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벌써 몇 시간째 부두에 머물러 있다. 얼마나 오래 더 이러고 기다려야 할까? 여기서 무작정 시간이 가기만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기다리는 것도 정도껏이지, - P85
이제 빨리 잊는 게 상책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그래, 요한네스가 말한다 세상일이 다 그렇지, 페테르가 말한다 - P94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어, 싱네가 말한다 그러셨지 아버님은, 레이프가 말한다 - P123
그럼 마음 아픈 일이지, 레이프가 말한다 그래도 닥칠 일은 닥치는 법이야, 그가 말한다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차례가 오는걸, 그가 말한다 그런 거지 뭐, 그가 말한다 - P124
이해하겠나? 페테르가 묻는다 잘 모르겠는걸, 요한네스가 말한다 자네도 이제 죽었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를 바라본다. 그런 말을 하다니. 고약하게도, 그가 죽었다니 내가 죽었다고?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도 이제 죽은 거라네 요한네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 P128
그리고 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였으니 자네가 저세상으로 가도록 도와야지, 그가 말한다 내가 저세상으로 가도록 도와? 요한네스가 묻는다 그리고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집에 누워 있는 자네는 죽은 거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아하, 내가 그러고 있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자 이제 가게나, 요한네스, 그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에게 다가가 그와 함께 길을 내려간다 - P129
지금 서쪽 만으로 가는 건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그래, 페테르가 말한다 거기서 뭘 하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이제 떠나는 거야, 자네와 내가, 페테르가 말한다 그렇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내 고깃배를 타고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게 페테르, 요한네스가 말한다 - P129
그리고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지금 이게 뭐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군, 오늘 페테르와 밖으로 나가 게망을 끌어올리지 않았나 그리고 꽃게를 팔러 시내에도 갔었는데, 하나도 팔지 못하고, 페테르가 안나 페테르센에게 선물로 꽃게가 가득 든 비닐봉지하나를 넘겨준 게 다지, 그러니까 페테르가 봉지를 부두에 놔두고 왔고, 한참 후 그녀가 와서 가져갔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조금 지나서 안나 페테르센이 왔었지, 그 모든 일이 생생한데, 지금 내가 죽었다니
이제 자네도 죽었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 말한다 오늘 아침 일찍 숨을 거뒀어, 그가 말한다 내가 자네의 제일 친한 친구여서 나를 이리로 보낸 거라네. 자네를 데려오라고 말이야. 그가 말한다 그러면 게망은 뭐하러 걷어올렸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말한다 그런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런 거라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0
몸을 잠시 되돌려받았어, 자네를 데려올 수 있도록, 페테르가 말한다 이제 고깃배를 타고 떠나자고, 그가 말한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 P131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 P131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단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에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2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 P132
이제 그렇게 두리번거려서는 안 된다네 요한네스, 페테르가말한다 이제 하늘만 쳐다보고 파도소리에 귀기울여야 해, 그가 말한다 - P132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 P133
비바람이 불고 파도도 높으니까 그리고 페테르의 고깃배가 파도에 휩쓸려 올라갔다 떨어지더니 그들은 더이상 페테르의 고깃배가 아닌 다른 배에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거기, 에르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빛 역시 다른 모든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페테르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4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몸을 돌려 저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싱네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사랑하는 싱네, 저 아래, 멀리 저 아래 그의 사랑하는 막내딸 싱네가 서 있다. 제일 어린 마그다의 손을 잡고서, 그리고 요한네스는 싱네를 바라보며 벅찬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싱네 곁에는 그의 다른 자식들 모두와 손자들과 이웃들과 사랑하는 지인들과 목사가 둘러서 있다. 목사는 흙을 조금 퍼올린다. 싱네의 눈에도 에르나에게서 본 것 같은 빛이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어둠과 저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궃은일을 바라본다 저 아래는 궂은일이 생겼구먼, 요한네스가 말한다 - P135
그리고 싱네는 요한네스의 관 위로 목사가 흙을 던지는 것을 보며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었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저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속을 게워내야 했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어요, 싱네는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그리고 오늘 바다는 저리도 잔잔하고 푸르게 빛나는데, 싱네는 생각한다, 요한네스, 아버지, 요한네스, 아버지 - P135
바다와 바람과 비와 외딴집과 보트하우스,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오래된 사물들은 사람보다 오래 머물며 그들의 삶과 죽음을 담아내고, 흔적을 간직한다. 작가의 말처럼,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 P137
내 글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스트라네바름(노르웨이 하르당게르표르 동쪽에 위치한 해변)의 소리들이다. 가을의 어둠, 좁은 마을길을 걸어내려가는 열두 살 소년, 바람과 피오르 위로 쏟아지는 장대비, 불빛이 새어나오는 어둠 속 외딴집, 어쩌면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는..... 이러한 것들이다. - P138
나는 줄곧 바다를 바라보며 자랐다. 나는 그 모습들을 사랑하며, 그것은 내 무의식의 감수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오랫동안 바다를 보지 못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P138
어부 요한네스가 태어나는 순간과 그의 흘러간 삶, 그리고 이제 막 다가오는 죽음을 이야기하는《아침 그리고 저녁》에도 어김없이 피오르의 바람과 파도, 늙은 어부의 기침소리 같은 것들이 있다. 어눌한 구어체와 비문,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사슬, 동일어의 반복, 대화와 대화 사이의 침묵을 따라가다보면 읽는 사람은 어느 순간 문장과 하나가 되어 그것들이 지어내는 피오르의 리듬을 타게 된다. - P138
‘21세기의 베케트‘라 불리기도 하는 욘 포세의 텍스트에 깃든 침묵과 여백은 사무엘 베케트의 ‘제2의 언어‘로서의 침묵처럼 텅 비어 있으면서 무겁다. 이들의 침묵은 말하지 않은 것을 껴안아 말하게 한다. 등장인물들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또다른 등장인물들과 독자들은 ‘말하지 않은 것‘을 듣게 된다. 침묵은 ‘이미 다 말해졌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언어들을 소환하고, 상상과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그의 ‘닫힌 텍스트‘를 열려있게 한다. - P143
마침표를 찍을수 있는 문장, 요한네스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일상이다. - P144
환각과 비슷한 상태에서 다가오는 죽음은 그가 살아오며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확신했던 일들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 P144
작가는 응축된 문장을 쓰는 것만큼, 응축된 삶의 형태를 묘사한다. 한 사람이 태어나, 살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이보다 더 원형에 가깝게 축약할 수 있을까. 이 짧은 소설을 장편소설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 존재의 반복되는 서사, 삶의 원형에 가까운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 P145
작가는 스스로 말하듯, ‘형식적으로 닫힌 텍스트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들어가‘ 바닷물을 담았다 쏟아내는 액자처럼, 근원을 알 수 없으나 끊임없이 생성중인 삶과 죽음의 리듬을 담아내고자 한다. - P145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48
멜랑콜리커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불안을 받아들인다. ‘검은담즙‘을 머금고 살아감으로써, 삶을 버팀으로써, 현재 안에 존재하는 과거와 예견된 죽음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만나는 순간, 멜랑콜리는 빛을 발한다. - P147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존재의 불안을 끊임없이 사색하는 ‘멜랑콜리커‘들이다. 연구자 주잔 크뤼거에 따르면 멜랑콜리커는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전진하는 대열에서 멈춰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정서가 우울하고, 모호하게 말하는, 과잉소비사회와 자본주의에 반하는 인성의 사람이다. 문제의 표면이 아닌 핵심을 파고들며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다. - P147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 포스트모던 시대에 불시착한 요한네스와 같은 멜랑콜리커들은 서늘한 외로움을 감당하며 묻고 또 물을 것이다. 거대한 시공간 앞에 선 존재의 불안과 허무에 대해. 좋은가. 그곳은? - P148
『아침 그리고 저녁』을 발표한 후 욘 포세는 희곡보다 소설 쓰기에 좀더 집중할 것임을 선언했다. 2014년 노르웨이에서 출간된 『트릴로지』( 『불면』 올라브가 꿈을 꾼다』 『저녁의 피로』를 묶은)는 유럽 내 난민의 실상을 통해 인간의 가식과 이중적인 면모 등을 날카롭게 비판함으로써 문단 안팎의 좋은 평을 받았고, 해마다 그가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주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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