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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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처받는 경험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인간관계에서의 상처일 수도 있고 사랑하던 사람과의 갑작스런 헤어짐일 수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업무상으로 자신의 생각과 실상이 다를 때 겪을 수 있는 내적 갈등으로 인한 상처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핸디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대강 생각나는 핵심 인물들만 읊어봐도 보경, 은혜, 연재, 지수, 복희, 서진, 민주 등이 있고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騎手)인 콜리와 말(馬)인 투데이가 있다. 아무튼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들 각각의 삶을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비록 상처의 종류는 다를지라도 이 땅에 태어난 이상 그 상처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각자의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은혜와 연재, 지수, 복희, 서진, 편의점 사장 등이 합심해서 투데이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 과정은 다른 누군가에겐 그닥 의미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일이 투데이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투데이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함께 동참하는 각각의 인물들을 보면서 모든 사람은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상황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돕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간혹 자기 안에 있는 상처에 몰입한 나머지 지금 현재를 갉아먹는 우(愚)를 범하는 경우들이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그랬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상처들을 극복하고 이겨내며 살아나가야만 한다. 과거가 후회스럽다는 이유로 그냥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같아서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그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돌려놓고 싶지만 그것은 시간의 비가역성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저자는 과거의 잘못된 것들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무슨 상처가 있고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등의 이유로 인해 현실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어떤 조건에 놓여있던 간에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 안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그 방법을 실천한다면 비록 세상은 그들의 행동을 비웃을지언정 그 개인, 그 당사자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로인해 자신이 처한 악조건이나 안 좋은 환경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경이 그랬고, 은혜가 그랬고, 연재가 그랬다. 지수도 마찬가지다.

지수의 경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연재를 이용해서 채우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연재의 친언니인 은혜의 핸디캡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보며, 사회가 용인하는 선에서 자신의 욕심대로, 본능이 이끄는대로 행동하는 게 어쩌면 자기자신 뿐만아니라 사회전체적으로도 이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삶이란 어쩌면 각자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경주(레이스)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각자 다르기에 남들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앓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가는 거다.

어쩌면 투데이를 살리겠다는 그들의 꿈과 목표는 다른 사람들 특히 경마장의 말 관리인이나 경마장에 판돈을 들고 오는 도박꾼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크게 의미없고 하찮아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전제하에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그로 인해 행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들의 시선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빨리 달리든 말든 관계없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끝까지 완주하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이스 중간에 투데이의 등에서 스스로 낙마한 콜리도 얼핏보면 중간에 낙마했기에 포기한거 아니냐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콜리의 목적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투데이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목적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콜리는 절대 중간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고 보잘것없어보이는 목적일지라도 각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설령 그것이 빠르지 않을지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게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듯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투데이가 천천히 달리자 경마장의 관객들이 투데이와 기수인 콜리에게 쌍욕을 하면서 맥주캔을 집어던지는 등 비판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그들의 비판을 애써 무시하면서 콜리는 투데이와 레이스를 꿋꿋이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투데이가 속도를 내고 싶어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걸 느낀 콜리는 스스로 낙마해서 누운채로 아름다운 하늘 천 개의 파랑을 보며 삶을 마감한다.

행복이라는 건 그 이유가 거창하든 사소하든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것이 설령 콜리처럼 죽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갑자기 좀 생뚱맞긴 하지만 문득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비록 십자가의 고통이 있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나서 ‘다 이루었다‘ 하고 죽는 장면은 마치 콜리가 투데이를 달리게 한 뒤 낙마하는 장면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별을 5개가 아니라 15개, 25개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만에 좋은 작품을 읽은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검색을 하다보니 뮤지컬로도 무대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원작 소설을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만나보면 아주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추가로 생각나는 내용이 있어 좀 더 보태보자면, 연재가 콜리에게 했던 말 중에 실수가 기회(?)라고 했던 말도 생각난다. 콜리는 제작상의 오류로 인해 일반적인 휴머노이드와는 조금 다른 칩이 삽입되어 인간의 단어 천 개를 별도로 학습할 필요도 없이 기본 탑재된 상태로 기계가 가동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일반적인 로봇들과는 달리 등장인물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할 수 있는 조금은 특별한 로봇으로 나온다. 이것이 어찌보면 사고였을 수도 있지만 콜리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장면을 통해 자신이 설령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불평만 하기보다는 그것을 역이용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가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대화의 중요성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평소에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혼자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삭히는 경우들도 많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대화하는 과정자체가 굉장히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느껴지기에 아예 그 자체를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며 이는 오해의 불씨가 되어 내 마음을 불타게 만들수도 있다. 그로 인해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내 마음 한 구석을 가득 채워서 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는 내성적인 성격의 연재와 달리 친구인 지수는 굉장히 외향적인 성격으로 나오는데 서로 성향이 정반대이다보니 소통과정에서 다소간에 오해가 생겨서 지수가 마음에 상처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대화하는 것을 설령 기피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대화를 하지 않을 경우에 파생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해가 있거나 불편한 관계가 있다면 지금 당장 또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속한 시일 내에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예상했던 이야기의 흐름과 실제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조금씩 다르게 흘러가서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간만에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이 소설이 과학문학상 수상작이다보니 본 소설의 내용이 끝나고 맨 뒷부분에는 심사위원 분들의 심사평을 만나볼 수 있었다. 수상작을 선정하게 된 기준이라든지 이 공모전에 도전했던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전하는 간단한 격려와 함께 개선하고 보완해야 할 점들을 피드백해주셨다. 또한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된 이야기도 있었는데 해리포터를 쓴 작가도 출판사로부터 8번이나 까이고 나서 유명작가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있겠지만, 이 얘기를 보면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 에디슨의 말도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상처는 내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에 신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늘 하루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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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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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행복이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었다. 비록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에 입은 상처가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관계없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면 그런 상처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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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5-07-25 0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해둘만한 좋은 코멘트네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7-25 07:11   좋아요 1 | URL
예 댓글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연재와 지수가 오랫동안 함께 준비했던 대회에 출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학 입시에서 가산점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큰 규모의 대회라 참가자들의 수도 많았고 해외 경험이나 유학 등을 다녀온 학생들도 적지 않았기에 경쟁자들의 수준도 꽤나 높아보였다. 연재는 사실 과거에 이와 비슷한 대회에 홀로 출전했다가 아쉽게도 수상에는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든든한 지원군(?)인 지수와 함께 나와서였는지 예전만큼 긴장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연재와 지수 팀의 순서에 앞서 발표하는 팀들의 모습을 보며 연재는 자신이 준비한 내용이 부실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빠지고 만다. 그때 지수가 연재의 손을 잡으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게 바로 처음 밑줄친 문장이다.

물론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이 힘들 때는 이 소설에 나오는 지수와 같이 바로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존재함으로 인해 새로운 힘을 얻고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정한 친구의 가치라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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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연재가 거동이 불편한 자신의 친언니인 은혜를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낸 ‘소프트휠-체어‘ 를 대회 심사위원들 앞에서 발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연재가 말했던 문장들을 보면서 왠지모를 뭉클함 같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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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투데이가 다시 경주에 나서는 모습이 나온다. 솔직히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어떤 반전이 있기는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번 쯤은 했을 듯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반전이었기에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결말이 내 예상과 다르긴 했지만 그까짓게 뭐 대수인가. 그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행복했기에 그걸로 만족한다.

이 작품이 과학문학상 수상작이다보니 본 소설이 끝나고 관계자 분들의 심사평이 이어진다. 심사평을 읽어보니 심사위원들이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어서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 글을 쓸 때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수상 소감에서 자신은 소설을 쓰고, 플롯을 짜고, 인물을 구체화시키는 것 등을 좋아하지만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고백을 한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그 이유를 찾고자 애섰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저 그냥 즐겁게 글을 쓰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예상치 못하게 받은 과학문학상처럼 그 이유도 갑자기 알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수상 소감을 읽으면서 모든 일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소설 속 인물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저 그냥 본능적인 것이라 진짜 이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그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유가 있든 없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이유야 만들기 나름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저 그냥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소설 속에서도 행복이 고통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복잡하고 신경쓸거 많은 세상에서 너무 세세한 이유들을 찾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혹시나 커다란 행복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되돌아봐야겠다.

‘네 아이디어가 제일 훌륭해.‘

‘소프트휠-체어‘는 2016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만들어진 소프트 로봇 ‘옥토봇‘과 작동원리가 비슷하다. 합성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소프트휠-체어‘의 바퀴는 기존의 휠체어 바퀴보다 훨씬 얇고 질기며 바퀴 속에는 굽힘 변형률을 갖는 인공 근육이 심어져 있다. 평소에는 원형을 유지하지만, 계단과 같은 장애물을 만날 때에는 공기압을 이용해 그 장애물의 모양에 맞춰 바퀴의 형태를 변형할 수 있다. 동시에 전도성 고분자와 결합한 인공 근육이 변형된 바퀴의 형태를 고정시키면서 계단을 무리없이 오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산악지대 역시 오를 수 있다.

연재가 떨지 않기 위해 천천히 숨을 뱉었다. 몸에 힘을 줄 때보다 힘을 뺐을 때 긴장이 더 풀렸다.

"한 번 외출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준비를 한다고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의지나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끝내 포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어렵거든요. 도움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들이 많으니까요. 누구는 쉽게 수술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 수술은 누군가에게 불가능과 같은 비용이거든요.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자유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만 있으면 돼요.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인류 발전의 가장 큰 발명이 됐던 바퀴도, 다시 한 번 모양을 바꿀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바퀴가 고대 인류를 아주 먼 곳까지 빠르게 데려다줬다면 현 인류에게도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바람은 공기가 움직이는 거거든. 그래서 공기가 어떤지에 따라 달라. 겨울은 공기가 차가우니까 바람이 차가운 거고, 여름은 공기가 더우니까 바람이 더운거야."

"바람은 왜 부나요?"
"공기가 움직이거든. 기압이라는 게 있거든? 공기 덩어리야. 그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여. 끊임없이. 그렇게 지구를 순환하거든."

바람은 스스로 불지만 투데이는 그런 바람을 일으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신기한 변화들이 많았다. 모든 일에 이유를 붙일 수 없다는 연재의 말을 납득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이유를 하나하나 다 찾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였다.

"당신을 만난 후의 보경도 저 시절의 보경과 같아요."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엄마는 그때도 지금도 같은 사람이야."

연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랜만이잖아. 오랜만에 하면 뭐든 떨리기 마련이니까."

"당신이 저를 인간처럼 대할 때 기쁜 이유는 당신이 저를 옆에 실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살아 있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 밖에 없으리라.

하루쯤 쉬어도 굶어 죽지 않으니 괜찮다

더는 둘의 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거라는 걸,

함께 있지만 맞물리지 않는 각자의 시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콜리는 그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서로에게 스며든 소음이 서로의 시간을 맞춰줄 거였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말이다.

콜리는 이제 인간이 지키는 침묵이 대체로 ‘긍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질문에 대한 긍정.

행복만이 유일하게 고통을 이길 수 있으므로.

"슬프겠지. 그래도 이겨낼 거야."

"이겨낼 수 있어. 다 이겨내니까."

"하지만 그건 시간이 멈춰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은혜는 여전히 걱정됐지만 보경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보경은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지 않은가.

"죽지 않는 한 시간은 영원히 흐르니까, 잠깐 멈추는 거야 문제도 아니지."
...(중략)...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고. 너무 빠르게 달리면 다 놓치고 산대."

천천히, 느리게, 여유 있게, 느린 호흡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네 등에 타고 있는 콜리의 움직임을 함께 느끼면서...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잘할 수 있어."

그것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을 연재에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없어 연재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만 보았다.

잘 부탁해요.

너무 아프면 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이미 주로에 섰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힘들면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비록 생명이 무언가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어차피 이 주로는 투데이만 달릴 수 있다. 관중석에서 보내는 야유는 중요하지 않다. 투데이가 신경쓰지 않도록 귓가에 말하고, 또 말했다.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행복해하고 있군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행복이 고통을 이겼다.

내게는 두려움이 없고 미련이 없다. 오로지 말을 살려야 하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존재 자체의 이유만이 있을 뿐이다.

설령 무릎이 완전히 망가진다고 할지라도 투데이는 더 빠르게 뛰고 싶어 한다. 다시 달릴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대단히 멋있는‘ 소설은 아직 내가 쓸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내가 잘 쓸 수‘ 있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지을 적절한 결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아쉽다

이번에 결과가 실망스럽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창작에 매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출판되기 전까지 여덟 곳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경이의 세계를 만들어 독자들이 몰입하게 하려면 작가가 먼저 설정한 세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결말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결말에서의 파급력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경이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세계 안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여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SF가 제시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감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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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7장인 ‘유전자에서 문화까지‘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다. 이 챕터의 내용을 최종 정리하면서 저자는 문화라는 것도 결국 유전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과 함께 그 이후의 진화 과정에서는 문화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면서 발전했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유전자와 인간이 탄생한 이후에 만들어낸 문화를 모두 이해해야 그것이 진정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결론은 내가 개인적으로 작년에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읽었던 유시민 저자의《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라는 책에서 만났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시 저자는 그 책에서 자신이 인문학과 관련된 공부는 많이 했지만 상대적으로 과학 분야에 대한 공부는 많이 부족했다는 점을 고백했었다. 이로 인해 자신이 인간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단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독자인 나는 당시 나름의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래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던 유시민 작가가 조금은 심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바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충격(?)이 계기가 되어 나 또한 그전까지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과학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일단 유시민 저자가 자신의 책에서 주석으로 추천해줬던 약 70여 권의 책들 가운데 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인《코스모스》와《이기적 유전자》를 먼저 읽어보았고《엔드오브타임》과 《확장된 표현형》은 조금 읽다가 잠시 쉬고 있는 상태다. 어쩌면 지금 읽는 이《통섭》이라는 책도 그 리스트에서 알게 되어 읽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솔직히 과학관련 서적을 읽는 것이 일반 소설책을 읽는 것만큼의 속도가 나지는 않는다. 독자인 내가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딱히 배경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처음 밑줄친 부분에 나온 말처럼 인간을 좀 더 입체적으로 또는 다방면으로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비록 진도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나갈지언정 조금씩이나마 읽어나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좀 힘들긴 해도 그 와중에 중간중간 새롭게 배우는 것들도 분명히 있기에 호기심을 채워가는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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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후반부에서는 근친상간을 하지 않게 되는 이유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들과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얘기가 이어진다. 단지 근친상간은 안 좋은 거라는 단순한 결론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독서를 통해 과학적인 근거들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기에 나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유전자로부터 발흥하며 유전자의 검인을 영원히 간직한다. 한편으로 문화는 은유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획득했다.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면 유전자와 문화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을 분리한 채 이해하려 한다면 부질없는 짓이 된다. 인간 진화의 실재성을 인식하면서 이 둘을 함께 묶어 이해해야 한다. - P289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본성을 규정하는 유전자도 아니고 인간 본성의 궁극적 산물인 문화도 아니다. ...(중략)... 그것은 후성 규칙들이다. 즉 문화의 진화를 한쪽으로 편향시켜 유전자와 문화를 연결해 주는 정신 발달의 유전적 규칙성이다. - P291

생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유전자 · 문화 공진화에서 인과적 사건들이 유전자, 세포, 조직, 뇌, 행동의 순서를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 사건들은 물리적 환경과 기존 문화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후의 문화 진화를 편향시킨다. 그러나 그런 연쇄(유전자가 후성 규칙을 통해 문화에 행하는 작용)는 전체 상호 작용의 절반일 뿐이다. 또 다른 절반은 문화가 유전자에게 하는 작용이다. - P292

뇌와 행동의 후성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은 거대 분자들의 단편일 뿐이다. 그것은 감정도 없고 신경 쓰는 일도 없고 물론 의도도 없다. 그저 고도로 구조화된 수정 세포 내에서 발생을 조절하는 화학 작용의 연쇄를 촉발시킬 뿐이다. 그것의 문서는 분자에서 세포 그리고 기관의 수준으로 확장된다. 연쇄적인 생화학 작용으로 이뤄진 발생의 초기 단계는 결국 감각계와 뇌가 자신을 조립하는 단계에 이르러 끝을 맺는다. 그 후로 개체가 완성되어야만 정신 활동은 창발적 과정을 통해 출현하게 된다. - P293

뇌는 생물학적 질서의 최고 단계들의 산물로서 개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적 작용에 함축되어 있는 후성 규칙들의 제약을 받고 있다. - P293

뇌는 환경 자극의 범람 속에서 작동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다.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뇌의 집합적 선택은 인간의 모든 것ㅡ유전자, 후성 규칙, 의사소통적 마음 그리고 문화ㅡ의 진화적 운명 (Darwinian fate)을 결정한다. - P293

지혜로운 선택을 한 뇌는 더 높은 진화적 적응도(Darwinian fitness)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 뇌가 잘못 선택한 뇌들보다 통계적으로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됨을 뜻한다. "적자생존(survivalof the fittest)"이라는 말로 흔히 요약되는 이 일반화는 마치 동어반복ㅡ적합한 놈이 살아남고 살아남은 놈이 적합하다는 식으로ㅡ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생산과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 P293

수십만 년의 구석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특정한 후성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점점 증가해 종 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수고 덕분에 인간 본성이 탄생한 것이다. - P293

인간 진화가 침팬지나 늑대의 진화와 정말로 다른 점은 인간의 진화를 추동해 온 환경에서 문화적인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화가 조성한 특수한 환경은 행동 유전자들에 영향을 끼친다. 즉 행동 유전자들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 P293

주변 환경에서 먹이를 찾는 행동처럼 자신들의 문화를 최대로 활용했던 조상들은 진화적 이득을 많이 챙겼다. 선사 시대에 그들의 유전자는 증식되었고 뇌 회로와 행동 형질을 조금씩 변화시켜 결국 현재의 인간 본성을 만들어 냈다. 역사적인 우발성도 그런 일에 모종의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기 파괴적인 것으로 판명이 난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체로 자연선택은 긴 세월 동안 인간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인간 본성은 적어도 그것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적응적이었다. - P294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은 하나의 역설을 만들어 내는 듯하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문화를 만들고 동시에 문화가 인간의 행위를 만든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동물계에 널리 퍼져있는 환경과 행동 사이의 호혜성과 비교해 보면 그런 모순은 사라진다. - P294

아프리카 코끼리는 많은 수의 수목과 관목을 먹어대면서 나무들이 성긴 삼림 지대를 창조한다. 그 코끼리의 다리 밑에서 우글대는 흰개미는 죽은 초목을 소비하고 땅과 배설물을 이용해 밀봉된 집을 짓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분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 내서 자신들의 생리 작용이 잘 적응하게끔 소기후를 만들어 낸다. - P294

인간을 홍적세(지질 연대는 크게 원생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뉘는데 6500만 년 전에 시작된 신생대는 다시 제3기와 제4기로 구분된다. 그리고 제4기는 200만 년 전에 시작된 홍적세와 1만 년 전에 시작된 충적세로 나뉜다. 호모 에렉투스가 약 200만 년 전에 진화했으니까 인류의 주무대는 구석기 문화로 장식된 홍적세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그 시대에 네 차례의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쳤으며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쯤에 기후와 동식물의 분포가 현재와 흡사한 충적세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함께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에 이들의 서식지와 동일한 곳에서 진화한 존재로 보려면 환경의 일부를 문화로 대체하기만 하면 된다. - P294

사회적으로 학습된 복잡한 행동이라고 엄격히 정의되는 문화는 확실히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환경으로서의) 간의 호혜성도 독특할 수밖에 없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원리는 동일하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문화에서 나오면서 동시에 문화가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 P295

유전자들은 토템 신앙, 원로 회의, 종교 의식과 같은 정교한 규약들을 결정하지 않는다. ...(중략)... 오히려 유전자에 기반을 두고있는 후성 규칙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규약들을 창조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P295

후성 규칙들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그것에 따른 특정 행동들이 다양한 사회 속에서도 수렴적으로 진화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후성 규칙들에 따라 편향된 문화에서 진화된 그 규약들은 문화적 보편자로 간주된다. 소수 문화의 경우에도 동일한 시나리오가 적용될 수 있다. - P295

발생유전학의 입장에서는 이런 전체 구도를 유전자들의 반응 양태가 문화적 보편자의 경우에는 대단히 협소하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문화적 규약들이 생겨나지 않는 인간 환경은 거의 없다. 반면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다양한 군소 규약들을 산출하는 유전자, 다시 말해 문화의 다양성을 늘리는 유전자는 더 넓은 범위의 반응 양태를 보인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 P295

유전적 진화는 후성적 편향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즉 유전자의 반응 양태가 무한대의 범위를 갖게 되어 문화적 다양성이 폭발할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고 해서 문화가 인간 유전체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경험에 대해서건 뇌가 동등한 민첩성을 갖고 반응하고 배우도록 유전자들이 뇌를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296

만일 편향이 없는 학습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유전자 · 문화 공진화 이론에 대한 반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특이한 유형의 후성 규칙 때문에 생긴 공진화의 극단적 산물이다. - P296

후성적 편향은 ...(중략)... 하나같이 정도의 차이만을 나타내고 있다. - P296

혈연 선택(kin selection)은 유전자가 그 자신을 운반하는 개체에 미치는 효과와 그 유전자로 인해 그 개체의 모든 유전적 친족에 미치는 효과를 더한 것에 기초하여 자연선택이 그 유전자를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유전적 친족이란,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촌 등은 물론이거니와 생존해 있고 번식을 할 수 있으며 친족의 번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존재를 뜻한다. - P298

혈연 선택은 이타적 행동의 기원에서 특히 중요하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에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하는 두 자매 (예컨대, 영희와 순회)를 생각해 보라. 영희는 동생인 순희를 돕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거나 적어도 자식을 낳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순희는 그런 도움이 없을 때 낳았을 자식의 두 배를 낳아 기른다. 순희 유전자의 절반이 관대한 영희 유전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희의 유전적 적응도의 손실은 만회된다. 만일 그런 (영회의) 행동이 유전자의 규정을 따르고 자주 나타난다면 그 유전자는 자신을 운반하는 개체에게는 손해를 주는 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개체군 내에 퍼질 수 있다. - P298

양육 투자(parental investment)는 부모가 어떤 자식에게 투자할 여력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자식에게 투자함으로써 그 자식의 적응도를 높이는 행위를 뜻한다. 양육 투자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그런 선택을 하게끔 만들어 준 유전자들의 적응도가 달라진다. - P299

짝짓기 전략(mating strategy)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성적 활동에 있어서 더 큰 위험 부담을 지고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임신과 수유 등을 비롯하여 기본적으로 더 많은 양육 투자를 하는 쪽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난자 하나는 그것에 이르기 위해 경쟁하는 정자 수백만 개 중 하나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 임신한 여성은 향후 몇 년 동안에 또다시 임신하기 힘들지만 남성은 언제 어디서나 다른 여성들을 임신시킬 물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 P299

대중 매체의 수준에서 이 문제를 보면 남성의 성공적인 짝짓기 전략은 여성에 대해 바람둥이가 되는 것인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남성에 대해 수줍어하고 까다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남성은 여성에 비해 포르노와 매춘에 대해 더 관대한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구애행위에 관해서는 남성의 경우에 배타적인 성적 접근을 강조하고 부권(父權, paternity)을 확실하게 보장받고 싶어 하는 반면 여성은 자원의 공급과 안전성을 중시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 P300

지위(status)는 복잡한 모든 포유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사회 행동들의 목록을 정리하다 보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높은 신분(서열, 계급, 부에 있어서)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300

전통 사회에서 개인의 유전적 적응도는 대체로 신분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부족 사회와 전제 국가의 경우에는 특히 우위에 있는 남성이 많은 여성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많은 자손들을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종종 터무니없이 자손을 많이 낳기도 한다. - P300

하지만 근대 산업 국가에서 신분과 유전적 적응도 간의 관계는 애매해졌다. 자료에 따르면 높은 신분의 남성은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갖지만 항상 더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 P301

부족과 민족 국가(현대판 부족)을 통한 세력 확장과 방어는 문화적 보편자이다. 왜냐하면 세력 확장과 방어는 생존과 번식 잠재력에 있어 더할 수 없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족 지도자의 경우에는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 P301

미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1812년 전쟁의 영웅이자 제독이었던 스티븐 디캐터(Stephen Decatur)는 "조국이 옳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좋든 싫든 조국이다." (개인의 전투 능력이 언제나 그 개인의 적응도를 높이지는 못한다. 그는 1820년에 벌어진 한 전투에서 전사했다.) - P301

이런 행동[세력권 행동(territoriality)]은 진화 과정에서 사활이 걸린 몇몇 자원들이 "밀도 의존적 요소"로서 기능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개체군 밀도는 먹이, 물, 집터 그리고 이런 자원을 찾아다니는 개체들의 가용 면적이 부족할수록 높아진다. 그래서 사망률과 출생률이 균형을 이루고 개체군 밀도가 평형에 도달하기까지 사망률이 증가하거나 출생률이 감소한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동물 종은 세력권 행동을 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 P301

이론적으로 볼 때 자신과 집단을 위해 사적인 자원을 방어하게끔 하는 기제가 유전적으로 구비된 개체들은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더 많이 전달할 것이다. - P301

자원들을 제한해도 개체군의 성장이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않는 종들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이주, 질병 또는 포식자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평형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만일 이렇게 밀도의존적 요소들이 다양하고 그로 인해 자원 통제가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세력권 방어는 하나의 유전적 대응으로서 진화하지 않는다. - P302

인류도 틀림없이 세력권 행동을 하는 종이다. 한정된 자원들을 어떤 식으로 통제할 것인지는 인류의 진화사 속에서 생사를 가리는 문제와도 같았다. 세력권을 지키기 위한 공격적 행동은 널리 퍼져 있으며 그에 대응하려는 행동이 때로는 살인을 불러오기도 한다. - P302

전쟁은 문화적인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위안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전통적 지혜는 반쪽 진리일 뿐이다. 전쟁의 기원은 유전자와 문화 둘 다에 있다. 따라서 이 둘이 상이한 역사적 정황들 속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만 전쟁을 피할 길이 열린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고 훨씬 더 현명하다. - P302

계약적 합의(contractual agreement)는 마치 주변의 공기와도 같이 인간의 사회 행동에 넓게 퍼져 있어서 나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특별한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과학적 연구 주제로서 주목받을 만한 가치를 담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포유류는 이기적 이해관계의 기초 위에 사회를 형성한다. 개미 같은 사회성 곤충들의 카스트 제도와는 달리 인간은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에너지를 자신과 가까운 친족의 복지를 위해 사용한다. - P302

포유류에게 사회생활은 개인의 생존과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그 결과 인간을 제외한 포유류 사회는 곤충 사회에 비해 훨씬 덜 조직화되어있다. 포유류의 사회는 위계질서, 이합집산식의 연합, 그리고 혈족동맹 등에 의존한다. 하지만 인간은 장기 계약을 통해 친족 동맹과 유사한 형태의 연합을 비친족 개체로 확장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사회 조직을 발전시켜 왔다. - P302

계약 맺기는 문화적 보편자 그 이상이다. 그것은 언어와 추상적 사고가 인간의 특징인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인간의 독특한 형질이다. 그리고 역시 본능과 고도의 지능을 통해 생겨났다. - P303

계약 맺기가 거래 당사자 간의 모든 합의들에 동일하게 작용하는 합리성의 결과인 것만은 아니라 ...(중략)... 오히려 당사자들이 거래상황에서 속임수 탐지 능력을 고도로 발전시킨다 ...(중략)... 속임수 탐지는 실수 탐지와 이타적 의도의 평가보다 훨씬 더 두드러졌다. 게다가 속임수 탐지 능력은 사회 계약의 득실이 구체화되어 있는 경우에만 하나의 계산 절차로서 촉발되었다. 사기 행위에 주의를 기울일 때가 실수 행위나 좋은 행위, 심지어 이문을 남기는 행위에 주의를 기울일 때보다 훨씬 더 많았다. - P303

사기 행위는 감정을 자극하고, 정치 경제의 통합성을 유지해 주는 험담과 도덕주의적 공격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 P303

유전적 적응도 가설 ㅡ 문화에 가장 널리 퍼진 형질들은 그것들을 있게끔 해 준 유전자들에게 진화적 이득을 안겨 준다. ㅡ 은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합당하게 잘 입증되어 왔다. 널리 분포된 형질들은 대개 적응적이고 그것들의 존재는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기본 원리에 잘 부합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간에 대체로 이 기본 원리를 따르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도 사실이다. - P303

유전적 적응도 가설의 가치는 그것이 인간 본성에 던져 주는 통찰에 있다. - P303

평균적으로 개인은 23쌍의 염색체의 두 부위에서 열성 치사 유전자를 가진다. 그 부위는 염색체상에 거의 아무데나 될 수 있으며 사람마다 그 수와 위치가 서로 다르다. 두 상동 염색체 중 하나만 치사 유전자를 가지게 되면 다른 염색체에 있는 정상적인 유전자에 의해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두 염색체 모두가 특정한 부위에 치사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태아는 유산되거나 일찍 죽는다. - P306

19종의 사회성 종에서 젊은 개체들은 인간의 족외혼 (exogamy)을 연상케 하는 짝짓기 패턴을 보인다. 예를 들어 몸이 어른 크기가 되기 전에 그들은 자신이 속해 있던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에 합류한다. ...(중략)... 이런 다양한 영장류 종들에서 젊은 개체들이 떠나는 이유는 공격적인 어른 개체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 - P307

젊은 영장류의 이런 특이한 행동은 그것의 궁극적인 진화적 기원이 무엇이건 간에 그리고 그 행동이 그 개체의 번식 성공에 어떤 영향을 주든지 간에 근친 교배의 발생 가능성을 줄여 준다. 그러나 근친 교배에 대한 거부는 두 번째 단계의 저항으로 더욱 강화된다. 그것은 번식 집단에 남아 있는 이성 개체들이 성적 행동마저도 피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 P307

‘웨스터마크 효과(Westermarck effect)‘ ...(중략)...
즉 어렸을 때 자신들과 가깝게 지냈던 개체들이 성적으로 접근해 오면 거부한다. 가령, 어머니와 아들이 짝짓기를 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형제자매 간의 짝짓기는 비친족 개체와의 짝짓기보다 훨씬 덜 일어난다. ...(중략)... 핀란드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알렉산더 웨스터마크(Edward Alexander Westermarck, 1862~1939년 핀란드의 사회학자, 철학자, 인류학자)가 『인간 결혼의 역사(the History of Human Marriage)』(1891년)라는 역작에서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그런 현상을 최초로 보고했다. - P307

‘민며느리제‘ ...(중략)... 원래 중국 남부 지방에서 성행했던 이 제도는 비친족인 여아를 가족으로 입양하여 그 가족의 친아들과 평범한 오누이 관계로 지내게 한 다음 결국 며느리로 삼는 제도를 말한다. 이런 풍습은 성비 불균형과 가난으로 인해 나중에 아들의 혼삿길에 막힐까 봐 미리 미성년의 며느리를 데려오는 전략이다. - P308

"네 삶의 가장 초기에 네가 친밀하게 알고 지냈던 사람에 대해서는 성적인 관심을 끊어라." - P309

웨스터마크 효과는 심리학의 ‘등급 효과(graded effect)‘와도 일맥상통한다. 여러 사회에서 수집된 자료를 보면 유년기의 결정적인 기간동안 둘의 관계가 친밀하면 할수록 이성 간의 성 접촉 빈도가 감소한다. 따라서 유아기에 가장 강력한 결속을 보이는 어머니와 아들 간에는 근친상간 빈도가 가장 적게 나타나고 형제자매의 경우가 그 다음이며 생물학적 아빠가 딸을 성적으로 학대(내가 여기서 "학대"라고 말한 이유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딸이 자유롭게 동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우가 그 다음이다. 가장 빈번한 근친상간 유형은 계부가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경우이다. - P309

생물학자에 따르면 본능이 작동하는 기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본능의 대상과 연관된 단순한 신호만 실생활에서 입력되면 그만이다. 가령, 결정적 순간에 어떤 냄새나 접촉만으로 복잡한 행동이 촉발하거나 억제될 수 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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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재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특별히 오늘 나오는 부분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연이 되어 연재와 전략적으로(?) 붙어다니는 지수라는 친구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지수는 남의 집에 갈 때 빈 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는 친구라 연재의 집에 갈 때도 각종 간식거리들을 사들고 갔다고 한다. 그 결과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줄로만 알았던 연재는 단 몇 주만에 몸무게가 3kg이 늘었다고 한다. 오늘 처음 밑줄 친 문장은 지수와 시간을 함께 보내던 연재가 살이 찌고 나서 스스로 느낀 점을 표현한 문장인데 표현이 참 신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밑줄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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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는 연재와 휴머노이드 로봇인 콜리 간의 대화가 나온다. 콜리는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지 우선순위를 매기는 순서에 따라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얘기를 하면서 왜 꼭 위기의 순간으로 소중한 사람의 순위를 매기는지 의아해한다. 그러자 연재는 좋은 것은 쉽게 나눌 수 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나름대로 현명한 답변을 한다.

근데 연재는 콜리의 질문에 답변을 함과 동시에 전략적으로 자신의 파트너가 된 지수와의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만약 물에 빠졌을 때 나는 지수를 몇 번째로 구할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순위가 꽤 높게 나오자 연재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럼 지수는 나를 몇 번째로 생각할지‘를 말이다.

사람들마다 인간관계에서 우선순위가 각자 다를 것인데,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하나 더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연재가 고민했던 것처럼 상대에게 몇 번째 우선순위일지를 고민하기에 앞서 자기 스스로가 먼저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일단은 맞지 않을까 싶다. 위에서 언급한 우선순위라는 것은 늘 상대적인 것이기에 얼마든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1순위가 영원한 1순위가 되라는 법은 없다. 지금은 비록 후순위로 여겨질지라도 추후에 발생하는 다른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 앞순위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관계 중에서 혈연인 가족 관계 같은 경우야 그 우선순위가 크게 변동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혈연 이외의 관계인 경우에는 아마도 내가 앞서 언급한 것들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연재와 지수도 피 한방울 안 섞인 그저 친구 관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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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 투데이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의 여러 단계들 중에 연재는 새로운 난관을 만나게 되는 데, 여기서 상세한 내용을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자신이 과거에 일했었던 가게의 점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 난관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참 사람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점장과 연재는 그닥 좋게 헤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조차도 시간이 지난 뒤에 도움이 되어 돌아오는 걸 보면서 평소 인간 관계에서 설령 껄끄럽거나 조금 불편한 것이 있을지라도 원수같은 관계로만 헤어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로 다시 부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몸에 쌓인 기분이었다.

"가장 먼저 구하는 거요.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바다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거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그게 소중한 사람의 순위를 매길 때 사용되던데... 그런데 참 이상한 비유예요. 왜 꼭 절망의 상황에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줄 거냐는 비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좋아하는 걸 나누는 건 쉽게 할 수 있잖아. 근데 절박한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건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이상 잘 못 해."

지수에게 자신은 과연 몇 번째일까?

그려놓은 모델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했고 3D로 바꿔보기도 하며 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지만 큰 혁명을 상상했다.

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투데이가 뛸 때와 같아요, 지금."
...(중략)...
"행복해하고 있어요. 투데이가 뛸 때처럼 당신도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살아 있다는 건 호흡을 한다는 건데, 호흡은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진동이 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행복이라는 건 결국 자신이 느끼지 못하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단어 아닌가.

"저는 호흡을 못 하지만 간접적으로 느껴요. 옆에 있는 당신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괜찮지 않나요?"

"옆 사람이 불행한 건?"
"그건 못 느껴요."
"왜?"
"제가 느끼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요."

"내가 외면한다고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던데."

"가족들의 불행을 마주본다는 건 내가 외면했던 내 불행을 마주 보는 거랑 같거든."

콜리에게는 지난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아직도 연재는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흐름을 끊고 불행을 대면할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

"밥 먹으면 식곤증으로 졸려서 공부할 때 힘들어."

숨이 없는데 어떻게 욕망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늘을 보고 싶다는 콜리의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만큼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투데이는 달릴 때 행복한 아이다. 태어나서 줄곧 주로를 달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 말은 결국 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동안 마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관절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주로를 달리는 것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몇 주를 마방에만 갇혀 있던 투데이가 며칠 전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서는 것조차 힘들 거라던 복희의 말과 달리 투데이는 기쁨의 울음을 쏟으며 주로를 활보했다. 물론 짧은 시간이었고 그 후에는 고통에 무너졌으나 마방에 있었을 때와 달리 웃고 있었다. 투데이는 웃고 있음이 확실했다. 콜리의 말이 맞았다. 수 만개의 바늘이 찌르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평생을 달려 온 투데이는 달리는 것이 더 행복했다.

주로를 보고 달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했다. 오로지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그 현장에 서 있을 수 있는 속도. 완주를 하더라도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있는 속도.

"고칠 게 보이지 않으면 고치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 그런 것들이 있는 건가요?"
"너는 모든 것에 꼭 이유가 다 필요해?"
...(중략)...
"세상에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기수가 되기 위해서이고 인간이 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예요. 무의미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휴머노이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몇 세기를 보내며 인간이 차근차근 쌓았던 지식을 한번에 압축해 만든 존재였으니 인간 개개인보다 뛰어난 건 당연했다.

"틀렸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세상에는 원래 이유가 없었어. 인간들이 이유를 가져다 붙인 거지. 그러니까 순서를 따지자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먼저야."

"누구라도 틀려. 원래 살아가는 건 틀림의 연속이야."

콜리는 자신을 살아 있다고 표현해준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당신도 저를 그냥 데리고 온 건가요? 이유 없이요?"
...(중략)...
"응, 그냥 데리고 왔어."
"고마워요. 저도 당신이 그냥 좋아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낯선 것에 도전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아나요?

"내가 너를 친하게 생각하듯이 너도 나를 친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연재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했다.
"그런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몇 번씩 그렇게 가면 우리는 뭐가 돼?"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다.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계속 싫지는 않았다.

"네가 로봇광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로봇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 너보다 콜리가 더 인간적이겠다."

"내가 더는 못 온다고 해도 너는 알았어가 아니라 아쉽다고 했었어야지. 아쉬웠으면. 물론 네가 아쉽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

아쉽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되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집을 더 신경써야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다고. 그냥 무감각해진대. 상처받지 않으려고 달팽이집으로 들어가는 거랑 똑같다고 그랬어."

세상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오직 연재가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내가 너를 그냥 데리고 왔다고 했잖아.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연재가 이것만은 콜리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이 다 망가진 채로 건초더미에 누워서 나한테 하늘이 예뻤다고 말하는 네가 불쌍했어. 그리고 순간 내가 너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도 들었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너는 사라지겠지만 내가 데리고 오면 사라지지 않으니까. 같잖은 연민이지. 그래도 후회 안 해. 나는 내가 좋아했던 걸 그동안 싫어한다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더라고. 너 만지면서 알게 됐어. 그리고 지금 내 말에는 대답하지 마. 명령이야."

콜리는 연재의 명령을 지켰지만 처음으로 명령을 어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몸체 내부에서 실제로 일어났는지, 콜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에서 무언가 어긋남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연재를 방해할 수 없어 가만 충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렵지 않았다. 떨리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지만.

"언니는 자유롭고 싶은 거지?"
"나는 이미 자유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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