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의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채 빨갱이로 몰려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아주 세세한 이유까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소설 속 시대 배경 자체가 1950년에 발발했던 6.25전쟁 무렵인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국가가 공권력을 통해 북한과 관련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려했던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중에 진짜 간첩들도 있었겠지만,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쌀이나 곡식을 준다는 이유로 공산당 명부에 형식상으로만 이름을 올렸다가 봉변을 당한, 다소 억울하다고도 볼 수 있는 죽음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다소 안타까운 죽음들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당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힘을 합쳐 그 당시의 상황들에 대한 진상조사 등을 하는 장면들도 나오는데, 본문을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면서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식의 무자비한 학살같은 것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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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마지막 챕터인 3부 ‘불꽃‘ 이 나온다. 여기서는 뭔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듯한 느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간에 있었던 쉽지 않았던 시간들을 추측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독자인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루 말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수건이 덮인 아버지 얼굴에 그 사람이 끝없이 물을 부었다고 했어. 젖은 가슴을 야전 전화선으로 묶고 전기를 흘려넣었다고 했어. 산사람과 내통한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그 사람이 속삭일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고 했어. 모루쿠다.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 - P297

기억나는 건, 그렇게 물을 때면 엄마가 내 손을 놓았던 거야. 너무 세게 잡아 아플 정도였던 악력이 거품처럼 꺼졌어. 누군가가 퓨즈를 끊은 것같이 듣고 있는 내가 누군지 잊은 것처럼. 찰나라도 사람의 몸이 닿길 원치 않는 듯이. - P298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뻗어 뼈들의 사진 위에 얹었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 P302

이제 닿은 건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 P302

대답을 망설이며 나는 서 있었다.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적 속에 더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 P303

경하야.
인선이 나를 불렀다.
내가 디딘 데만 딛고 와. - P304

돌아가자. 나는 말했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 P307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 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 P314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 P314

엄마가 모은 자료들의 빈자리에 내가 새로 찾은 것들을 메꿔 넣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어. - P315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 P316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 P316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 P317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P317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 P318

눈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인선이 다음 말을 잇기를.
아니, 잇지 않기를. - P319

이상해, 경하야.
네 생각을 날마다 했는데 정말 네가 왔어.
하도 생각해서 거의 네가 보일 것 같은 때도 있었는데.
캄캄한 어항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유리에 얼굴을 붙이고 끈질기게 들여다보면 뭔가 안쪽에서 어른거리는 것같이. - P320

아직 사라지지 마. - P324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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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농구부 주장인 채치수가 영어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지시로 영어문장을 번역한 것인데, 왠지 모르게 멋있어 보여서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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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강백호의 운동능력을 눈여겨보던 유도부 주장 유창수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강백호를 농구부가 아닌 유도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유창수는 강백호가 짝사랑하고 있는 소연이의 어릴적 사진들을 미끼로 하여 강백호를 유혹하지만, 단순한 성격인 강백호는 유도부에 들어가는 것엔 전혀 관심없고 그저 소연이의 사진만 갖고 싶어할 뿐이다.

이에 두 사람은 격렬한 몸의 대화(?)를 나누게 된다. 싸움이 한 판 붙은 것이다. 서로 한 방씩 치고 받는데, 결국 강백호는 유도부 주장 유창수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고 농구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자신이 바스켓맨이니까 농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단순한듯 보이지만 강백호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도부 주장 유창수는 이 상황을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강백호의 불굴의 의지 앞에선 그도 어쩔 수 없는 눈치였다.

‘아침... 그것은 희망찬 하루의 시작‘
‘사람들은 그 눈부신 빛을 우러러 갖가지 색깔의 행복을 희구한다‘. - P11

실력으로 뺏을 거야. - P55

복잡한 건 내 성미에 안 맞아!! - P64

나도 모르게 메다 꽂았어.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 P71

잡는 순간 마치 짐승과 마주친 것 같은 살기를 느끼고 나도 모르게 던져버리고 말았다... - P74

유도는 잡는 순간에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는거다!! - P75

그건... 강백호가 결정할 일이야. - P83

농구는 남에게 억지로 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 P83

난 농구를 할 거야. - P91

난 바스켓맨 이니까...!! - P92

앗!! 저기 나의 진짜 소연이가!! - P97

역시 진짜가! 더 좋아...♡ - P97

남을 비난하는 건 그만둬. - P107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한테 실례잖아. - P108

나 참!! 팬으로서의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야 할 거 아니니!! - P108

드리블이나 패스에 기초가 있듯이 슛에도 기초가 있는 거야! - P111

슛이란 건 넣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닌가요? 저런 시시한 슛보다 슬램덩크가 훨씬 멋진데.... - P111

시합에서는 언제나 상대의 디펜스가 있는 법이다....
덩크슛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단 말이다!! - P112

전에도 말했지만, 기본을 모르는 녀석은 시합에서 아무 쓸모가 없어!! - P112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 P123

알았냐, 강백호? 어깨 힘을 빼고 좀 더 부드럽게 슛해야 해. - P133

가볍게 볼을 놓고 온다는 기분으로 하면 되는 거야. - P133

너무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마. - P133

그리고 남이 하는 걸 잘 보지 않으면 안 돼. - P133

그랬구나. 소연이도 노력했던거야... 나도 노력해야지... - P146

뭔가 요령이 있을 거야. 그것만 알아낸다면 나라고 못할 거 없지. - P151

우선 무릎을 부드럽게 하고 몸 전체로 뛴 다음, 볼을 링에 두고 오는 그런 감각이랄까? - P153

일찍 일어나길 잘했다. - P157

멍청아! 슛은 반복 연습이 가장 중요한 거야. 들떠있을 시간 있거든 연습이나 해! - P171

남이 알면 남모르는 노력이 아니지.... - P175

내가 쓰러뜨린다고!! - P199

발을 멈추지마라!! 손을 더 높이 들어!! - P208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시합을 제압한다!! - P217

(권투에서) 왼쪽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제압한다는 것과 비슷한데!!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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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5-11-10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에서도 채치수, 강백호, 엄태웅과 같은
아주 오래 전의 이름을 사용하나요?
제가 대학교 다니던 때가 바로 미국의 NBA가 세계를 흥분으로 몰아넣고
Michael Jordan의 전설이 시작되는 때라서
제 청춘의 Sport는 농구라 할 수 있는데
만화책 오타쿠인 저야 당연히 슬램덩크 구판의 전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이런 추억의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11-10 14:25   좋아요 1 | URL
예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듯합니다. (아, 다만 써주신 이름 중에 엄태웅은 아마도 서태웅일겁니다.) 스토리도 아마 거의 대동소이 할 겁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예전에 나온 구판이 신장재편판보다 책 사이즈는 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신장재편판은 책 크기가 다운사이징된 느낌입니다. 다만 표지 디자인에 있어 신장재편판이 좀 더 칼라풀해진 것 같습니다. 요새 알라딘에서 슬램덩크 전자책이 출시되었다고 이벤트를 하길래 갑작스럽게 관심이 생겨서 짬날 때 읽어보게 되었네요.ㅎㅎ

Jeremy 2025-11-10 14:36   좋아요 1 | URL
ㅎㅎ. 엄태웅과 서태웅.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1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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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인물들의 명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뇌리에 쏙쏙 박힌다. 또한 농구규칙도 아직 잘 모르지만, 자신의 운동능력 하나 믿고 마구 들이대는 강백호의 자신감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강백호의 친구로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까지는 잘 몰랐었는데, 본문에 나온 소개를 통해 그들의 이름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엑스트라 당사자들은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으나 엑스트라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게 독자 입장에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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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 소설의 화자인 경하가 뭔가 환상 또는 환영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 나온다. 아직은 이것이 뭐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인 내 나름대로 추측해보자면 이것은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은 이유를 아냐고 물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은 무언가를 부정하는 No의 의미로 쓰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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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보니 제주 4.3 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된 증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건 잘 몰라도 그 참혹함만큼은《소년이 온다》에서 느꼈던 것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추가로 인선이 보관하고 있던 각종 신문 기사 스크랩들과 인선의 어머니인 강정심으로부터 인선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통해, 100% 완성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 있었던 일들을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추론해볼 수 있었다. 또한 인선의 외삼촌과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썰 등을 통해 그들이 어쩌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확률적으로는 극히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남아있을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듯한 가족들의 모습도 기억에 남았다.

의자를 뒤로 밀고 나는 일어섰다. 날아오르려는 것인지 내려앉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서까래와 마루 사이에 영원히 갇힌 듯 퍼덕이는 그림자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촛불과 그림자 사이 새의 육체가 있어야 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 P204

아니.
무성음들이 포개지며 한마디 말처럼 들렸다.
......아니, 아니.
환청인가, 의심하는 찰나 단어가 부스러져 흩어졌다. 헝겊 스치는 소리가 잔향을 끌고 사라졌다. - P205

오래 혼자 있으면 혼잣말을 하게 되잖아. - P205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더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 P206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 P206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 P206

새는 양안시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얼굴을 움직여 전체의 상을 보는 거라고 했다. - P207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 P208

뭔가가 더 남아 있어, 아미가 이렇게 있다 가고 나도. - P208

뼈들을 본 뒤부터야.
인선이 말했다.
......만주에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 P209

만주 촬영이라면 벌써 십년 전, 인선이 후암동에 살던 때다.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나는 물었다.
제주공항, 하고 대답하며 인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활주로 아래에서. - P209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던 유골 한 구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어.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 P211

그 유골만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이유가, 흙에 덮이는 순간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그때 들었어. 그 유골의 발뼈에만 고무신이 제대로 신겨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고무신도, 전체 골격도 크지 않은 걸 보면 여자거나 십대 중반의 남자인 것 같았어. - P212

겨울이 되면서는 흉내내듯 책상 아래 모로 누워 무릎을 구부려보기도 했어.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겨울 볕이 깊게 들거나 온돌 바닥이 데워져서 퍼지는 온기와는 달랐어.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방을 채우는 게 느껴졌어. 솜이나 깃털, 아기들 살을 만지고 나면 손에 부드러움이 남잖아. 그 감각을 압착해서 증류하면 번질 것 같은...... - P212

이름은 물론 성별도 당시 나이도 모르는 사람. 조금 가는 골격에 작은 사이즈의 고무신을 신은, 전쟁발발 직후 제주에서 예비검속돼 총살된 천여 명 중 한 사람. - P212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귀밑머리와 목덜미와 두 손만 보이게 할 생각이었어. - P213

그 일을 한번 더, 다시 한번 더 반복했어. - P214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높은 사름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왕 반듯이 바닥을 보고 서서. 무신 벌을 줄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젠 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멍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뒤쪽에 이시던 여남은 명이 금 밖으로 튀어그네 우리집 쪽으로 막 도망 오는 거라. - P224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 이시던 사람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 그네 한 사람씩 바당에다 데껴 넣어신다.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 P224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 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 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 P226

무슨 연구소 사름들이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주. 직접 본 사름이 몇 명 엇다고, 죽기 전에 이야기 안 하민 아무도 모르게 된다 허멍 부탁하는 거라. 틀린 말 아니다 싶어그네 그때 처음 고랐져. 한번 그래놓으난 다른 데서도 오데. 이야기 시켜놓곡 가불고 나민 메칠 혼자 속 시끄러울 거 알지마는 엔간하면 다 해줘서. - P227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 하라민 해야 되는 세상이라. - P228

죽는 날까지 우리 서방은 군경 욕을 안 해서 좋다 나쁘다 아예 입에 담질 않아서. 대신 빨갱이라 허멍 질색을 했주게. 무장대 그사람들이 한 거 무신거 있느냐고. 경찰 멫 명 죽이고 죄 어신 가족헌티 복수하고 산에 도망가면 그 마을에서만 이백 명 삼백 명이 보복으로 떼죽음 당햄신디. 지상낙원 만든다 허멍 그거 지옥이주게 어떵 낙원이냐곡. - P229

심장이 아프셨어?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덤덤하게 그녀가 대답한다.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 P235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 P237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 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 내가 있잖아. - P238

불길이 번졌던 자리에 앉아 있구나. 나는 생각한다.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에 앉아 있다. - P244

세상이 달라진다마씀. - P248

두 자매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시신들은 국민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교문 건너 보리밭에서 눈에 덮여 있었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패턴이 같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다음 근처 밭이나 물가에서 죽였어. - P249

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대. 피에 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구멍을 찾아냈다. 뺏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다. 총알이 턱뼈의 일부를 깨고 날아간거야. 뭉쳐진 머리카락이 지혈을 하고 있었는지 새로 선혈이 쏟아졌다. - P250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1

그 어린것이 집까지 기어오멍 무신 생각을 해시크냐? 어멍 아방은 숨 끊어져그네 옆에 누웡 이신디 캄캄한 보리왓에서 집까지 올 적에난, 심부름 간 언니들이 돌아올 걸 생각해실 거 아니라? 언니들이 저를 구해줄 거라 생각해실 거 아니라? - P252

어둠에 잠긴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물속의 적막같다. 창을 열면 검은 물살이 쏟아져 덮칠 것 같다. - P254

엄마를 잘 몰랐어.
몸을 일으켜 캄캄한 책장으로 다가서며 인선이 말한다.
지나치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 P255

입맛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259

네 편지 읽고 많은 생각 하였다 내가 나가면 너는 스물한 살 정숙이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여덟 아니냐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마는 눈물 흘릴 것이 무어 있나 쇠털같이 많은 날을 만나 옛이야기 할 수 있는데 정숙이한테 그리 일러주어라 - P260

남의 말만 믿고 자리를 떴다가 엇갈리면 안 된다고,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리자고 - P265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 P267

당시 서청들의 무법 행위가 상상을 넘어섰다고 엄마는 말했어, 강간과 납치 살인이 흔하게 벌어지니까 적당한 혼처만 있으면 서둘러 처녀들을 결혼시키는 분위기였다고. - P269

제주 가는 배를 대합실에서 함께 기다리는 동안 이모가 엄마에게 말했다. 포기하자고. 오빠는 죽었다고. 진주로 이감됐다는 날짜를 기일로 하자고. - P271

날마다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니까 재소자들부터 골라내 총살했어. 그때 죽은 좌익수 천오백여 명에 제주 사람 백사십여 명이 포함돼 있었어. - P273

여러 날에 걸쳐 군용 트럭이 광산으로 들어갔어. 새벽부터 밤까지 총소리가 들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갱도가 시체로 가득찬 다음엔 근처 골짜기로 장소를 옮겨서 총살하고 매장했어. - P274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 P281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 P286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때 엄마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염이 악화되던 때야. - P288

그때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갱도 속에 쌓인 수천 구의 몸들 중 하나. 동시에, 불 켜진 집들의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 그곳에서 옷을 얻은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사람. 이건 얼른 태워버리십시오. 피투성이 수의를 마당에 남기고 암흑 속으로 달려 사라지는 사람. - P292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깨끗이 청소하갔어.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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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메인에 슬램덩크 전자책이 나왔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어릴적 TV매체를 통해 또는 오늘 시작한 이 신장재편판 이전에 나온 책들을 통해 접해보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지나 지금 현재는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번 기회에 과거에 접했던 스토리들을 추억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놓치고 지나갔던 부분들이 있다면 새롭게 기억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시작해본다.

덩크슛은 농구의 가장 화려한 볼거리야! 가장 멋지고 가장 관객을 열광케 하는 플레이거든! - P27

특히 골대가 부서질 정도로 공을 과격하게 내리꽂는 것을 슬램덩크라고 해. - P27

끈기없는 사람은 농구부원이 될 수 없다고 했거든. - P40

어떤 녀석이라도 내 잠을 깨우는 건 용서할 수 없다. - P57

승부는 한순간에!! - P95

그래!! 매처럼!!
먹이를 낚아채는 날랜 움직임!! - P95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다간 놈의 생각대로 되는 거야!! - P95

올해야말로...
꿈을 이룰 수 있겠군. - P109

저 녀석을 보면 뭔가 저지를 것 같단 말이야.
아, 그래.
왠지 보통 녀석이 아닌 것 같아. - P121

히야~공을 완전히 가지고 노네!! - P123

공을 들고 3보 이상 가면 안 돼!!
드리블을 해야지!! - P123

내버려둬!!
자기 좋을 대로 하게. - P123

공을 골대 안으로.... 내리친다!!! - P134

바보는 혼자 놀게 놔둬! - P145

올해 목표는 전국 제패다!! - P173

백호야, 농구는 기초가 중요해. 힘내라고!! - P177

왜, 나만 구석에서 탕탕 공만 튕겨야 하냐!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 - P192

네 녀석은 스포츠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다!!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 - P195

제아무리 덩크를 잘할 수있다 해도 기본을 모르는 놈은 시합에 나가더라도 허수아비일뿐이다!! - P195

난 슬램덩크만 하면 된단 말야!! 그냥 내버려두면 좋잖아!! - P196

제길!! - P197

꾸준한 노력은 언젠가 꼭 보상받게 된다고 오빠가 그랬어. - P231

봐주는 것 없기다!! - P235

예술이라고까지 표현된 ‘스카이 훅‘을 무기로 20년동안 NBA의 톱에 군림해온 그(카림 압둘 자바)를 사람들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렀다. - P244

저 녀석, 겉보기엔 멍청해보이지만 속은 지독한 승부근성이 있어. - P257

나도 지기 싫은 성질로는 아무한테도 안 진다! - P261

자유투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던질 수 있는 거야. - P264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 P265

남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공부야! - P269

흥! 뭐 좋아. 난 저 주장한테도 이긴 사람이니까. - P269

그래!! 말하자면 높은 자리에서 구경이나 한다 이거야!! - P269

헤헤... 서태웅 따위완 질적으로 다르지!!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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