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 P52
오직 서늘한 감각뿐이었다. 눈이 내리는, 귀를 틀어막은 것처럼 조용한 거리. 처음 보는 사람들. 혼자인 자신의 몸. - P54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담담하게 알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수습하는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 P55
아니요. 그녀는 펜을 집어, 탁자에 놓인 백지에 반듯한 글씨로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 P55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P55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 P55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 P55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 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 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때로는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을 잃은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었다. - P56
δύσβατος γέ τις ό τόπος φαίνεται καὶ ἐπίσκιος. ἔστι γοῦν σκοτεινὸς καὶ δυσδιερεύνητος. 이곳은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디디기 힘든 장소야. 사방이 어두침침해서, 무엇을 찾기도 힘든 곳일세. - P56
・・・・・・뭐 그냥 폐허에 대한 흥미죠. 고대 크메르 문자가 사원의 돌에 새겨져 있던데, 개인적으론 고대 희랍 문자보다 더 보기 좋더군요. - P57
깊게 숨을 들이쉰다. 숨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말을 잃은 뒤, 때로 그녀는 자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말과 닮았다고 느낀다. 마치 목소리처럼 대담하게 침묵을 건드린다. - P57
그녀는 더 힘주어 연필을 쥔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그 문장에 밴 감정이 백묵 자국처럼, 무심히 굳은 핏자국처럼 드러나는 것을 견딘다. - P58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가장 많이 상상해 눈앞에 그리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 P59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 P59
γῆ ἔκειτο γυνή.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다. - P59
아이의 동그란 눈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있는 것이 보였다.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아이의 얼굴이 비치고, 그 얼굴 속 아이의 눈에는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었다. - P60
그녀의 눈 속에 침묵하는 그녀가 비쳐 있고,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침묵하는 그녀가...... 그렇게 끝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 P62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P62
까다로운 시제, 명사들의 격변화, 복잡한 태의 용법들을 끈질기게 뚫고 들어가 불완전하고 단순한 문장을 만든다. - P63
γῆ ἔκειτο γυνή.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다.
χιὼν ἐπὶ τῇ δειρή. 목구멍에 눈雪.
ῥύπος ἐπὶ τῷ βλέφαρῳ. 눈두덩에 흙. - P64
얼어붙은 표면 위로 무수한 핏자국을 날마다 끼얹어놓을 뿐, 이즈음 아이의 고백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고통은 그녀의 침묵에 균열을 내지 못했다. - P64
말로 열리는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것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 P65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 P66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言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 P67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象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 P67
마치 그녀의 몸속에 있는 말들이 먼저 헛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것 같았다. - P68
χαλεπὰ τὰ καλά. 칼레파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 P69
그동안 내가 어른이 된 탓에 사물들이 조금씩 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P70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처음에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한 단어였다는 것을, 밝음과 색채 역시 그렇게 한 몸이었다는 것을 그때만큼 생생하게 실감한 적은 없었다. - P70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 - P71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 P73
사실, 건강이 걱정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너야. 너는 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지 않니. 무엇에든 몰두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엔 병을 얻고 마는 사람이지 않니. - P75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 P80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 P80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 P80
우리가 그토록 연하고 부서지기 쉬웠을 때, 지구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옮겨다닐 때, 우리는 한 바구니에 담긴 두 개의 달걀, 같은 흙반죽에서 나온 두 개의 도자기 공 같았지. 네 찌푸린 얼굴, 우는 얼굴, 깔깔 웃는 얼굴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부서지며, 가까스로 무사히 모아 붙여지며 흘러갔지. - P81
이제 네 시디는 다 돌아갔고, 밤은 아까보다 더 깊어졌어. 네 목소리가 정적 속에 스며들어서, 이 정적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진다. - P83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내 눈의 밤이. - P83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 P84
παθεῖν μαθεῖν
‘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P85
하지만, 이 단어들의 중첩을 단순히 언어유희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인가를 배워 깨닫는 일은 글자 그대로 수난을 의미했으니까요. 소크라테스 자신은 생전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그를 지켜본 젊은 플라톤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었을 겁니다. - P86
언젠가는 낱장마다 잔뜩 밑줄이 그어진 갈레노스의 원서를 들고 와, 해부학과 관련된 부분의 해독을 희랍어 강사에게 부탁해 강사를 난처하게 하기도 했다. 원전 해석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에게 강사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고대 희랍어는 유럽 사람들도 다들 어려워해요. 한국의 젊은 사람들한테 한문 고전을 바로 독해하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것처럼………… 여기서 너무 완벽하게 해가려고 하진 마세요. - P87
흑판에 씌어진 모국어 단어들이 그녀의 오른주먹 안쪽에, 땀으로 축축해진 육각 연필의 매끈한 표면에 소리없이 으깨어져 있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깊게 들이마신다. - P87
왜 일 년 동안 까만 옷만 입어야 돼?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마음이 밝아질까봐 그런 거 아닐까. 마음이 밝아지면 안 돼? 죄스러우니까. 할머니한테? .....그치만 할머닌 엄마가 웃으면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 P89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해지기 위해 걷는다. 이제 돌아가야 할 집의 정적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검은 나무들과 검은 커튼과 검은 소파, 검은 레고 박스들에 눈길을 던질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격렬한 졸음에 취해, 씻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설령 악몽을 꾸더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이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 생생한 새벽시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끈덕지게 되불러 모으지 않기 위해 걷는다. - P90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ㅡ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ㅡ믿는 자신이. - P94
제논과 세슘137. 반감기가 짧아 곧 사라졌을 방사성 요오드131. - P96
조각난 기억들이 움직이며 무늬들을 만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의미도 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한 순간 단호히 합쳐진다. 무수한 나비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멈추는 것처럼. 얼굴을 가린 냉정한 무희들처럼. - P100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 P102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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