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의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채 빨갱이로 몰려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아주 세세한 이유까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소설 속 시대 배경 자체가 1950년에 발발했던 6.25전쟁 무렵인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국가가 공권력을 통해 북한과 관련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려했던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중에 진짜 간첩들도 있었겠지만,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쌀이나 곡식을 준다는 이유로 공산당 명부에 형식상으로만 이름을 올렸다가 봉변을 당한, 다소 억울하다고도 볼 수 있는 죽음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다소 안타까운 죽음들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당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힘을 합쳐 그 당시의 상황들에 대한 진상조사 등을 하는 장면들도 나오는데, 본문을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면서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식의 무자비한 학살같은 것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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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마지막 챕터인 3부 ‘불꽃‘ 이 나온다. 여기서는 뭔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듯한 느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간에 있었던 쉽지 않았던 시간들을 추측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독자인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루 말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수건이 덮인 아버지 얼굴에 그 사람이 끝없이 물을 부었다고 했어. 젖은 가슴을 야전 전화선으로 묶고 전기를 흘려넣었다고 했어. 산사람과 내통한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그 사람이 속삭일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고 했어. 모루쿠다.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 - P297
기억나는 건, 그렇게 물을 때면 엄마가 내 손을 놓았던 거야. 너무 세게 잡아 아플 정도였던 악력이 거품처럼 꺼졌어. 누군가가 퓨즈를 끊은 것같이 듣고 있는 내가 누군지 잊은 것처럼. 찰나라도 사람의 몸이 닿길 원치 않는 듯이. - P298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뻗어 뼈들의 사진 위에 얹었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 P302
이제 닿은 건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 P302
대답을 망설이며 나는 서 있었다.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적 속에 더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 P303
경하야. 인선이 나를 불렀다. 내가 디딘 데만 딛고 와. - P304
돌아가자. 나는 말했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 P307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 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 P314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 P314
엄마가 모은 자료들의 빈자리에 내가 새로 찾은 것들을 메꿔 넣으며 하루하루를 보냈어. - P315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 P316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나오고 있었으니까. - P316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 P317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P317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 P318
눈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인선이 다음 말을 잇기를. 아니, 잇지 않기를. - P319
이상해, 경하야. 네 생각을 날마다 했는데 정말 네가 왔어. 하도 생각해서 거의 네가 보일 것 같은 때도 있었는데. 캄캄한 어항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유리에 얼굴을 붙이고 끈질기게 들여다보면 뭔가 안쪽에서 어른거리는 것같이. - P320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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