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와 한철, 정호 간의 삼각관계를 보면서 참 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마치 튕겨 내기라도 하듯이 엇갈리는 것들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게 결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또한 옥희로부터 자신의 고백이 거절당했음을 직감한 정호가 순식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그 사람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정호는 그야말로 야생에서 거칠게 살아남은 캐릭터라 이것이 좋은 쪽으로 발휘되면 괜찮지만, 나쁜 쪽으로 빠져버리면 폭력적으로 변하기 쉬운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보면 가정이나 사회에서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속해있는 곳은 바람잘 날이 없고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참 양날의 검과 같은, 좀 위험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한철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상위 포식자를 감지하고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죽은 척하며 버티기로 마음먹은 도마뱀 같았다. 이제는 그리 잘생겨 보이지도 않았다. 정호가 직감했듯이, 그는 그저 비겁자에 불과한 놈이었다. 아, 옥희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당장 오늘 저녁에 옥희를 만나러 가는 사람은 정호 자신이었다. 지금 옥희에게 필요한 것은 한철이 아닌 정호였다. 이 복수의 쾌감이 얼마나 컸는지, 정호는 마치 성좌에 완벽히 정렬되어 이글이글 타오르는 별이 된 기분이었다.
정호가 끝내 배우지 못한 많은 일들 가운데, 무엇보다 어려운 일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해왔던 방식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행동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기.
그 전까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모든 결정과 전환점 들은 오래전에 떠나버린 그 간절한 소망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삶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냥 거기 있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한테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가, 바로 다음 순간 그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던 거야."
"있지, 옥희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파랑이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아스라한 시선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했어. 그래서 넥타이든 여자의 옷이든, 뭔가 푸른색인 것들에 왠지 더 눈길이 가더라. 내가 널 계속 발견하고, 널 사랑하게 된 건・・・・・・ 네가 나의 파랑이기 때문이야."
그 진심 어린 고백에 감동을 느끼면서도, 옥희는 자신의 파랑은 그가 아니라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 그의 마음을 짙은 쪽빛으로 물들였던 건 오직 한 남자뿐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더 이상 옥희를 사랑하지 않았고, 옥희와 어떤관계도 맺지 않으려 했다. 옥희는 정호가 그만 말을 멈춰주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다.
옥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잔인한 말들을 억누르려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나 잠시 고삐를 늦춘 순간, 그 말들은 거친 사냥개처럼 냅다 옥희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임무가 너와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하잖아."
"더한 것도 했을 거야. 그저 널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걸 포기했을 거라고."
정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느라 일생을 헛되이 바쳤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그의 얼굴은 증오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옥희의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그가 홱 돌아섰다.
이어 옥희는 처음으로, 진짜 정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며 먹고 살았는지, 의문에 싸인 정호의 직업이 무엇인지, 옥희로선 넌지시 짐작만 해온 것들을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정호는 곧장 옥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 위로 번쩍이며 쏟아져 내리는 유리 파편들을 무시한 채, 정호는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고함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단음절로 이어지는 그 무서운 소리는 사람이 내는 비명이라기보다 고뇌에 찬 산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제야 옥희는 자신이 흐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정호의 몸이 너무나 친밀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언젠가 내가 그런 얘길 했었지. 내가 죽더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그때 네가 너만은 내 죽음을 안타까워해 줄거라고 했던 거 기억하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호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옥희의 집에서 걸어 나왔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 덕에 그의 외양엔 거칠고 단단한 구석이 없었으며, 오히려 모공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반짝이고 매끈한 표피가 더욱 돋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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