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와 한철, 정호 간의 삼각관계를 보면서 참 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마치 튕겨 내기라도 하듯이 엇갈리는 것들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게 결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또한 옥희로부터 자신의 고백이 거절당했음을 직감한 정호가 순식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그 사람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정호는 그야말로 야생에서 거칠게 살아남은 캐릭터라 이것이 좋은 쪽으로 발휘되면 괜찮지만, 나쁜 쪽으로 빠져버리면 폭력적으로 변하기 쉬운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보면 가정이나 사회에서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속해있는 곳은 바람잘 날이 없고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참 양날의 검과 같은, 좀 위험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한철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상위 포식자를 감지하고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죽은 척하며 버티기로 마음먹은 도마뱀 같았다. 이제는 그리 잘생겨 보이지도 않았다. 정호가 직감했듯이, 그는 그저 비겁자에 불과한 놈이었다. 아, 옥희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당장 오늘 저녁에 옥희를 만나러 가는 사람은 정호 자신이었다. 지금 옥희에게 필요한 것은 한철이 아닌 정호였다. 이 복수의 쾌감이 얼마나 컸는지, 정호는 마치 성좌에 완벽히 정렬되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별이 된 기분이었다.

정호가 끝내 배우지 못한 많은 일들 가운데, 무엇보다 어려운 일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해왔던 방식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행동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기.

그 전까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모든 결정과 전환점 들은 오래전에 떠나버린 그 간절한 소망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삶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냥 거기 있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한테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가, 바로 다음 순간 그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던 거야."

"있지, 옥희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파랑이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아스라한 시선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했어. 그래서 넥타이든 여자의 옷이든, 뭔가 푸른색인 것들에 왠지 더 눈길이 가더라. 내가 널 계속 발견하고, 널 사랑하게 된 건・・・・・・ 네가 나의 파랑이기 때문이야."

그 진심 어린 고백에 감동을 느끼면서도, 옥희는 자신의 파랑은 그가 아니라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 그의 마음을 짙은 쪽빛으로 물들였던 건 오직 한 남자뿐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더 이상 옥희를 사랑하지 않았고, 옥희와 어떤관계도 맺지 않으려 했다. 옥희는 정호가 그만 말을 멈춰주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다.

옥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잔인한 말들을 억누르려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나 잠시 고삐를 늦춘 순간, 그 말들은 거친 사냥개처럼 냅다 옥희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임무가 너와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하잖아."

"더한 것도 했을 거야. 그저 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걸 포기했을 거라고."

정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느라 일생을 헛되이 바쳤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그의 얼굴은 증오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옥희의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그가 홱 돌아섰다.

이어 옥희는 처음으로, 진짜 정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며 먹고 살았는지, 의문에 싸인 정호의 직업이 무엇인지, 옥희로선 넌지시 짐작만 해온 것들을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정호는 곧장 옥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 위로 번쩍이며 쏟아져 내리는 유리 파편들을 무시한 채, 정호는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고함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단음절로 이어지는 그 무서운 소리는 사람이 내는 비명이라기보다 고뇌에 찬 산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제야 옥희는 자신이 흐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정호의 몸이 너무나 친밀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언젠가 내가 그런 얘길 했었지. 내가 죽더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그때 네가 너만은 내 죽음을 안타까워해 줄거라고 했던 거 기억하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호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옥희의 집에서 걸어 나왔다.

죽음이란 정말이지 누구에게나 공평하더군.

(편안하고 안락한 삶 덕에 그의 외양엔 거칠고 단단한 구석이 없었으며, 오히려 모공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반짝이고 매끈한 표피가 더욱 돋보이는 듯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번에 읽었던 욘 포세의 '3부작' 에서 보트하우스 라는 단어를 여러번 봤었던지라 이 '보트하우스'는 도대체 어떤 작품일까 궁금하여 찾아 읽어보게 되었다.

보트하우스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추억이 담겨있는 공간이자 현재도 함께 있는 공간이었다. 어릴적 화자와 화자의 친구인 크누텐이 함께 들락날락(?)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때묻지 않은 순수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다르다. 현재 화자는 독신이지만, 친구인 크누텐은 이미 결혼도 했고 두 아이도 있는 유부남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어떤 배경적인 차이가 서로간의 이질감을 발생시키고 그로 인해 여러가지 오해들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 중후반부로 가면 크누텐의 아내가 마치 화자를 유혹하는듯한 장면들이 여러번 나오는데, 어릴적 화자와 친구인 크누텐이 순수하게 지냈던 보트하우스라는 공간은 이제 예전의 순수함보다는 뭔지모를 불순한 느낌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 소설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진다. 첫 파트는 화자의 생각과 심리가 주로 표현되는 반면 두번째 파트는 화자의 친구인 크누텐의 관점에서 그의 생각과 심리상태가 서술된다. (마지막 세번째 파트는 이야기의 마무리 성격으로 상대적인 분량이 적은 편이라 논외로 한다.) 여기서 좀 흥미로운 것은 첫 파트와 두번째 파트 모두 동일한 사건을 놓고 관점만 달리하여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똑같은 사건을 첫 파트에서는 화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고, 두번째 파트에서는 크누텐의 시선으로 본다는 말이다. 내가 100자평에 '데칼코마니 '같이 소설을 디자인한 것 같다고 쓴 것도 결국 동일한 사건을 각 사람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은 표현이다.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을 쭉 읽다보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좀 오실거라고 생각한다. 보통 똑같은 사건일 경우 사람이 달라도 전반적으로 보는 관점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소설을 읽다보면 각 사람마다 동일한 사건도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소설 속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예로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는 것과 관련하여 동일한 행동을 가지고도 한쪽에서는 정당한 체벌이었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거는 아동학대로 고소해야 마땅한 사안이다 라는 식으로, 사람이 자기가 처해있는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서 자기에게 유리한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결국 사람은 객관적으로 특정상황을 보기보다는 자기가 보고싶고 생각하고 싶은대로 보고 생각하는 동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내용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면 크누텐의 아내는 자신이 크누텐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크누텐의 친구인 화자에게 자꾸 은밀하게 접근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화자는 이를 거부하려고 하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게 행동(혼자 집에 가고 싶어함)하려하는데, 이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크누텐은 자신의 아내와 친구인 화자가 서로 아주 둘이 난리(?)가 난 것처럼 스스로 오해를 하고 체념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화자와 크누텐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을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서 정말 겉으로 보이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상황을 제대로 보려면 당사자들의 내면까지 봐야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머릿속이나 마음속으로 일일이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실제 인간관계에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말이나 행동만을 참조하여 그것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결합하여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단정짓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속 두 인물을 살펴보면서, 결국 핵심은 동일한 사건을 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방이 똑같이 생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살다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고 나와 보는 관점이 좀 다르거나 독특한 관점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쟤는 틀렸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게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욘 포세의 작품을 보다보면 특정 문구가 반복되는 것을 여러번 볼 수 있는데, 이 '보트하우스' 에서도 어김없이 그러한 표현들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욘 포세의 작품을 읽을 때는 책이 잘못써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었는데 4번째 욘 포세의 작품을 읽다보니 이러한 표현 방식이 머릿속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의식의 흐름(?)을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여러가지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 어떤 느낌들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구들은 그런 순간순간의 것들이라기보다는 평상시 우리 안에 꾸준하게(?) 내재되어 있는 어떤 감정이나 느낌들, 지속적으로 나를 지배하는 어떤 정서 같은 것들을 표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내 머릿속 기저에 깔려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어딘가에 앵커링(anchoring)되어 있어서, 어느순간 잠시 이탈했다가도 다시 원래 기저에 깔려있는 생각이나 감정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특별히 이 '보트하우스'에서는 등장인물들의 기저에 깔려있는 감정이 불안감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소설이나 혹은 현실세계에서는 또다른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욘 포세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반복)이 처음에는 많이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자 마음먹고 생각하면서 내 스스로 생각하는 깊이가 조금이나마 깊어진 듯 하다. 누군가는 그냥 혼자서 헛소리를 짓껄인다고 까내릴지도 모르겠으나 그거는 니(?)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 이끄는대로 생각해보련다.

욘 포세의 작품을 4권째 읽으면서 새롭고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게 되어서 흥미롭고,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도 느꼈던 것 같다. 작품 자체가 재밌냐고 물어보신다면 case by case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욘 포세는 명확한 결론이나 교훈을 준다기 보다는 독자가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자꾸 상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호불호가 많이 갈릴만한 작가인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여타 다른 소설들을 엄청 많이 읽은게 아니라 섣부른 감탄일 수도 있겠으나 ‘소설의 전개방식을 이렇게 디자인 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 소설이었다.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각자의 시선에서 달리 보는 모습을 보며 마치 ‘데칼코마니‘ 방식과 유사하게 전개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슨 수를 써야 할 텐데, 모르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야, 아니,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P194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크누텐이 길을 걸어가는 것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후로 나는 이따금씩 그가 서 있던 길을, 그가 어떻게 돌아섰는지를, 그가 어떻게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는지를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았다. 나는 이곳에 앉아 글을 쓴다, 그리고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는다. 불안감이 날 엄습해 왔다. - P197

나는 그냥 이곳에 매일 앉아 있다. 나는 불안감을 계속 떨쳐내기 위해 글을 쓴다. 이 불안감이 더 커진 것인지 아니면 작아진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 앉아 글을 쓴다. - P200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고, 그저 글쓰기에만 매달리고 있다. 예전에 나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이 불안감이 엄습한 이후로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난 모르겠다. 난 글을 쓰고 나면, 잠자리에 든다. - P201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기타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 P202

나는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챈다, 난 시선을 돌려 버리고, 그녀를, 그녀의 눈을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자리에 서서 화음만 넣는다. - P204

연주 일은 대개 모두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는데, - P206

그녀가 무대 앞에, 여자 친구 곁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러자 나 역시 그녀를 쳐다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다가, 떨어진다, 모든 것은 아주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 P207

우리는 연주한다. 나는 화음을 치고, 크누텐은 노래를 한다. 그녀가 크누텐을 쳐다본다, 그가 그녀를 쳐다본다. 여자 친구와 함께 무대앞에 서 있는 그녀, 이제 나는 비로소 그녀가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고 크루텐을 쳐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크누텐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 P207

어머니는 그냥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이글쓰기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야 해, 마트에라도 가든지, 연주 일이라도 몇 가지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오늘 크누텐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한다. 그 사람 말로는 크누텐의 아내가 죽었다는구나. 늘 끝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면서. 다른 방도는 보이지가 않았다고, 그 사람이 그러더구나. 그 여자가 죽은 건 조금 전이라는데. 익사한 채로 발견됐대. 그건 끔찍했다고, 그렇지만 끝이 좋진 않았을 거랬지. 아이들한테 안된 일이라고, 아마도 자살이었을 거라고, 그러더구나. - P210

어머니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내려올 것을 부탁했다. 네가 여기 앉아 글을 쓰고만 있을 수는 없잖니, 라고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냥 안으로 들어왔다.
넌 내려와야 한단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모르겠다. 이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 나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리 나이가 드시진 않았다. 이제 이 불안감을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내 글쓰기를 끝낸다. - P210

포세는 입센 이후 최고의 노르웨이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투명하게 응시하며 삶의 본질을 꿰뚫어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이중적 언어로 읽힐 수 있는 시적 언어를 통해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철저하게 압축되어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 - P211

그는 평범한 삶의 모습 속에서도 볼 수 있는 갈등과 마음의 번민, 죄와 실망 등 상당히 원초적인 문제들을 짚어 낸다. - P211

그는 단순히 방언의 사용이 아니라 그 언어가 지닌 소리, 리듬 그리고 흐름을 통해서 반복과 사이와 끊어짐의 미학을 완성한다. - P212

반복적인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테마나 의미의 동일성, 분절 의미의 집중, 전이와 같은 외형적인 것. 그리고 인물들 간에 서로 매달리며 서로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싶은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모습이다. 철저하게 압축된 문장의 조각들과 그것들의 지속적인 반복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포세의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반복과 긴장 그리고 이완은 어느 순간 삶의 진정을 깨닫게 만든다. - P212

표면적으로 일어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불안감과 괴로움을 더는 주체할 수가 없다. - P213

『보트하우스』는 폐쇄적이며 발작이 심한 한 인물에 관하여 내포적이고 심리적으로 다면적인 모습을 다루는 이야기다. - P213

아도르노가 예술을 고통의 언어로 정의하듯 포세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일어났거나 머리에 떠올렸던 일을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고통이 바로 그것이다. - P214

글을 쓰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소망을 가지고 가능한 한 만족스럽게 자신의 텍스트를 계획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포세는 말한다. - P214

"저는 어떤 것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가 쓰는 것과 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구는 ‘시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 시를 읽으면서 의미를 찾게 되고, 최고의 시에서는 어쩌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알고 있었거나 경험했던 것을 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 P214

포세가 자신의 시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가 자주 언급하는 인용이 호라티우스의 시학이다. (중략) 텍스트는 어떤 것에 대한 은유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P215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포세의 작품에서는 반복 기법이 주로 내적 독백에서 나타나며, 기억과 회상 그리고 강박관념들로 이루어진다. - P215

마치 컨트리가수처럼, 그가 글을 쓰는 것은 악기를 다루는 듯하고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음악처럼 반복, 재시작, 휴지가 있는데, 어쩌면 그는 바람, 폭풍, 파도, 비처럼, 다시말해 자연처럼 생각하는 듯싶다. 이러한 단어의 흐름 속으로 의미, 표현 그리고 여러 가지의 테마가 드러난다. - P2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을 읽다보면 화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각들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불안감, 두려움 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또한 여기 일일이 밑줄 긋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혹은 화자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그런 일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을 보면서 우리 개개인의 의식의 흐름도 자세히 보면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실제 현생을 살아가면서도 가끔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고 현실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을 법한 일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순간들도 종종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상들이 과할 경우 심하게는 정신병적인 증세로 안좋은 쪽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면 마냥 나쁘다고 생각할 것까지는 아닐듯 싶다.
이후의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나는 이곳에 앉아서 글을 쓴다. 읽는 이를 위해 쓰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홀로 있다. - P97

나는 이곳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불안감을 덜어 준다. 글쓰기가 좋다, 이것은 날 행복하게 만든다. - P98

지난 여름 나는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그때였는데, 그 어떤 것도 이전과는 같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크누텐과 나는 늘 함께였다. 이제 크누텐은 결혼했고, 두 딸이 있다. - P98

오직 비와 어둠만이 둘을 감싸고, 나머지 우리들은 각자의 고요한 고독함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 고독함 주위에는 고요한 연대감이 자리해 있다, 그렇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연대감이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에게 개인이고자 함 없이, 우리는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이다, - P103

그것은 언제나 치고 있는 파도였고, 점점 더 자라고 있는 살갗이었다. - P105

나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불안은 계속 커지기만 할 뿐이다. 글을 쓸 때는 침착해지지만, 그러고 난 직후엔 불안감이 다시 찾아온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나는 안다. - P106

라인렌더(reinlendar) : 4분의 2 박자의 커플 댄스. - P108

약간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P120

그런데 우리는 내 집으로, 내 어머니한테는 갈 수가 없다. 그녀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 P125

나는 길에 남아 우두커니 선 채 보트하우스에 대해 말하지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걸 이야기해야 했던 걸까, 이야기하기엔 그저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인데. 보트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안 돼. 크누텐의 아내가, 들어가선 안 돼. - P128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할 텐데, 불안감이 극심하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한다, - P130

내가 일어서자, 파도소리가 들린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내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들린다, 갑자기 그것이 들린다. 나는 파도 소리를, 피오르를 듣는다, 그러자 내 몸속에서 불안감이 매우 분명해진다. - P131

어둠이 나를 감싼다, 나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내 몸속에 치는 파도의 움직임을 깨닫는다, - P132

나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다, 뭐라도 해야한다, - P133

파도는 내 삶 전체를 관통해 계속 또 계속 치고 있었다. - P134

나는 방 안쪽에 숨었다. 외출을 기피하는 이 괴벽은 토르셸과 내가 마을 축제에서 연주했던 밤 이후에 찾아왔다. 그날 저녁 이후로 나는 밖을 다니지 않는다. - P135

그냥 걸어야 해, - P137

나는 모르겠다. - P138

지난여름 나는 크누텐과 마주쳤다. 오랜만에, 적어도 10년 만에 크루텐을 다시 만난 것이다. 나는 걸어서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화창한 여름날의, 조금 늦은 오후였다, - P140

크루텐을 만난 지도 오래되었군, 분명 10년은 되었을 텐데, 다시 그를 마주 대하기가 어렵겠는걸,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크누텐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었지, 저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어, 내가 알던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란 것도, 나는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 P141

크누텐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건 평화로운 시간이야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런데 아내가 저 친구를 저렇게 바라보고 있군, 저 친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 하고 생각한다, 아내는 늘 저렇게 쳐다보는군, 하고 그는 생각한다, 난 다만 평화롭게 쉬고 싶을 뿐이야, 그게 전부라고, 그런데 아내가 저렇게 저 친구를 들여다보고 있어, 저 친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고 그는 생각한다, - P142

그리고 크누텐은 이렇게 생각한다, 더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다 너무 옛날 일인걸. - P142

지금에 와서는 너무도 사소해 보이는 그 일들이 그때 당시에는 훨씬, 훨씬 더 큰, 거창하고 비밀스러운 일로 보였어. - P144

그러자 그의 아내가 당신 그 오만 가지 일에 호들갑 떨면서 걱정하고, 옛 친구들 만날까 흠칫거리는 짓 좀 그만둬, 그럴 거면 왜 휴가 때 여길 오자고 한 거야, 참 나, 다른 걸 할 수도 있었잖아, 안 그래, 라고 그녀가 말한다. 그러자 크누텐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한다, - P146

그 보트하우스처럼 지금은 모든 게 너무나 달라, 그곳은 정말로 큰, 거의 내 모든 삶이었던 곳인데, 그런데 지금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이,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냥 사라지지, 모든 것은 달라져, 한때 그랬던 것은 예전과는 꽤나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버려, 사소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 그런 식인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냥 그런 거야, 하고 생각한다. - P147

그는 피오르를 바라보며, 길을 따라 걸어 보트하우스를 지나친다, 그리고 그는 오늘 나를 만난 일을 생각한다, 여러 해 동안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지, 못 본 지 적어도 10년은 되었을 거야, 우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고, 밴드에선연주도 함께했어, 그리고 오늘 그 친구와 다시 마주쳤지, 이상하게도 그 친구랑은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어, 난 그 친구를 다시 만나는 걸, 다른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걸 두려워해 왔지, 너무나 오래전이어서, 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아내는, 크누텐은 그의 아내를 떠올린다, - P151

그는 오늘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알아챘다. 그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다. - P152

크누텐은 길가에 서서, 작은 섬을 내다본다, 그러다가 내가 몸을 돌려, 크루텐을 쳐다보더니, 몸을 돌린다, 저 친구가 날왔다는 걸 내가 알아차려선 안 되기 때문이지, 그런 거지, 하고 크루텐은 생각한다. - P153

그렇지만 저 친구는 날 봤어, 저 친구는 고개를 들었고, 다시 내렸지, 저 친구는 분명 날 봤어, 그리고 이제 저들은 뭍으로 갔지, 저들은 작은 섬에 머물 셈이겠지, 늘 이런 식이야, 난 오늘 아내가 저 친구를 보는 눈빛을 알아차렸어, 늘 이런 식이었지. - P155

크누텐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린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에 앉아서 머무르기로 마음먹는다, 그냥 여기 앉아 있자,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를 듣는다, - P156

아내는 이 짓을 그만둬야 해, 계속 이릴 순 없어, 그녀가 그 친구를 쳐다보는 눈빛, 그건 일어나선 안 될 일이야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 P158

무도회에서의 그 여자아이의 일은, 그건 그저 약간의 장난이었을 뿐이야,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그 후에 난 정말 이상해졌고, 무척이나 몸을 사리게 됐어, 연습도 더는 하기 싫어졌지,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 옛날 일이야, 하고 생각한다. - P159

그녀가 다가와 그의 곁에 앉는다. 크누텐이 산책하니까 좋았어, 라고 묻자, 그녀가 응, 그랬어, 라고 말하고는 당신 이제 진정된 거야, 이성을 다시 찾았느냔 말이야, 당신이 이런 식으로 굴면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라고 말한다. - P160

크누텐은, 목소리가 들리는군, 그녀는 그 친구를 데리러 갔던 거야, 그 친구의 집에 그 친구를 데리러, 그를 여기 데려오기 위해, 목소리가 들리는군, 아내의 목소리, 그 친구의 목소리, 목소리만 들려, 아내는 그 친구를 데리러 갔던 거야, 하고 생각한다, 그 친구네 집에 가다가, 아마도 아내는 길에서 그 친구를 만나고서, 이리로 데리고 온 걸 테지, 하고 그는 생각한다, - P162

말을 꺼내야 해, 평범한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 - P165

크누텐은 자기 잔을 들어 올려 창에 비친 자신에게 건배를 한다, - P174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묻고, 내가 하는 일을 말해 주고, 그런데 어째서 난 늘 어색해해야만 하는 걸까, 아내는 민속춤마당에서 연주를 하는 그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데, 어째서 난 늘 어색해해야만 하느냔 말이야, 그럴 순 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술병을 꺼내어 한 모금 들이켠다, - P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