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 소설의 화자인 경하가 뭔가 환상 또는 환영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 나온다. 아직은 이것이 뭐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인 내 나름대로 추측해보자면 이것은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은 이유를 아냐고 물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은 무언가를 부정하는 No의 의미로 쓰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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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보니 제주 4.3 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된 증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건 잘 몰라도 그 참혹함만큼은《소년이 온다》에서 느꼈던 것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추가로 인선이 보관하고 있던 각종 신문 기사 스크랩들과 인선의 어머니인 강정심으로부터 인선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통해, 100% 완성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 있었던 일들을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추론해볼 수 있었다. 또한 인선의 외삼촌과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썰 등을 통해 그들이 어쩌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확률적으로는 극히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남아있을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듯한 가족들의 모습도 기억에 남았다.

의자를 뒤로 밀고 나는 일어섰다. 날아오르려는 것인지 내려앉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서까래와 마루 사이에 영원히 갇힌 듯 퍼덕이는 그림자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촛불과 그림자 사이 새의 육체가 있어야 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 P204

아니.
무성음들이 포개지며 한마디 말처럼 들렸다.
......아니, 아니.
환청인가, 의심하는 찰나 단어가 부스러져 흩어졌다. 헝겊 스치는 소리가 잔향을 끌고 사라졌다. - P205

오래 혼자 있으면 혼잣말을 하게 되잖아. - P205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더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 P206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 P206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 P206

새는 양안시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얼굴을 움직여 전체의 상을 보는 거라고 했다. - P207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 P208

뭔가가 더 남아 있어, 아미가 이렇게 있다 가고 나도. - P208

뼈들을 본 뒤부터야.
인선이 말했다.
......만주에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 P209

만주 촬영이라면 벌써 십년 전, 인선이 후암동에 살던 때다.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나는 물었다.
제주공항, 하고 대답하며 인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활주로 아래에서. - P209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던 유골 한 구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어.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 P211

그 유골만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이유가, 흙에 덮이는 순간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그때 들었어. 그 유골의 발뼈에만 고무신이 제대로 신겨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고무신도, 전체 골격도 크지 않은 걸 보면 여자거나 십대 중반의 남자인 것 같았어. - P212

겨울이 되면서는 흉내내듯 책상 아래 모로 누워 무릎을 구부려보기도 했어.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겨울 볕이 깊게 들거나 온돌 바닥이 데워져서 퍼지는 온기와는 달랐어.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방을 채우는 게 느껴졌어. 솜이나 깃털, 아기들 살을 만지고 나면 손에 부드러움이 남잖아. 그 감각을 압착해서 증류하면 번질 것 같은...... - P212

이름은 물론 성별도 당시 나이도 모르는 사람. 조금 가는 골격에 작은 사이즈의 고무신을 신은, 전쟁발발 직후 제주에서 예비검속돼 총살된 천여 명 중 한 사람. - P212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귀밑머리와 목덜미와 두 손만 보이게 할 생각이었어. - P213

그 일을 한번 더, 다시 한번 더 반복했어. - P214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높은 사름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왕 반듯이 바닥을 보고 서서. 무신 벌을 줄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젠 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멍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뒤쪽에 이시던 여남은 명이 금 밖으로 튀어그네 우리집 쪽으로 막 도망 오는 거라. - P224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 이시던 사람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 그네 한 사람씩 바당에다 데껴 넣어신다.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 P224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 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 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 P226

무슨 연구소 사름들이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주. 직접 본 사름이 몇 명 엇다고, 죽기 전에 이야기 안 하민 아무도 모르게 된다 허멍 부탁하는 거라. 틀린 말 아니다 싶어그네 그때 처음 고랐져. 한번 그래놓으난 다른 데서도 오데. 이야기 시켜놓곡 가불고 나민 메칠 혼자 속 시끄러울 거 알지마는 엔간하면 다 해줘서. - P227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 하라민 해야 되는 세상이라. - P228

죽는 날까지 우리 서방은 군경 욕을 안 해서 좋다 나쁘다 아예 입에 담질 않아서. 대신 빨갱이라 허멍 질색을 했주게. 무장대 그사람들이 한 거 무신거 있느냐고. 경찰 멫 명 죽이고 죄 어신 가족헌티 복수하고 산에 도망가면 그 마을에서만 이백 명 삼백 명이 보복으로 떼죽음 당햄신디. 지상낙원 만든다 허멍 그거 지옥이주게 어떵 낙원이냐곡. - P229

심장이 아프셨어?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덤덤하게 그녀가 대답한다.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 P235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 P237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 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 내가 있잖아. - P238

불길이 번졌던 자리에 앉아 있구나. 나는 생각한다.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에 앉아 있다. - P244

세상이 달라진다마씀. - P248

두 자매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시신들은 국민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교문 건너 보리밭에서 눈에 덮여 있었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패턴이 같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다음 근처 밭이나 물가에서 죽였어. - P249

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대. 피에 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구멍을 찾아냈다. 뺏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다. 총알이 턱뼈의 일부를 깨고 날아간거야. 뭉쳐진 머리카락이 지혈을 하고 있었는지 새로 선혈이 쏟아졌다. - P250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1

그 어린것이 집까지 기어오멍 무신 생각을 해시크냐? 어멍 아방은 숨 끊어져그네 옆에 누웡 이신디 캄캄한 보리왓에서 집까지 올 적에난, 심부름 간 언니들이 돌아올 걸 생각해실 거 아니라? 언니들이 저를 구해줄 거라 생각해실 거 아니라? - P252

어둠에 잠긴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물속의 적막같다. 창을 열면 검은 물살이 쏟아져 덮칠 것 같다. - P254

엄마를 잘 몰랐어.
몸을 일으켜 캄캄한 책장으로 다가서며 인선이 말한다.
지나치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 P255

입맛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259

네 편지 읽고 많은 생각 하였다 내가 나가면 너는 스물한 살 정숙이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여덟 아니냐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마는 눈물 흘릴 것이 무어 있나 쇠털같이 많은 날을 만나 옛이야기 할 수 있는데 정숙이한테 그리 일러주어라 - P260

남의 말만 믿고 자리를 떴다가 엇갈리면 안 된다고,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리자고 - P265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 P267

당시 서청들의 무법 행위가 상상을 넘어섰다고 엄마는 말했어, 강간과 납치 살인이 흔하게 벌어지니까 적당한 혼처만 있으면 서둘러 처녀들을 결혼시키는 분위기였다고. - P269

제주 가는 배를 대합실에서 함께 기다리는 동안 이모가 엄마에게 말했다. 포기하자고. 오빠는 죽었다고. 진주로 이감됐다는 날짜를 기일로 하자고. - P271

날마다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니까 재소자들부터 골라내 총살했어. 그때 죽은 좌익수 천오백여 명에 제주 사람 백사십여 명이 포함돼 있었어. - P273

여러 날에 걸쳐 군용 트럭이 광산으로 들어갔어. 새벽부터 밤까지 총소리가 들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갱도가 시체로 가득찬 다음엔 근처 골짜기로 장소를 옮겨서 총살하고 매장했어. - P274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 P281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 P286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때 엄마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염이 악화되던 때야. - P288

그때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갱도 속에 쌓인 수천 구의 몸들 중 하나. 동시에, 불 켜진 집들의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 그곳에서 옷을 얻은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사람. 이건 얼른 태워버리십시오. 피투성이 수의를 마당에 남기고 암흑 속으로 달려 사라지는 사람. - P292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깨끗이 청소하갔어.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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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메인에 슬램덩크 전자책이 나왔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어릴적 TV매체를 통해 또는 오늘 시작한 이 신장재편판 이전에 나온 책들을 통해 접해보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지나 지금 현재는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번 기회에 과거에 접했던 스토리들을 추억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놓치고 지나갔던 부분들이 있다면 새롭게 기억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시작해본다.

덩크슛은 농구의 가장 화려한 볼거리야! 가장 멋지고 가장 관객을 열광케 하는 플레이거든! - P27

특히 골대가 부서질 정도로 공을 과격하게 내리꽂는 것을 슬램덩크라고 해. - P27

끈기없는 사람은 농구부원이 될 수 없다고 했거든. - P40

어떤 녀석이라도 내 잠을 깨우는 건 용서할 수 없다. - P57

승부는 한순간에!! - P95

그래!! 매처럼!!
먹이를 낚아채는 날랜 움직임!! - P95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다간 놈의 생각대로 되는 거야!! - P95

올해야말로...
꿈을 이룰 수 있겠군. - P109

저 녀석을 보면 뭔가 저지를 것 같단 말이야.
아, 그래.
왠지 보통 녀석이 아닌 것 같아. - P121

히야~공을 완전히 가지고 노네!! - P123

공을 들고 3보 이상 가면 안 돼!!
드리블을 해야지!! - P123

내버려둬!!
자기 좋을 대로 하게. - P123

공을 골대 안으로.... 내리친다!!! - P134

바보는 혼자 놀게 놔둬! - P145

올해 목표는 전국 제패다!! - P173

백호야, 농구는 기초가 중요해. 힘내라고!! - P177

왜, 나만 구석에서 탕탕 공만 튕겨야 하냐!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 - P192

네 녀석은 스포츠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다!!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 - P195

제아무리 덩크를 잘할 수있다 해도 기본을 모르는 놈은 시합에 나가더라도 허수아비일뿐이다!! - P195

난 슬램덩크만 하면 된단 말야!! 그냥 내버려두면 좋잖아!! - P196

제길!! - P197

꾸준한 노력은 언젠가 꼭 보상받게 된다고 오빠가 그랬어. - P231

봐주는 것 없기다!! - P235

예술이라고까지 표현된 ‘스카이 훅‘을 무기로 20년동안 NBA의 톱에 군림해온 그(카림 압둘 자바)를 사람들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렀다. - P244

저 녀석, 겉보기엔 멍청해보이지만 속은 지독한 승부근성이 있어. - P257

나도 지기 싫은 성질로는 아무한테도 안 진다! - P261

자유투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던질 수 있는 거야. - P264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 P265

남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공부야! - P269

흥! 뭐 좋아. 난 저 주장한테도 이긴 사람이니까. - P269

그래!! 말하자면 높은 자리에서 구경이나 한다 이거야!! - P269

헤헤... 서태웅 따위완 질적으로 다르지!!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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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결핍에 대해 말하는데, 특별히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어떤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결핍감에 대해 나온다. 만약 만성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문제와 관련없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그 미해결된 문제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기에 어떤 일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 효율성 측면에서 굉장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에 나온 각종 연구들에 따르면 어떤 소음이나 잡생각 등과 같은 방해요인들이 있을 경우 그런 것들이 없는 경우에 비해 성취도에 있어서 엄청나게 큰 손해를 본다고 한다.

독자인 나는 상대적으로 소음같은 것들에 민감한 편인데, 오늘 본문을 통해 나의 이런 민감함이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을 차지하고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은 굳이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생겨난 산만함은 현실 속의 기차보다 더 강력하게 주의를 사로잡을 수 있다. 이 잡생각의 기차는 개인적인 상념을 싣고 우르르 쾅쾅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달려간다. - P-1

지속적인 근심거리는 우리의 정신을 잡아당기고 우리를 빨아들인다. 외부의 소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명쾌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산만함을 조장하듯, 결핍도 사람들의 내면에 그런 혼란을 생성한다. - P-1

내면의 생각이(심지어 머릿속으로 일련의 숫자를 외우는 것조차도) 전반적인 인지 기능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입증한 논문이 굉장히 많다. - P-1

잡생각과 관련된 뇌 활동에 따른 산만함은, 뇌의 부하가 높을 때 증가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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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는 친구인 인선의 부탁을 받고 인선의 집에 있는 새(아마)를 구하기 위해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폭설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인선의 집에 도착했지만, 중간에 길을 잃고 낙상하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 나머지 새(아마)는 이미 죽은 뒤였다. 경하는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왔다면 하는 자책을 하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새(아마)를 안전한 바구니에 넣어서 땅 속 깊은 곳에 매장한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새(아마)를 매장하는 모든 작업을 끝낸 뒤 경하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인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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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는 인선이 과거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던 시절에 어느 한 인터뷰이를 상대로 인터뷰를 했던 내용이 나온다. 독자인 내가 이 책의 소개글 등을 통해 접한 내용들에 따르면 여기서부터 나오는 인터뷰 내용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주 4.3사건‘ 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사건에 관해 이미 잘 알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이다. 만약 잘 몰랐던 분들이라면 이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때 당시의 상황을 느껴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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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중후반부 부터는 챕터가 바뀌는데,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잘 인지하지 못했으나 어느순간부터 본문에 인선이라고 나오는 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느낌보다는 육신이 없는 영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본문에 나온 문장들 중에 이렇게 추론할만한 근거가 되는 몇몇 문장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 더 할일이 없다. - P156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 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 P156

이 섬의 동굴들은 입구가 작아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니까 돌로 가려놓으면 감쪽같은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놀랄 만큼 커집니다. 1948년 겨울엔 한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 몸을 피한 곳도 있어요. - P158

아버지와 내가 가곤 했던 동굴은 그만큼 크지는 않았어요. 많아야 여남은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 - P158

공기가 항상 축축했던 기억이 나요. 동굴에 들어가기 직전엔 늘 비나 눈을 맞았던 것도. 맑은 날씨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버지는 낮은 기압에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눈비가 오면 관절이나 근육이 아픈 사람들처럼. - P159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 P159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 P159

감기 들리면 안 돼여. 정신 바짝 차리민 아프지 않을 수 이서. 정말로 멩심해야 돼여. - P160

그 집에 이시면 안 돼여. - P160

밤낫이 어신 거라이. 군사작전이라는 건. - P160

어멍이 기다릴 건디.
내가 어멍이라는 말을 뱉은 순간 아버지의 몸 전체가 움찔 떨리는 걸, 전류가 옮겨온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릴 따라와서야 해신디. - P160

어떵할 수가 이시냐. 억지로 끄성 올 방법이 어디 이시냐. 아이를 살려사주. 이 아이가 무신 죄가 이서. - P160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고 있었을 상상들의 내용을 몰랐지만,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내 손을 잡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조용한 전율이, 빨래를 쥐어짜는 순간 쏟아지는 물처럼 손을 적시는 걸 느꼈어요. - P161

동서로 긴 타원의 섬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 P161

놀라울 만큼 노이즈 없이 선명한 흑백 무성 영상이 뒤따라 들어왔다. 초가지붕들이 불탔다. 검은 연기가 불꽃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검이 장착된 장총을 멘 옅은 색 제복의 병사들이 현무암 밭담을 뛰어넘었다. - P161

어둠이요.

어둠이 거의 기억의 전부예요. - P161

어둠 속에서, 다른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결에라도 내가 소리 내지 않게 하려고, 언제 그 굴 앞을 지나갈지 모를 존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 P162

동굴로 가다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조릿대를 꺾었어요. - P162

나한테는 앞장서 가라고 하고, 아버지는 바닷게처럼 옆걸음을 걸어서 나를 따라왔어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조릿대 잎으로 쓸어 지우면서. - P163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 P163

언젠가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어요.
느네 아방이 소나이다워시민 아마 내가 싫어실 거라. 처음 봐신디 소나이 얼굴이 얼마나 곱닥하던지. 십오 년을 햇빛을 못 봐난 그래나신가. 살갗이 버섯같이 히영했주게. 그런 사름을 다들 피하는 게 잘도 이상해서. 죽었던 사름이 돌아온 것추룩. 눈초리 한 번만 섞어도 귀신을 옮길 사름인 것추룩. - P164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어두운 방인데도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어요. - P165

깜박 잠들었다 통증 속에 깰 때마다 뼈들의 희끗한 형상이 파고든다. 인선의 마지막 영화가 끝나기 직전, 유골 수백 구가 묻힌 구덩이가 맥락도 설명도 없이 일 분 가까이 클로즈업되었던 장면이다. 무릎을 구부려 올린 사람의 유골, 삭은 천조각이 허리에 걸쳐진 유골, 작은 발뼈에 고무신이 신겨진 유골 들이 밭고랑 같은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다. - P167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 P168

숨을 다시 쉴거지. 아마. 심장이 다시 뛸 거지. 그렇지, 이 물을 마실 거지. - P170

새들이 건강해 보이는 건 믿을 수 없어, 경하야.
끝까지 고개를 들고 횃대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 이미 죽은거야. - P171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2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왜 가지가 없어, 잎도 없어.
무시무시한 대답이 목구멍 안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죽었잖아.
그 말을 삼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퍼덕이는 새가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통증을 견뎠다.
다 죽었잖아.
부리를 벌리고 발톱을 세운 그 말이 입안에 가득찼다. 꿈틀대는 솜 같은 그걸 뱉지 않은 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P176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퍼붓는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모두 지운다. - P177

어둑한 마루를 빛의 기둥으로 훑어보다 숨을 멈췄다.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창백한 광선의 기둥이 관통한 새장 속에서, 횃대에 발을 걸고 앉은 새가 한번 더 삐이, 울었다.
아마.
갈라져 나온 내 목소리가 정적 속에 흩어졌다.
너는 죽었잖아. - P179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감싸고 여민 손수건을 비집고, 친친 감아 매듭지은 실을 풀고, 귀를 맞춰 닫은 알루미늄 통을 열고, 수건으로 감싼 뒤 십자로 묶었던 실을 끊는 것은. 얼어붙은 봉분과 그 위로 쌓인 눈을 뚫고 날아올라, 잠긴 문 안으로 들어와 철망 속이 횃대에 앉는 것은. - P180

죽은 다음에도 배고픈 게 있어? - P181

새들에게 간식이 아닌 식사를 줄 때는 반드시 새장에서 먹게 해야 한다고 인선은 말했었다. 그러지 않으면 새장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게 되고, 제시간에 재울 방법이 없게 되며 결국 모든 규칙이 깨진다는 거였다. - P182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인선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들었다. 그녀도 그 바람구멍 속을 보고 있었다.
하도 생각해서 어떤 날엔 꼭 같이 있는 것 같았어. - P190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주전자와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걸어오며 인선이 되뇌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 P192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 P192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 P192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 P193

잔에서 입술을 뗀 인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뱃속에도 이 차가 퍼지고 있을까.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 P194

나는 더 차를 마셨다. 위가 뜨겁게 채워질수록 수그렸던 어깨가 펴지고 허리가 곧아졌다. - P195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 P195

혼자가 아닌데, 나는.
고요한 사랑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P196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 P197

오늘 우리 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에야 나는 알았다. 오랜만에 만나면 언제나 서로 어깨를 안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인사를 나누는 동안엔 손을 잡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었나. 몸이 닿는 순간 상대의 죽음에 전염될 것처럼. - P198

인선이 성큼성큼 앞장서는 대로 나는 뒷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발이 디딘 곳으로만 걸으니 신기하게도 어떤 나무에도 부딪히지 않았고 피를 밟지도 않았다. - P199

아마는 잠들었을 거야. 깨우지 말자. - P200

새 그림자가 흰 벽 위로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의 몸피만큼 커진 그림자였다. 꿈틀거리는 날개 근육과 반투명한 깃털들의 세부가 확대경을 통과한 것처럼 선명했다. 이 집에 존재하는 광원은 내 앞의 촛불뿐이었다. 저 그림자가 생기려면 촛불과 벽 사이로 새가 날고 있어야 한다. - P203

몇 초 만에 가버릴 때도 있고, 날이 밝을 때까지 머무르기도 해. - P204

헝겊들이 서로 스치는 것 같은, 젖은 흙덩이가 손가락 사이로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어디선가 새어나왔다. 인선의 것과 닮은 소리였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녀가 아니라 서울의 병실에 누운 인선이 손이 아니라 성대를 다친 듯 목을 울리지 않으며 내던 무성음과 어딘가 흡사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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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거의 2달 전이었는데, 초반부만 살짝 읽다가 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먼저 읽다보니 본의 아니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었다. 가장 최근에는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이 수록된 책인《빛과 실》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그간 작가님이 써오신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에세이에 수록된 작품들을 그냥 생각나는대로 읊어보자면,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별하지 않는다》정도가 떠오른다.

《빛과 실》을 읽기 전에 개인적으로는《작별하지 않는다》외의 다른 작품들은 완독을 이미 한 상태였기에 그간 읽었던 작품들의 스토리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보면서 작가님의 의도나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에세이를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아서 근 2달만에 다시 집어들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잡설이 굉장히 길었고,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경하가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인선은 목공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하게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상태인데, 자신의 집에 있는 앵무새 한 마리(아마)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자신의 집으로 가서 자기 대신에 그 새를 봐달라고 급하게 경하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에 함박눈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인선의 집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 힘든 와중에 경하는 인적이 드문 길에서 우연히 어떤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데, 경하는 그 할머니에게 말을 건넬지 여부를 마음 속으로 재고 있다. 그러면서 경하는 인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인선은 붙임성이 좋아서 처음보는 할머니를 만나도 금세 친해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경하가 인선에게 처음 보는 할머니들과 금방 친해지는 비결을 물었을 때 인선이 답한 것인데, 확실히 사람이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더 빠르게 적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는 말도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 같은 엄마가 키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 P97

그날 밤에 대해 당신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 사람이 묻습니다. - P97

이 섬에서는 손윗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선은 나에게 말해줬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외지인밖에 없어. 삼춘이라고 일단 부르면, 설령 그다음에 제주 말을 못한다 해도 섬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싶어 경계를 덜 하게 되지. - P98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 P99

입맛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101

꼭 생시 같은 꿈이 있으니까. - P104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그 밤에 군인들이 왔지. - P108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P109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P109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낭氣囊이라고 - P109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 P109

왜 그때 내 눈앞에 발생 초기 태아의 형상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심장박동이 감지될 무렵의 몸무게가 그 정도(이십 그램)라고 오래전에 들었다. 그 시기, 알에 담긴 듯 동그랗게 웅크린 태아의 형상은 새끼 새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해 보였다. - P110

새들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공룡이라는 과학잡지의 기사도 그 무렵 읽었다. 거대한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의 표면이 불타며 끓어오를 때, 대기층을 덮어 지상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물론 식물들까지 절멸시킨 화산재 속에서 몇 달을 날아 버틴 생명체가 깃털 공룡ㅡ새들이라는 것이었다. - P111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 P112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같은 걸까. - P114

그러니까 지금 인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녀의 집으로 가는 거다. - P120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야, 이래가지고.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 P120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 - P121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츰 마비되어, 그 낯선 할머니와 작별한 일이 어느 사이 멀어진다.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 P122

내가 잘못 들어서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지금 누워 있는 이 길은, 길이 아니라 건천인 것 같다. 우묵하게 파인 지형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고 그 위로 눈이 쌓인 것이다. 이 화산섬에는 하천이 거의 없고 폭우와 폭설에만 흐르는 마른 물길이 드물게 있다. 이 건천을 경계로 원래는 마을이 나누어졌다고 인선은 산책길에 말했었다. 내 너머로 사십 호 안팎의 집들이 모여 있었다고, 1948년 소개령 때 모두 불타고 사람들이 몰살되며 폐촌되었다고 했다. - P127

그러니까 그때까진 외딴집이 아니었던 거지. 내 하나 건너면 마을이 있었으니까. - P127

그 버스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 P128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 P135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 P136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6

삼만 명이었어요. - P136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 P136

그 숫자들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곳들이 모두 고립된 섬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 P137

생생한 기억들이 동시에 재생된다. 순서도, 맥락도 없다. 한꺼번에 무대로 쏟아져나와 저마다 다른 동작을 하는 수많은무용수들 같다.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 P137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 P138

잠들고 싶다.
이 황홀 속에서 잠들고 싶다.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P138

하지만 새가 있어. - P138

손끝을 건드리는 감각이 있다.
가느다란 맥박처럼 두드리는 게 있다.
끊어질 듯 말 듯 손가락 끝으로 흘러드는 전류가 있다. - P138

더 만져달라는 거야. - P141

더, 계속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 P141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 P141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 P142

조금씩 다른 농도로 칠해진 그 검은 나무들이 어떤 말을 하는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P145

움직여봐.
내가 구하러 왔어. - P149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는다.
더이상 따스하지 않은 것이.
죽은 것이. - P149

방금까지 따뜻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 - P151

솜요를 밟고 옷장에 다가서며 생각한다. 지금도 실톱이 아래에 있을까. 톱날들이 악몽을 물리치는 건가, 그 날카로운 걸 미리 꿈이 피해가는 건가. - P151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 P152

어디에 묻어야 할까.
처마 아래 상자를 두고 삽을 들며 나는 생각한다.
인선이라면 어디 묻으려 할까. - P153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 P155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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