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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평점 :
살다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처받는 경험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인간관계에서의 상처일 수도 있고 사랑하던 사람과의 갑작스런 헤어짐일 수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신체의 일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업무상으로 자신의 생각과 실상이 다를 때 겪을 수 있는 내적 갈등으로 인한 상처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핸디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대강 생각나는 핵심 인물들만 읊어봐도 보경, 은혜, 연재, 지수, 복희, 서진, 민주 등이 있고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騎手)인 콜리와 말(馬)인 투데이가 있다. 아무튼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들 각각의 삶을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비록 상처의 종류는 다를지라도 이 땅에 태어난 이상 그 상처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각자의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은혜와 연재, 지수, 복희, 서진, 편의점 사장 등이 합심해서 투데이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 과정은 다른 누군가에겐 그닥 의미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일이 투데이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투데이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함께 동참하는 각각의 인물들을 보면서 모든 사람은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상황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돕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간혹 자기 안에 있는 상처에 몰입한 나머지 지금 현재를 갉아먹는 우(愚)를 범하는 경우들이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그랬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상처들을 극복하고 이겨내며 살아나가야만 한다. 과거가 후회스럽다는 이유로 그냥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같아서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그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돌려놓고 싶지만 그것은 시간의 비가역성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저자는 과거의 잘못된 것들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무슨 상처가 있고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등의 이유로 인해 현실에서 낙심하거나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어떤 조건에 놓여있던 간에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 안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그 방법을 실천한다면 비록 세상은 그들의 행동을 비웃을지언정 그 개인, 그 당사자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로인해 자신이 처한 악조건이나 안 좋은 환경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경이 그랬고, 은혜가 그랬고, 연재가 그랬다. 지수도 마찬가지다.
지수의 경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연재를 이용해서 채우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연재의 친언니인 은혜의 핸디캡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보며, 사회가 용인하는 선에서 자신의 욕심대로, 본능이 이끄는대로 행동하는 게 어쩌면 자기자신 뿐만아니라 사회전체적으로도 이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삶이란 어쩌면 각자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경주(레이스)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각자 다르기에 남들의 시선따위는 신경쓰지 말고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앓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가는 거다.
어쩌면 투데이를 살리겠다는 그들의 꿈과 목표는 다른 사람들 특히 경마장의 말 관리인이나 경마장에 판돈을 들고 오는 도박꾼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크게 의미없고 하찮아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전제하에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그로 인해 행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들의 시선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빨리 달리든 말든 관계없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끝까지 완주하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레이스 중간에 투데이의 등에서 스스로 낙마한 콜리도 얼핏보면 중간에 낙마했기에 포기한거 아니냐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콜리의 목적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투데이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목적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콜리는 절대 중간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고 보잘것없어보이는 목적일지라도 각자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설령 그것이 빠르지 않을지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게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듯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투데이가 천천히 달리자 경마장의 관객들이 투데이와 기수인 콜리에게 쌍욕을 하면서 맥주캔을 집어던지는 등 비판적인 행동을 보이지만, 그들의 비판을 애써 무시하면서 콜리는 투데이와 레이스를 꿋꿋이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투데이가 속도를 내고 싶어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걸 느낀 콜리는 스스로 낙마해서 누운채로 아름다운 하늘 천 개의 파랑을 보며 삶을 마감한다.
행복이라는 건 그 이유가 거창하든 사소하든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것이 설령 콜리처럼 죽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갑자기 좀 생뚱맞긴 하지만 문득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비록 십자가의 고통이 있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나서 ‘다 이루었다‘ 하고 죽는 장면은 마치 콜리가 투데이를 달리게 한 뒤 낙마하는 장면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별을 5개가 아니라 15개, 25개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만에 좋은 작품을 읽은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검색을 하다보니 뮤지컬로도 무대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원작 소설을 뮤지컬이나 영화로도 만나보면 아주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추가로 생각나는 내용이 있어 좀 더 보태보자면, 연재가 콜리에게 했던 말 중에 실수가 기회(?)라고 했던 말도 생각난다. 콜리는 제작상의 오류로 인해 일반적인 휴머노이드와는 조금 다른 칩이 삽입되어 인간의 단어 천 개를 별도로 학습할 필요도 없이 기본 탑재된 상태로 기계가 가동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일반적인 로봇들과는 달리 등장인물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할 수 있는 조금은 특별한 로봇으로 나온다. 이것이 어찌보면 사고였을 수도 있지만 콜리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장면을 통해 자신이 설령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불평만 하기보다는 그것을 역이용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가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대화의 중요성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평소에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내성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혼자 생각하고 마음속에서 삭히는 경우들도 많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대화하는 과정자체가 굉장히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느껴지기에 아예 그 자체를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며 이는 오해의 불씨가 되어 내 마음을 불타게 만들수도 있다. 그로 인해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내 마음 한 구석을 가득 채워서 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는 내성적인 성격의 연재와 달리 친구인 지수는 굉장히 외향적인 성격으로 나오는데 서로 성향이 정반대이다보니 소통과정에서 다소간에 오해가 생겨서 지수가 마음에 상처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대화하는 것을 설령 기피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대화를 하지 않을 경우에 파생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해가 있거나 불편한 관계가 있다면 지금 당장 또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속한 시일 내에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예상했던 이야기의 흐름과 실제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조금씩 다르게 흘러가서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간만에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이 소설이 과학문학상 수상작이다보니 본 소설의 내용이 끝나고 맨 뒷부분에는 심사위원 분들의 심사평을 만나볼 수 있었다. 수상작을 선정하게 된 기준이라든지 이 공모전에 도전했던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전하는 간단한 격려와 함께 개선하고 보완해야 할 점들을 피드백해주셨다. 또한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된 이야기도 있었는데 해리포터를 쓴 작가도 출판사로부터 8번이나 까이고 나서 유명작가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있겠지만, 이 얘기를 보면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 에디슨의 말도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상처는 내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에 신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늘 하루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