, 어떤 텅 비어 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새하얀 캔버스와도 같은. 캔버스의 ‘흰‘은 그러므로 노랑, 검정, 빨강, 파랑과 같은 여타의 색깔과 대등한 색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색이고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색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소리들을 가능케 하는 소리의 잠재태인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 P157

"흰색은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인 것이다. (......)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의 무요, 태어나기의 무인 것이다." - P158

모든 ‘존재자‘들이 있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개방하는 ‘존재‘의 차원이 앞서야만 한다고 할 때, 바로 그 ‘존재‘가 이를테면 ‘흰‘빛이다. 그러므로 ‘흰‘은 단순한 하얀색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그것의 밑바닥 어디에선가 잠재태의 색채들이 현실화의 표면을 향해 우글거리며 올라오는 중이다. - P158

희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얼룩덜룩한 유령들이 결코 드러나지 않을 눈빛을 한 채 산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흰‘은 하얗지 않고 순수하지 않고 잡(雜)하다. - P158

다른 얼룩들 틈에서라면 잘 보이지 않았을 작고 희미한 얼룩도 그 얼룩 본연의 색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너무 쉽게 얼룩지는 배경색이 ‘흰‘이다. 그러나 무슨 색으로 얼룩지게 하든 ‘흰‘은 계속해서 다른 색들을 칠할 수 있게 하는 궁극의 가능성의 심층이며, 모든 소리들을 가능하게 하는 침묵이자, 무엇인가를 태어나게 하는 무. 소진시킬수 없는 여백이다. 그것은 너무 쉽게 훼손되고 마는 것이지만 결코 완전히 훼손시킬 수는 없는 근본적인 차원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 P159

물론 인간은 끝없이 훼손되고 끝없이 더럽혀질 수 있지만 언제나 끝없이 그 위에 다른 윤곽선을 그리고 다른 색을 칠해볼 수 있는 ‘흰‘의 차원이 있다고. 그 ‘흰‘의 차원에서 살아남기를 선택한 자들이 삶으로부터 내팽개쳐질 수 있는 만큼 그와 반대로 죽어가는 타인에게 온 힘으로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고. - P162

‘흰‘은 언제나 흘러넘치는 과잉으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적대적으로 차갑게 인간의 현존의 문장들을 여백 속에 빠뜨리고 지우고 다시 쓰게 만들 수 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현존이 다시 비롯된다. 그것이 ‘궁극의 가능성‘이다. - P163

인간은,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있지만 않다면, 그의 현존을 가지고 이 궁극적 가능성과 충돌한다. 무규정적이라기보다 초규정적으로 충만한 궁극적 가능성은 그가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언제나 그곳을 향해 가는 그의 본래적 미래, ‘앞선 거기‘(Vorbei)다. - P163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시간은 그저 중립적으로, 기계적으로, 시계가 째깍거리며 흘러가듯, 미래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궁극의 가능성인 ‘앞선 거기‘를 향해 달려나가려 할때, 그 ‘앞선 거기‘가 그의 일상과 부딪히고 그로 하여금 그의 일상을 다르게 보게 하며 그것에 이의 제기하게 하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이탈하게 하는 한에서만 시간은 흐른다. - P164

인간의 본질이 그 자신의 궁극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나가는 데 있다면, 인간이 곧 시간이다. - P164

"앞서 달려감에서 현존재(인간ㅡ인용자)는 그의 장래로 존재하며 나아가 현존재는 이 장래적 존재에서 그의 과거와 현재로 되돌아간다. 그의 궁극적 존재 가능성에서 파악된 현존재는 시간 그 자체이다. 현존재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현존재이다." - P164

(하지만 일상에 매몰된 인간들은 그 자신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중략)... 그들이 알고 있는 ‘시계의 시간‘은 전혀 시간이 아닌데도, 오직 그것만이 시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상인들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시간이 아닌 시계의 시간을 ‘시간‘으로 부르는 대신 본래적인 시간은 ‘시간의 바깥‘으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 P164

‘존재‘의 차원, 즉 ‘흰‘을 사유하는 것은 ‘시간‘을 사유하는 것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흰‘의 공간에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것(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 자신의 현존을 잃고 우리 자신을 초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런데 그것이 궁극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일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거기에 대번에 시간의 문제가 개입한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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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썼던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저자의 의도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저자가 소설을 쓰기 전에 소재가 될만한 것들을 간단히 적어두었던 메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었지만 독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에 저자의 책을 몇 권 완독했는데, 이 완독 덕택에 이 에세이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내용들이 좀 더 익숙하게 느껴졌고 그동안 읽었던 작품들 속에 숨겨져 있던 저자의 의도들을 보다 더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전부는 힘들더라도(마음같아서는 다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수 있기에) 몇 권은 읽고 이 에세이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해의 밀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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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밑줄친 문장 중에 ‘울면서 쓴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에 더해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서 했던 저자의 행동들을 보면서, 저자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창작의 고통과 인내 속에서 써내려간 글들이 결코 그냥 뚝딱하고 나온 것이 아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 뻔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고통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영어 속담(?)인 No pain, No gain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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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부분에는 저자가 자그마한 정원을 가꾸면서 썼던 일기들이 시간 순서에 맞춰 나온다. 정원을 손수 키워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 법한 진솔함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네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어. 하지만 거절하기 싫었어. - P52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_김광석 <나의 노래> - P53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54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 P55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 P56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 P57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 P57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 P58

함께 이별한 것 끌어안은 것
간절히 기울어져
붙잡았던 것 그러다
끝내 놓친 것
헤아릴 수 없네 - P67

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
기억나지 않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빛이 변하지 않는 - P69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 P70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 P71

나는 깨어난다
다시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P72

그러나 비명 소리 속에서
신음 속에서
울부짖음 속에서

다시 눈을 뜬다

이 세상에서 하루를 더 산다 - P73

희망이 있느냐고
너는 나에게 물었지

어쩌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런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 - P74

내가 나일 뿐이라면
나는 너를 만날 수 없지

너가 너일 뿐이라면
너는 나를 만날 수 없어 - P74

나는 결코 나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내가 느끼고 바라보는 모든 걸 나는 살아내니까

너는 결코 너로서만 살고 있지 않아,
너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걸 너는 살아내니까 - P75

이상하지 않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

두렵지 않아?
결코 통과한 적 없는 시공간의 겹들이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것 - P75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수십억의 겹으로
부풀어 오르니까

수십억의 겹이
응축돼 단단해지니까 - P75

살아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

우리는 우리 키와 체중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 P76

그런 공동주택들에서 햇빛이란 남동쪽이나 서북쪽 창을 통해 들어와서는 베란다나 거실, 방의 일부에 엉거주춤하게 몸을 걸치고 있다가 이내 완고한 콘크리트 벽뒤로 사라지는, 불완전한 방문을 반복하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 P93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리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 P95

매일, 매 순간, 매 계절 변화하는 빛의 리듬으로. - P97

매일, 매 순간 빛이 달라진다. - P105

죽지 않는다면. 살아남는다면. 마침내 울창해진다. - P106

낮에는 햇빛을 먹고 밤에는 자라나 보다, 식물들은. (사람 아이들처럼.) - P111

거울의 빛을 사용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거울이 반사한 빛을 한 번 더 반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빛이 비스듬히 잎들을 가로지를 때 행복한데, 이 감정은 아마 식물과 공생하도록 진화된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 P113

흙 위로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수 있다 - P115

정원을 키울 수는 없으니 내가 레고 인형처럼 작아졌다고 상상했다. 그럼 울창한 숲이겠지, 압도하는. - P116

뿌리에는 힘이 있다. - P117

크게 자랄 풀은 뽑아야 하지만 저렇게 작은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고. - P119

어느 쪽이든 건강하고 무성하니 그걸로 됐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 P121

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 P127

이제는 화분을 더 들이고 싶지 않다. 있는 식물들만이라도 잘 키우고 싶다. - P138

식물에 진딧물과 응애가 생기는 것이 물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듬뿍 물을 주었다. - P150

북쪽 벽을 초록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해주고 있다. - P160

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 - P166

충분히 살아냈어. - P166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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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맨 처음 나온 단편 소설 ‘밝아지기 전에‘ 초반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잠시 정리해보자면 일단 화자가 한 명 나오고 ‘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자의 딸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에게는 동생이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중학교 기간제 교사이고, 다른 한 명은 그냥 막내 여동생이라고 지칭된 인물이 있다. 소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여행을 갈 때 이 막내 여동생에게 자신의 자녀인 ‘윤이‘를 믿고 맡길 정도로 꽤나 신뢰가 있는 관계인듯 보인다.

한편 화자와 친한 은희 언니라는 사람이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 은희 언니의 남동생은 급성 복막염으로 인해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은희 언니의 어머니는 몇 해 전 홀로 되었다고 하며 다리가 불편한 상황이다.

은희 언니는 남동생을 하늘 나라로 보낸 뒤 해외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다니다가 일 년 내내 여름인 해외의 어느 도시에 머물게 되는데, 화자인 주인공은 이런 은희 언니의 삶을 궁금해 한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런 화자의 궁금증에 대한 은희 언니의 답변이다.

뭐가 됐든 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에 대해 간접적인 얘기만 듣는 것과 내가 직접 경험하면서 겪어보는 것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무런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약간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자기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그 밀도가 깊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소설 속 은희 언니도 독자인 나의 이런 생각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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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언니는 네팔, 인도, 미얀마 등과 같은 나라를 여행하는데,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에 나온 운남성, 타클라마칸 사막, 양곤, 인레 호수, 바간의 거대한 사원 군락 등은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관련된 사진들도 여러장 만나볼 수 있었는데, 자연 경관에 대한 여행 욕구가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직접 가봐도 좋을 것 같다.

소설 속 이국적인 장소들을 얘기하다보니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독자인 내가 새롭게 느꼈던 점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각각의 작품들마다 결말 부분이 뭔가 긍정적으로 마무리 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 단편 소설의 경우는 좀 달랐다. p.37에 밑줄친 내용을 참조하면 좋은데, 부정적인 메시지를 긍정적인 메시지로 바꾸는 이 장면이 독자인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말과 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과학적인 근거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국 모든 것이 ‘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 각자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인생도 긍정적으로 잘 풀리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자꾸 안좋은 쪽으로 인생이 흘러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살다보면 객관적으로 좋지 못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상황에 놓일지라도 나의 생각을 긍정적으르 바꾸고 안좋은 상황 속에서도 좋은 것을 보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처음에는 꼬여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상황도 좋은 쪽으로 달리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살다보면 매번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을 쓰면서 ‘생각과 말(또는 글)과 행동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언젠가 다른 책에서도 한 번 봤었던 글인데, 오늘 독서를 통해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은 삼위일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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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수록된 ‘회복하는 인간‘ 이라는 단편 소설은 주인공이 발목 부분에 어떤 통증을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소설의 제목처럼 이 통증이 비록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가 흘러가면 스토리가 너무 밋밋하다고 느낀건지 작가는 이 주인공이 자전거 타기를 유일하게 좋아했다는 설정을 집어넣었다. 물론 이를 통해 순간순간 쾌감과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 주인공이지만, 어느날 주인공은 자전거를 타다가 그만 넘어져서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로 인해 예전부터 만성적으로 느껴왔던 발목 부분의 통증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고 지금 느껴지는 통증만을 다시금 온 몸으로 자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주인공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다음으로는 이 소설에 나온 표현적인 측면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겠다. 일일이 나열하긴 좀 힘들지만 이 소설에서는 미래에 벌어질 어떤 일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모른다‘ 는 식의 문장이 나오는데, 이런 표현을 통해 저자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모든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귀결되는데, 심지어 이 죽음의 시점까지도 언제라고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행복감을 느끼던 자전거를 타다가 부상을 당해 죽을거라고 과연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해보면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매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살다가 때가 이르러 행복하게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면 그만한 호상이 또 어디있을까 싶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종교 쪽에도 문득 관심과 호기심이 생긴다. 관련된 책들을 만나고 읽어볼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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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온 단편 소설의 제목은 ‘에우로파‘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단어다. 개인적으로 이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그리스 신화의 여성으로 유럽 대륙과 목성의 위성 유로파, 원소 유로퓸의 어원이 된 인물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실제로 소설 속 본문을 읽다보면 목성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저자는 이 ‘에우로파‘라는 단어를 목성의 위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는 화자인 ‘나‘와 ‘인아‘라는 인물 이렇게 둘이 주가 되어 대화가 이어지는데, 본문을 읽다보면 화자인 ‘나‘라는 인물이 외형은 남자인데, 성(性)정체성 같은 게 여자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나‘와 ‘인아‘는 단순한 친구 그이상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듯 보인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표현같은 게 나와있진 않지만, 아마도 ‘나‘가 동성애 커플 가운데 남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커플들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일정 선을 넘을 수 없는 그런 좀 애매한(?) 관계가 마치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 속 결말도 뭐가 속시원하게 끝난다기보다는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게 어쩌면 ‘나‘와 ‘인아‘의 관계와도 비슷해보였다.

‘에우로파‘라는 용어는 아까 위에서 목성의 위성이라고 얘기했었는데, 여기서 위성의 본질을 잠깐 생각해보자면 위성은 행성의 근처에서 행성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지만, 행성과 결코 접하지는 않는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가깝긴 하지만 결코 닿을 수는 없는 그런 관계를 상징하는 의미로 저자가 ‘에우로파‘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소설 속에 나온 ‘나‘와 ‘인아‘의 관계도 목성과 목성의 위성 간의 관계의 본질과 비슷한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나름대로 근거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의 생각과 비슷할지 여부를 100% 확신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들어맞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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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 나오는 단편 소설의 제목은 ‘훈자‘라는 것이었다. 독자인 나는 처음에 이것이 ‘혼자‘라는 말의 오타 혹은 사투리 같은 것인줄 알았는데, 본문을 읽다보니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 인근에 위치한 소도시의 이름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기에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훈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참 이 소설집을 통해 생소한 지역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어떤 한 여자가 나오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습관적으로 훈자를 생각하곤 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훈자를 생각하게 만드는지는 독자인 나도 궁금하다. 뒷부분을 좀 더 읽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듯하다.

직접 겪어봐야지, 말로는 설명 못 해. - P15

조만간 또 떠날 거야. 돌아와보니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겠어. - P16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9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 P19

이 길이 내 숨구멍이었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눈비가 내려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플 때를 제외하면 날마다이 산책로를 걸었다. 걸으면서는 되도록 생각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 했지만, 어떤 사람들에 관한 기억은 자주 떠올랐다. - P20

변명하고 싶다. - P21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 P21

어떤 관계에나 존재하는 오해와 환상이 그녀와 나 사이에도 있었다. - P22

처음의 인상이란 잘 지워지지 않는 것 - P22

관계에 시간이 밴다는 것 - P29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32

지금 내가 있는 데가 오후 세 시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뿐인 하루를 손아귀에 꽉 쥔 채, 어쩔 줄 모르며 으스러뜨려왔다는 것을. - P33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 P35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 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 P37

당신이 지금 당신의 자전거를 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었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타는 일 말고는 어쩌면 어떤 일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전거를 탈 때에만, 당신의 삶이 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행복이 매 순간 당신을 따돌리고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도 조용히 떨쳐졌다. - P55

그 기쁨을 기억하게 될까 봐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던 아찔한 속력을, 하천 옆으로 난 자전거 도로를 힘차게 달리던 감각을 기억해낼까 봐 당신은 두렵다. - P56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 P57

이제야 살아나네요. - P59

정말 더디네요. 이렇게 더딘 것도 드문 케이스인데요. - P60

당신이 기쁨을 두려워한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 P61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 P62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63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65

휴일 오전에 직장인을 불러내는 건 범죄 행위란 거 알지? - P70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 P76

밖에 나가고 싶다. - P78

(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 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 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올리는 선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 P82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 P84

종종 나는 눈부신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진열된 것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색색의 에나멜 구두들, 짧거나 치렁치렁한 치마들, 자잘한 큐빅들이 박힌 화려한 머리핀과 브로치 들이 저토록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들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P86

저런 것들을 믿으면 안 돼, 라고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냥, 환영 속을 걷는 거라고 생각해. - P86

불면증이 좋은 점도 있어. 연습할 시간이 끝없이 생겨난다는 거지. - P89

네가 되고 싶은 것이 되어서 와. - P90

그들은 나에게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 P92

그때였지,
내 심장에 차디찬 불이 당겨진 건.
한 꺼풀 비늘이
내 눈에서 힘껏 벗겨진 건. - P93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 P95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 P96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 P98

사실, 공연보다 더 좋은 건 혼자 있는 시간이야. 아마 누구나 그럴걸 - P100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 P100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 P102

낮게 날지 마. 그러다 죽어. - P109

훈자.
그렇게 깊이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은 훈자다. - P110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꽃이 끝없이 피어 있습니다. - P111

그날 퇴근길에 그 여자는 가까운 대형 서점에 들러 《론리플래닛》 파키스탄 편을 찾았다. 영문판뿐이었고, 그나마 훈자에 관한 부분은 네댓 페이지에 불과했다. - P111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 P111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 P112

그 여자는 첫번째 육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며 건설했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절벽 길을 달리다 날이 저물면 교통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다음날 새벽 다시 버스에 올라 하루를 더 꼬박 달려야 한다.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 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 P112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여자는 훈자 인근 지역의 정세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첫번째 육로의 기점인 카슈가르는 신장 위구르 독립운동의 성소가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끈질긴 내전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지인 훈자는 변함없이 조용할 테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육로는 안전하다고만 하기 어려웠다. - P116

훈자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 여자는 이따금 등화관제와 야간 폭격, 소년들의 자살 폭탄 테러에 관한 악몽을 꾸었다. - P116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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