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를 뒤로 밀고 나는 일어섰다. 날아오르려는 것인지 내려앉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서까래와 마루 사이에 영원히 갇힌 듯 퍼덕이는 그림자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촛불과 그림자 사이 새의 육체가 있어야 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 P204
아니. 무성음들이 포개지며 한마디 말처럼 들렸다. ......아니, 아니. 환청인가, 의심하는 찰나 단어가 부스러져 흩어졌다. 헝겊 스치는 소리가 잔향을 끌고 사라졌다. - P205
오래 혼자 있으면 혼잣말을 하게 되잖아. - P205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더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 P206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 P206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 P206
새는 양안시가 아니기 때문에 자꾸 얼굴을 움직여 전체의 상을 보는 거라고 했다. - P207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 P208
뭔가가 더 남아 있어, 아미가 이렇게 있다 가고 나도. - P208
뼈들을 본 뒤부터야. 인선이 말했다. ......만주에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 P209
만주 촬영이라면 벌써 십년 전, 인선이 후암동에 살던 때다.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어디에서? 나는 물었다. 제주공항, 하고 대답하며 인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활주로 아래에서. - P209
구덩이 가장자리에 있던 유골 한 구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어.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 P211
그 유골만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이유가, 흙에 덮이는 순간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그때 들었어. 그 유골의 발뼈에만 고무신이 제대로 신겨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고무신도, 전체 골격도 크지 않은 걸 보면 여자거나 십대 중반의 남자인 것 같았어. - P212
겨울이 되면서는 흉내내듯 책상 아래 모로 누워 무릎을 구부려보기도 했어. 이상한 건,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거야. 겨울 볕이 깊게 들거나 온돌 바닥이 데워져서 퍼지는 온기와는 달랐어.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방을 채우는 게 느껴졌어. 솜이나 깃털, 아기들 살을 만지고 나면 손에 부드러움이 남잖아. 그 감각을 압착해서 증류하면 번질 것 같은...... - P212
이름은 물론 성별도 당시 나이도 모르는 사람. 조금 가는 골격에 작은 사이즈의 고무신을 신은, 전쟁발발 직후 제주에서 예비검속돼 총살된 천여 명 중 한 사람. - P212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귀밑머리와 목덜미와 두 손만 보이게 할 생각이었어. - P213
그 일을 한번 더, 다시 한번 더 반복했어. - P214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높은 사름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왕 반듯이 바닥을 보고 서서. 무신 벌을 줄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젠 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멍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뒤쪽에 이시던 여남은 명이 금 밖으로 튀어그네 우리집 쪽으로 막 도망 오는 거라. - P224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낭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멍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 이시던 사람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 그네 한 사람씩 바당에다 데껴 넣어신다.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 P224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 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 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 P226
무슨 연구소 사름들이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주. 직접 본 사름이 몇 명 엇다고, 죽기 전에 이야기 안 하민 아무도 모르게 된다 허멍 부탁하는 거라. 틀린 말 아니다 싶어그네 그때 처음 고랐져. 한번 그래놓으난 다른 데서도 오데. 이야기 시켜놓곡 가불고 나민 메칠 혼자 속 시끄러울 거 알지마는 엔간하면 다 해줘서. - P227
그때는 요즘 같은 세상이 아니메. 하라민 해야 되는 세상이라. - P228
죽는 날까지 우리 서방은 군경 욕을 안 해서 좋다 나쁘다 아예 입에 담질 않아서. 대신 빨갱이라 허멍 질색을 했주게. 무장대 그사람들이 한 거 무신거 있느냐고. 경찰 멫 명 죽이고 죄 어신 가족헌티 복수하고 산에 도망가면 그 마을에서만 이백 명 삼백 명이 보복으로 떼죽음 당햄신디. 지상낙원 만든다 허멍 그거 지옥이주게 어떵 낙원이냐곡. - P229
심장이 아프셨어? 협심증 약을 드셨어. 결국 심근경색이 왔어. 덤덤하게 그녀가 대답한다. 손이 떨리던 것도 고문 후유증이었어. - P235
꿈이란 건 무서운 거야. 소리를 낮춰 나는 말한다. 아니, 수치스러운 거야.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폭로하니까. - P237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 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 내가 있잖아. - P238
불길이 번졌던 자리에 앉아 있구나. 나는 생각한다. 들보가 무너지고 재가 솟구치던 자리에 앉아 있다. - P244
두 자매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시신들은 국민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교문 건너 보리밭에서 눈에 덮여 있었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패턴이 같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다음 근처 밭이나 물가에서 죽였어. - P249
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대. 피에 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구멍을 찾아냈다. 뺏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다. 총알이 턱뼈의 일부를 깨고 날아간거야. 뭉쳐진 머리카락이 지혈을 하고 있었는지 새로 선혈이 쏟아졌다. - P250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1
그 어린것이 집까지 기어오멍 무신 생각을 해시크냐? 어멍 아방은 숨 끊어져그네 옆에 누웡 이신디 캄캄한 보리왓에서 집까지 올 적에난, 심부름 간 언니들이 돌아올 걸 생각해실 거 아니라? 언니들이 저를 구해줄 거라 생각해실 거 아니라? - P252
어둠에 잠긴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한다. 물속의 적막같다. 창을 열면 검은 물살이 쏟아져 덮칠 것 같다. - P254
엄마를 잘 몰랐어. 몸을 일으켜 캄캄한 책장으로 다가서며 인선이 말한다. 지나치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 P255
입맛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259
네 편지 읽고 많은 생각 하였다 내가 나가면 너는 스물한 살 정숙이는 스물다섯 나는 스물여덟 아니냐 보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지마는 눈물 흘릴 것이 무어 있나 쇠털같이 많은 날을 만나 옛이야기 할 수 있는데 정숙이한테 그리 일러주어라 - P260
남의 말만 믿고 자리를 떴다가 엇갈리면 안 된다고,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리자고 - P265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 P267
당시 서청들의 무법 행위가 상상을 넘어섰다고 엄마는 말했어, 강간과 납치 살인이 흔하게 벌어지니까 적당한 혼처만 있으면 서둘러 처녀들을 결혼시키는 분위기였다고. - P269
제주 가는 배를 대합실에서 함께 기다리는 동안 이모가 엄마에게 말했다. 포기하자고. 오빠는 죽었다고. 진주로 이감됐다는 날짜를 기일로 하자고. - P271
날마다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니까 재소자들부터 골라내 총살했어. 그때 죽은 좌익수 천오백여 명에 제주 사람 백사십여 명이 포함돼 있었어. - P273
여러 날에 걸쳐 군용 트럭이 광산으로 들어갔어. 새벽부터 밤까지 총소리가 들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갱도가 시체로 가득찬 다음엔 근처 골짜기로 장소를 옮겨서 총살하고 매장했어. - P274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 P281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 P286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때 엄마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염이 악화되던 때야. - P288
그때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갱도 속에 쌓인 수천 구의 몸들 중 하나. 동시에, 불 켜진 집들의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 그곳에서 옷을 얻은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사람. 이건 얼른 태워버리십시오. 피투성이 수의를 마당에 남기고 암흑 속으로 달려 사라지는 사람. - P292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깨끗이 청소하갔어.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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