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이 시집에 나온 시구들에 대한 해설자의 해설을 일부 살펴봤다. 해설자 분이 아무래도 이 쪽 분야의 전문가이시다보니 일반인인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도 이 시집에 나왔던 시구들 중 몇 가지를 해설자가 직접 골라서 설명해준다. 비록 여기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아니지만, 마치 이런 곳들에 직접 방문했을 때 작품이나 전시품들의 중요 포인트들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앞에서 한 번씩 읽었던 시구들이라 그런지 읽었던 시들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강의 시는 곳곳에서 영혼의 상처에 대해 말하면서 그 상처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영혼의 상처가 회복 불능의 것이고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의 삶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그런 삶에는 분노와 슬픔을 넘어 절망과 무기력과 체념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 P146

삶을 절망 속에 방기할 수 없는 영리한 사람들은 남은 삶을 위해 영혼의 상처를 애써 봉합하려 한다. 그러나 한강의 화자들은 고통과 마주하는 일을 피할 생각이 없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질 생각도 없다. 한강에게 상처의 고통을 지속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일종의 방법론이 된 듯하다. - P146

삶의 위기는 쉼 없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를 놓아버리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안간힘을 쓰며 삶을 향해 가까스로 손을 내밀겠지만,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다시 산산조각 내버리고 마는 잔인함이 우리의 삶 안에 내장되어 있기도 하다. - P147

특별한 불행과는 무관하게 삶과 전면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민감하고도 강한 영혼과 허약한 육체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 P148

타락한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한강의 화자들은 그 불화를, 즉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픔을 주로 육체의 고통을 통해 드러내곤 한다. 상처받은 무구한 영혼의 존재가 피 흘리는 육체를 통해 체화되는 형국이다. - P148

한강의 세계관은 육체를 영혼의 그릇으로 생각하는 고전 철학의 그것에 가깝다. 인간의 육체는 보잘것없는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그 허상으로 인해 오히려 영혼의 존재가 더 숭고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순수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육체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다. 타락한 세계로부터 영혼의 순수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은 고통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강은 말하는 듯하다. - P148

고통의 삶을 통해서만 영혼의 소유자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삶 속에 이미 구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 살아내는 것 자체가 구원인 셈이다.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가 흘리는 피눈물을 그저 감내하는 것만이 타락한 세계에 처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 P151

언어와 더불어 인간은 영혼의 존재가 되었다. 한강의 시를 읽는 우리는 이제 언어와 영혼을 동의어로 취급해야 한다. - P151

육체를 피 흘리게 함으로써 세계와 불화하는 무구한 영혼의 존재를 증명했듯, 한강의 시는 다른 한 편에서 일상의 언어를 피 흘리게 함으로써 침묵으로부터 최초의 언어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순간을 복원해내려고 한다. - P152

인간의 말이 순수해질 때 그것은 그림과 가까워진다. - P152

그(막스 피카르트)에 따르면 그림의 침묵은 "말의 어머니"이다. 그림은 "인간이 말로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림의 침묵에 대항하면서 말이 "최초의 현존"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말을 배우기 이전 아이의 영혼이 그림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 P152

침묵에 맞서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려는 순간의 말은 온전히 진실된 것이었다. 그러나 침묵의 그림을 해석해내려는 말은 이미 타락한 것이 된다. 막스 피카르트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면서 꿈의 그림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꿈의 그림을 훼손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파괴된 말‘을 사용하여 ‘파괴된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P152

말할 수 없는 것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침묵의 이미지인 미술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 P153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지속하지만,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 P153

언어가 주는 고통과 싸우는 것, 즉 일상의 언어에 대해 불편한 이물감을 드러내는 것은 최초의 말이 지닌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 P153

어둠 속에서 오히려 보려 하고 빛 속에서 오히려 듣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언어의 물질성을 활용한 일상적 소통의 익숙함을 거절한 자들이다. - P154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 P3

어둠을 보고 빛을 듣는 그 불편한 세계가 그녀에게는 왜 투명한 세계가 되는 것일까. 순수한 관념으로서의 언어와 마주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 P154

피투성이의 고통과 더불어 말 자체도, 그리고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영혼도 비로소 진실할 수 있다고 - P154

도구로서의 언어가 아닌 존재로서의 언어 - P154

흔히 타지를 방문한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은 소리에 둔감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저 분절되지 않은 소리의 덩어리로 감지될 뿐이다. 마치 침묵의 공간에 있는 듯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침묵 속에서라면 눈앞에 있는 사물들이 더 명징해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명징하고도 낯선 풍경속에서 오히려 자기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경험이 뒤따라야한다. - P155

개기일식의 순간에는 태양이 달의 그림자에 온전히 가려짐으로써 한낮의 시간에도 암흑을 경험하게 해준다. - P156

어떤 언어로도 이해 불가능한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는 응시 - P157

거울을 통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직접보려는 사람처럼 마주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보고자 하는 - P157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침묵과 어둠의 공간에서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의 존재이다. - P157

선이 아닌 단지 면으로 이루어진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추상화를 마주하고 있는 심정을 한강은 "어떤 소리도/광선도 닿지 않는/심해의 밤‘에 들어앉아 있는 느낌으로 그려낸다. - P159

침묵과 암흑의 공간에 놓여 "내가/나라는 것도" 잊은 채 시인은 천천히 자신의 실핏줄 속으로 번져오는 "당신의 피"를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피"를 감지하는 그 생생한 느낌이 바로 누군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영혼의 만남을 위해서는 소리도 빛도 방해가 될 뿐이다. - P159

죽음으로부터 삶이 탄생하고 어둠으로부터 빛이 탄생했다. - P159

앞에서 우리는 언어가 그림의 침묵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소리도 빛도 없는 공간에서 ‘나‘의 실핏줄에 스며들고 있는 "당신 영혼의 피"를 우리는 언어의 영혼이라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 P160

언어가 타락한 세계를 애써 거절하는 방법은 오로지 침묵뿐 - P162

말을 배울 때 우리가 처음 접하는 것은 오로지 재귀적 용법만을 갖는 명사들이다. 그 무엇의 이름도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인 말들의 존재를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과 언어의 넋이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말과 동거하는‘ 시인의 숙명이자 환희라고 - P162

일상의 언어에 익숙해진 혀를 녹인 이후에 비로소 천천히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들이 모여 비로소 시를 이루게 되는 것 - P162

"어깨를 안으로 말고/허리를 접고/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지워진 단어"(<심장이라는 사물>)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한강은 시인이 된 이후부터 줄곧 언어와 한몸이 되어 언어의 타락을 앓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고통의 시간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고 있다. - P163

침묵에서 진실된 말을 건져 올리려는 - P163

아이들이 말을 배우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애초에 그림과 말은 분절되지 않는 침묵의 공간을 그 기원으로 공유하고 있다. - P164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 P164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영혼‘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 - P164

"살아 있으므로" - P164

달의 그림자에 가려 붉은 테두리로만 존재하던 태양이 개기일식이 끝나는 순간 다시금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강의 더딘 작업속에서 훼손된 언어와 영혼이 본연의 빛을 되찾는 순간을 분명 목격하게 될 것이다. - P164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 P164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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