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과학자들이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 배경 복사의 세기‘를 관측하고 정밀 분석한 결과 우주 배경 복사에 약간의 비대칭성이 드러났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은하수 은하가 자신이 속해 있는 국부 은하군의 다른 은하들과 함께 처녀자리 은하단 방향으로 초속 600km 이상의 속력으로 달려간다‘(p.511)는 가정을 덧붙이면 비대칭성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은 대략적인 글의 맥락만 이해했을 뿐이다. 본문의 내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최대한 이해하려 애써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가정에 뿌리를 두고 오늘 포스팅에선 우리 은하가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며 시작한다.

왜 우리 은하는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고 있을까? 우주 배경 복사를 고공에서 관측한 조지 스무트George Smoot와 그의 동료들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중력 작용으로 우리 은하수 은하가 이 은하단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 P511

스무트는 그 은하단 내부에 여태껏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은하들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 은하단이 차지한 공간 역시 20억 광년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규모라고 밝혔다. - P511

우주의 탄생 초기에 물질 분포의 비균질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지금의 처녀자리 초은하단 정도의 질량을 끌어 모으기에는 우주의 나이가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배경 복사의 관측 결과는 처녀자리 초은하단에 그렇게 거대한 양의 물질이 몰려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해석됐던 것이다. - P512

따라서 스무트는 대폭발 당시 우주의 물질 분포에는 상당한 수준의 비균질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수행한 우주 배경 복사의 고공 관측 결과가 자신의 예상에 걸맞은 수준의 비균질성을 보이지 않았지만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질량으로부터 그는 우주 초기의 물질 분포가 심하게 불균일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512

완전 대칭인 배경 복사장 안에서 관측자가 움직인다면, 운동 방향에서 오는 빛은 청색 이동을 일으키고 반대 방향에서 오는 빛은 적색 이동을 할 것이다. 즉 우주 배경 복사가 관측자의 후방보다 전방에서 약간 더 밝게 보일 것이다. - P512

또한 밝기의 차이는 속력에 비례할 것이다. 밝기 분포의 이러한 비대칭 성분을 우리는 쌍극자성분이라고 부른다. 스무트의 우주 배경 복사 관측에서 쌍극자 성분이 검출됐으며, 이것을 이용해 우리 은하수 은하의 운동방향과 속력을 결정할 수 있었다. 운동의 방향은 처녀자리 쪽이었고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질량은 속력에서 가늠할 수 있었다. - P512

은하수 은하가 처녀자리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만을 놓고 볼 때 처녀자리 초은하단에 막대한 양의 질량이 몰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 배경 복사의 고공 관측 결과에서는 그러한 규모의 비균질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패러독스라는 말이다. - P512

거의 동시에 매우 좁은 영역에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대폭발이 있었다면, 이 패러독스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P513

현대 관측에서는 다양한 척도의 비균질 분포 구조를 우주 배경 복사에서 검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관측결과가 우주론의 제한 조건으로 쓰인다. - P512

사람들은 보통 특이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신의 몫으로 떠넘긴다. 이것은 여러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다. - P513

하지만 신이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만일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떨까? 또 한편으로,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 P513

어느 문화권이든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세상이 "신들의 짝짓기에서 만들어졌다."라거나, "우주의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식의 소박한 우주관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신화들은 우주가 사람이나 동물이 하는 바를 따라했다는 순진한 상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P513

과학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제안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위하여 실험하고 관찰한다 - P515

어느 문화권이든 사람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주기성을 즐기며 그 주기성을 최대로 활용한다. - P515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의 주기성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수십 년 세월의 인생에도 주기성이 있다면 영겁의 신의 세계라고 주기성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 P515

인류 문화의 위대한 종교들 중에서 힌두교만이 코스모스가무한 반복된다는 것을 믿는다. 우주가 생生과 멸滅의 끝없는 순환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 P515

현대 우주론이 밝힌 시간 척도와 비슷한 크기의 척도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힌두교이다. - P515

일상의 하루는 낮과 밤 24시간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의 하루는 지구인의 시간으로 86억 4000만 년에 해당한다. 86억 4000만 년이라니! 이것은 지구나 태양의 나이보다 긴 시간이고 우주가 대폭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과한 시간의 절반도 넘는 참으로 장구한 시간이다. 힌두교의 가르침은 브라흐마의 1년보다 더 긴 세월도 언급한다. - P516

우주가 신의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는 누구나 심오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 P516

신은 브라흐마의 1년이 100번 지난 다음에 스스로를 분해하여 꿈 없는 잠의 세계와 합일한다. 그러면 우주도 스스로를 해체해서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브라흐마의 1세기를 지낸다. 그 다음에 신은 잠에 빠진 스스로를 꿈틀거리며 깨워 자신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다시 우주적 꿈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생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각각 우주적 꿈을 꾸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 P516

그런데 힌두교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다른 가르침, 어찌 보면 더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 발전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신의 꿈이 아니라, 신이 사람이 꾸는 꿈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가르침이다. - P516

인도 문화에는 신이 많은데, 같은 신일지라도 그 현현 양식이 다양하다. - P516

11세기에 만들어진 촐라 Chola 왕조의 청동상에서 우리는 시바 Shiva 신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바 신의 여러 현신現身 중에서 우주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할 때마다 이루어지는 창조를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 가장 우아하고 장대하다. - P516

시바의 우주적 춤을 모티프로 한 이 청동상에서 시바 신은 네 개의 손을 가진 춤의 제왕 나타라자 Nataraja로 나타난다. 위로 치켜든 오른손은 창조의 소리를 내는 북을 들고, 왼손은 화염을 쥐고 있다. 널름거리는 불꽃의 혀는 이번에 새로 태어나는 우주도 수십억년 후에 다시 멸망함을 상징한다. - P516

심원한 의미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 신상들에서 나는 현대 천문학에서 태어날 각종 아이디어들의 전조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낼 수 있다. - P517

마야 문명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 개념도 아득한 과거에서 때로는 먼 미래로 넘나든다. 100만 년 이상의 과거를 언급한 유적이 하나 있다. 마야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논의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유적은 4억 년 전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에 언급된 사건 자체는 신화적 설화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의 척도에서 우리는 마야 문명의 비범성을 만나게 된다. - P517

세상의 나이가 겨우 수천 년이라는 성서적 사고의 오류를 유럽 문명이 겨우 인식하기 시작한 게 인류사의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 1,000년 전에 마야 문명은 이미 100만 년의 세월을 생각할 줄 알았고, 인도인들은 수십억 년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517

우주는 대폭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팽창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우주가 영원무궁 팽창할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우주 팽창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 멈춘 다음, 팽창의 방향을 바꿔 수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517

우주에 내재하는 물질의 밀도가 어떤 임곗값보다 작으면 현재 후퇴 운동 중인 은하들 사이의 중력이 팽창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우주의 팽창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 P517

그러나 만일, 빛으로 관측 가능한 물질의 질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질이 우주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면 후퇴하던 은하들은 중력으로 서로 묶여서 인도의 창조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우주적 주기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 - P517

한편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소위 ‘잃어버린 물질‘의 후보로서 블랙홀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P517

밀도가 매우 낮고 온도가 지극히 높은 물질도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쉽게 걸리지 않는데, 은하들 사이의 공간이 저밀도고온의 물질로 채워져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을 이용한 관측으로 검출할 수 있는 천체들의 총질량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우주에 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영원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것이다. - P518

수축과 팽창의 새로운 주기가 열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코스모스, 그것은 바로 인도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우주의 실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가 바로 그렇게 진동하는 우주라면 대폭발은 우주 창조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전 우주가 완전히 파괴되는 최후의 순간으로 볼 수도 있다. - P518

우리는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도 싫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도 달갑지 않다. 우선 지금으로부터 100억 년 전인지 200억 년전인지 그 구체적 시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떻든 하나의 우주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 팽창을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 P518

무한정 계속 팽창하는 우주론에 따르면 은하들은 팽창과 더불어 우주의 지평선cosmic horizon 너머로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다. 그러다가 은하수 은하의 지평선 안에 끝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은하마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면 홀로 남은 은하수 은하는 우주적 고독을 혼자 참아 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구상에 살던 외계 은하 연구자들의 일거리가 없어진다. - P518

어디 그뿐인가. 별들은 차갑게 식어 모두 죽고, 물질은 모조리 소립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결국 소립자들만이 흐릿하게 분포하는 아주 재미없고 적막한 세상이 도래한다. 이것이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가 맞이할 최후의 운명인 것이다. - P518

진동 우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진동 우주에서 코스모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생과 멸의 중간에 자리할 뿐이다. 한 주기가 끝나고 다음 주기로 넘어갈 때, 앞의 코스모스에서 다음 코스모스로 어떠한 정보도 흘러 들어가지 못한다. 전생 우주에 있던 은하, 별, 행성, 생물 그리고 문명이 후생 우주가 태어나는 대폭발의 특이점을 넘지 못하고 모두 사라지고 만다. - P519

영원무궁의 팽창 우주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위안 삼을 만한 점이 있다면 운명의 그 순간까지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수백억 년, 또는 이보다 더 긴 세월이 남아 있다. 코스모스가 멸망할 때까지 수백억 년의 세월 동안 현생 인류와 그의 후손이 이룩할 위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우리를 우주적 우울증에서 구원해 줄 것이다. - P519

우주가 실제로 진동한다면 의문의 행렬은 계속된다. 팽창에서 수축으로 바뀔 때, 그래서 은하의 적색 이동이 청색 이동으로 반전될 때 인과因果관계에도 역전이 생겨 결과가 원인에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연못에 파문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내가 돌을 던지는 격이란 이야기이다. 또 횃불이 타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성냥을 그어 댄다는 식의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될 시기에는 무덤에서 탄생을 맞고 어머니 뱃속에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다니, 도대체 뭐가 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인과 관계의 역전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아는 체하기 어렵다. 시간이 거꾸로 흐를까? - P519

과학자들은 팽창이 수축으로 바뀌는 순간 진동 우주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한다. 자연의 법칙들이 그 순간 무작위적으로 마구 뒤섞인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 현상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물리학과 화학의 제반 법칙들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매우 제한된 범위의 법칙들만이 현생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은하, 별, 행성, 생명 그리고 지능 등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 P520

우주의 팽창과 수축이 역전되는 순간에 법칙들이 멋대로 뒤섞인다면 그때 얻어지는 법칙이 현생 우주를 설명하는 법칙들과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실질적으로 0이다. 그러니까 전생 우주와 현생 우주 사이에 어떤 공통성도 기대할 수 없다. - P520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팽창과 수축의 변환점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P520

우주가 이미 여러 차례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으며 그때마다 다른 중력 법칙들이 선택됐다고 하자. 중력 법칙의 후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매우 미약한 중력을 동반한다. 이렇게 미약한 세기의 중력만으로는 우주를 한데 묶어 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선택한 대부분의 중력에서는 우주가 흩어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팽창과 수축의 반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중력 법칙의 새로운 후보가 채택될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 P520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주가 유한한 기간 동안만 존속하든가, 팽창ㆍ수축의 매 주기마다 자연은 제한된 극히 일부의 법칙들만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완전히 제멋대로일 수는 없다. 후보 법칙들에서 선택이 이루어질 때 모종의 규칙이 준수돼야 할 것이다. 어떤 법칙은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선택해서는 안 되고 하는 식의 제한 조건들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 P520

‘법칙 선택의 법칙‘ 은 기존의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언어는 빛을 잃는다. 새로운 물리학에 붙일 적당한 이름을 찾기 어렵다. ‘파라물리paraphysics‘ 이니 ‘메타물리 meta-physics‘ 니 하는 이름들은 여기서 요구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초월물리transphysics‘ 라는 표현은 어떨까? - P520

우리 우주가 영원무궁 팽창하는 우주인지, 아니면 팽창과 수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우주인지 누구나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주 물질의 재고를 조사하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스모스의 끝, 영원의 벼랑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 P520

전파 망원경은 아주 멀리 있는 천체의 미약한 신호도 잡아낸다. 그래서 우리는 수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퀘이사의 신호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퀘이사라고 해도 5억 광년은 떨어져 있고, 100억 광년, 120억 광년, 아니 이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들도 많다. - P520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볼수록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에 일어난 상황을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다. 따라서 120억 광년 떨어져 있는 퀘이사를 관찰하는 것은 그 퀘이사의 120억 년 전 모습을 보는 것이다. 멀리 볼수록 더 오래된 과거에 손을 대는 것이다. 우주의 지평선 근처를 본다면 우리는 대폭발 시대의 우주와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 P521

대형 배열VLA, Very Large Array은 27대의 전파 망원경으로 구성된 전과 간섭계로서 뉴멕시코 주의 오지에 설치돼 있다. 개별 망원경이 수신하는 전파 신호의 위상을 모두 고려해서 망원경의 배열을 미리 결정하고 관측을 시작한다. 구성 망원경들을 전선으로 연결하여 각 망원경으로 들어오는 신호의 세기와 위상을 합성함으로써 망원경 27대가 하나의 망원경같이 작동하도록 고안됐다. - P521

가장 먼 두 안테나의 거리가 합성 망원경의 지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대형 배열은 지름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따라서 대형 배열은 가시광선 대역을 분석하는 광학 망원경처럼 전파 대역의 자잘한 스펙트럼을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전파 망원경이다.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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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책의 중후반부를 지나고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하는 부분은 뭔가 좀 추상적인 얘기들이라 약간 뜬구름 잡는 듯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고자 한다. 예전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을 때도 내용이 다소 난해했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 오늘 읽는 부분이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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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밑줄 친 부분에서 ‘무의식‘ 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최근 함께 읽고 있는《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라는 책에서 ‘무의식이 현실을 만든다‘ 라는 문장을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더 알아봐야겠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 뒤로 물러나 그로 인한 혼돈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 도덕심이나 의협심, 혹은 근사한 겉모습 따위는 모두 떨쳐 버리고 우리의 충동과 욕구, 불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뤄졌을 때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 비로소 우리가 살아 내야 하는 실제의 삶을 위한 가치관을 세우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규율과 금지 사항을 정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낯선 힘과 관계를 맺는 것과 같다

atman(아트만): 인도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말하는데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브라흐마가 우주작용의 근거라면 아트만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근거 짓는 핵이다.

내가 알고 있으며 예감하고 있기도 하지만, 바로 나 자신이 내면적으로는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그 무언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었던 것, 나의 생각과 작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내가 《싯다르타》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것

심리 분석은 구제의 수단이자 동양의 가르침(붓다, 베단타, 노자)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

심리분석이 단순한 치료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 즉 새로운 단계의 인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것

학문은 돈벌이 혹은 하찮은 장난으로 전락해버렸다(칸트와 헤겔을 비롯하여 모든 독일 철학자들이 사색의 결과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문학은 오락이자 장난이며 기만에 불과하고 그 전체가 허영으로 가득 찬 장사판과도 같다.

에른스트 찬과 토마스 만 혹은 강호퍼와 헤르만 헤세 사이에는 이제 이렇다 할 차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곳에나 도덕과 신성한 가치, 그리고 초개인적인 힘을 얻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려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명성, 혹은 어떤 당파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며 생각하고 정치 활동을 한다.

노동을 하고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며 그것을 더 높이 세우려는 시도는 오직 인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모두 강물처럼 함께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다. 그 강물 안에서는 마치 초기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개인의 업적이나 실수는 즉시 익명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진지하게 그것을 믿을 수 있고, 기쁨이나 신념, 그리고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들이 독일 작가의 손끝에서 써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계에 이르면 고통은 끝이 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삶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하겠지만, 그럴 때의 고통은 생명이자 희망이다.

고통스러웠던 것만큼 나는 또 고독했다. 지금 나는 내게 최악이었던 시기와 조금도 다를바 없이 외롭다. 하지만 고독은 나를 더 이상 달랠 수도 없고 아프게 할 수도 없는 독약과도 같다. 나는 그 독성에 대한 저항력이 충분히 강해질 만큼 그것을 많이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독이 아니라 단지 고독이 변한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 받아들일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며 고맙게 받아 마실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독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색의 힘을 과대평가해 왔으며 사색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했다. 사색을 하는 동안 나는 패배자가 되기도 하고 승리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사색을 통해서 배운 것이 없으며 내가 읽은 글의 수많은 저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으로부터 얻은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단번에 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수없이 많은 본보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새기고 따를 수 있는 근사한 순간들 가운데 일부를 경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처럼 보기 드문 순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이 그와 같은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칸트나 쇼펜하우어, 셀링을 통해서 체험한 것은 <마태 수난곡>이나 만테냐의 그림,《파우스트 Faust》 등에서 체험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 철학이란 창조적인 철학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제자나 독자 혹은 비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자는 모든 존재가 성숙과 성취의 순간에 느끼는 것, 이를테면 여인이 출산할 때나 예술가가 창작할 때 혹은 나무가 계절과 해가 바뀔 때 느끼는 것을 자신의 세계 창조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그런 것을 ‘단지‘ 무의식적으로 체험하는 반면에 철학자는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그저 의식 하나에 그처럼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물의 범위를 끊임없이 내 의식의 시야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지니는 가치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 사이에서 복잡하지 않고 막힘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뿐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물체이며, 로마 웅변가의 유명한 비유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몸 안에서 무의식은 위胃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논쟁을 벌일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의 존재가 좁고 깊은 호수라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수면이 바로 의식이다. 그곳은 밝은 빛을 비추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다.

수면에 있는 물 분자 자체는 쉴 새 없이 바뀐다. 끊임없이 밑에 있는 물 분자가 위로 올라오고, 또 위에 있는 물 분자가아래로 내려가면서 흐름이 생기고 보충을 하기도 하고 위치이동이 일어난다. 또한 어느 물 분자나 한번쯤은 위에 머물고 싶어한다.

물로 이루어진 호수처럼 우리의 자아 혹은 우리의 정신 역시 수천, 수백만 개의 분자, 즉 끊임없이 성장하고 교체되며, 무언가를 소유하고 기억하며 표현하려는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

호수에서 우리의 의식이 보는 부분은 좁은 수면뿐이다. 정신은 수면 밑에 펼쳐진 무한하게 넓은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넓고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 좁은 수면의 밝은 부분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교체가 진행되는 정신은 풍부하고 건전하며 다행히도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도 없이 많은 생각들을 마음속에 품는다. 그런 것들은 밝은 표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결코 없으며 밑에서 고통스럽게 썩어 간다. 그런 생각은 부패해 가며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의식에 의해 계속 거부를 당하게 되고 의심과 우려의 대상이 된다. 해롭다고 인식되는 것은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모든 윤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사실상 해롭거나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속하며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윤리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지 관념적인 입장이나 어떤 미학적인 염세주의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삶이 슬픔과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는 것보다 고통을 느끼는 데 더욱 재능이 있다. 그리고 숨 쉬는 것과 잠자는 것, 먹는 것, 소화시키는 것 등 가장 단순하고 본능적인 행위는 모두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고통스럽고 번거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이기며 자포자기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내적으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기쁘고 유쾌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가지려 한다. 게다가 평범하고 건강하며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처럼 그럴싸한 것들에게는 대단한 가치를 둔다.

한편 자연은 그런 사람들의 인생행로에서 최고로 멋지고 복잡한 것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 바로 유머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혹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별로 잽싸지 못한 데다가 지나치게 즐거움을 좇으며 위안받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때때로 흔히 유머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깊고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만 자라는 수정과도 같으며, 어쨌든 그것은 인류의 생산물 가운데 좀 더 나은 것에 속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힘든 삶을 그대로 견뎌 내고 심지어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 유머는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들, 즉 건강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항상 정반대로 작용하여 마치 억제할 수 없는 삶의 기쁨과 유쾌함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머를 들으면서 건강한 사람들은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큰 소리로 웃어 댄다.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쓴다고는 하지만, 유머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제목과 주제는 모두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상그들의 주제는 예외 없이 단 한 가지뿐이다. 즉 별난 슬픔과더러운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사, 그리고 삶이 그토록 비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근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구두 수선공은 구두 수선공으로 남아야 하는 것처럼 은자도 은자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직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기웃대는 행동을 할 때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고, 사람들도 그것을 납득하겠지만, 보통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당시에는 삶을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지금의 나는 삶을 사랑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 고립감은, 나의 내면에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까닭 모를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게임 규칙에 따라 인생을 유쾌한 단체 게임으로 여기고 함께 즐기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좋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은 얼마나 빨리 배우게 되는지,
또 게을러빠진 개나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돼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육체적인 나쁜 습관과 나태함은 정신적으로도 그와 같은 상태를 수반하는 법이다.

나태함이 이성보다 더 강하고, 게을러서 살찐 배가 조심스럽게 호소하는 정신보다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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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개정증보판 포레스트 에디션)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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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이 가진 특유의 섬세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는 말들의 이면에 숨겨진 뜻을 보다 더 깊이있게 들여다 본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 말들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읽으면서 저자가 왜 유명한 프로 작사가인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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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자가 라디오 DJ를 하면서 청취자들과 나눴던 ‘실연‘ 과 관련된 글로 시작한다.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 인연의 헤어짐이라는 것에 있어서 그 이유를 반드시 나에게 귀속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잘못이나 문제보다는 단지 양 당사자들 간의 어떤 타이밍같은 것이 어긋나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하게 귀책사유가 나에게 있는 경우도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틀어졌을 때 과도하게 자기자신을 탓하며 비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취지로 말한 것임을 참조해서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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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소재로 글이 더 이어진 뒤 마지막에는 작사를 본업으로 하는 저자가 직접 썼지만 아직 출시된 곡들에는 반영되지 않은 창작 가사들이 소개되어 있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눈길을 사로잡거나 공감이 되는 가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건 꼭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이 끝났을 뿐인데."

선택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선택을 받았다가 되돌아간 마음이니까 그게 참 받아들이기가 힘든 일이긴 한데…. 내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죠. 이건 그저 상대의 마음 온도가 식어가는 속도같은 게 두 사람이 맞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인 거죠.

좀 수줍어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 수치심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눈치라는 게 조심성이기도 하니까, 뭔가 남들 시선을 너무 걱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적당한 조심성은 생명력 있는 어른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소소한 일탈을 해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늘 먹던 음식이 아닌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고,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음악 장르를 들어보는 그런 소소한 일탈들이 모여 단조로운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낭만은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행복에 더 충실한 단어예요. ‘세상이 보기에 어떻고 나의 역할은 이래야 하고‘ 이런 거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져서 나만의 세상을 그려나가라는 의미더라고요.

문득문득 환기하지 않으면 ‘이 단어의 원래 뜻이 뭐였지?‘ 하게 되는 너무나 좋은 단어들이 있어요. 낭만 또한 그런 단어인 거 같습니다.

후회는 많은 선택권이 있을수록 더 커집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거든요.

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반드시 한 가지를 결정해야 할 때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선택한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후회밖에 없는 그 선택도 ‘그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는 거죠.

수많은 노랫말을 만들어왔지만 실제로 발표된 곡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이 몰랐었는지 좀 알 것 같아 또 넘어질 나란 걸 알 것 같아 이제야 겨우 기댈 법을 좀 안 것 같아 어떡해야 힘을 좀 빼는지도

설렘은 내게 불안이라서 늘 겁이 났어

참 별일 다 있단 생각을 하지 살아가는 일이란 참 모를 일이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픔이 추억이 되고 미워한 사람이 친구가 되고 궁금할 것도 없었던 널 사랑하기도 하고 흘려듣던 옛 노래가 마음에 들어오고

세상은 참 이렇게 모를 일이야 그게 참 고마운 거야 하루하루 새로운 게 알듯 말듯 하기에 여전히 난 가끔은 설레이니까

어쩌면 말이란 건 각자가 그리는 그림

우린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헤아리고 또 헤아리면 그걸 사랑이라 부르죠

세상의 모든 건 결국 지나간다고

우리의 내일을 말하지 마 지금을 부디 흘리지 마

이 안에 이곳에 나라는 세상에 네가 숨을 쉬고 있어 니 안에 그 곳에 너라는 세상에 내가 숨을 쉬고 있기를

좋을 때, 슬플 때, 힘들 때 결국에 마음이 닿는 곳은 결국 너 이럴 땐 어쩔 땐 생각해 널 떠올리려 눈 뜨는 것 같다고

풀지 못한 문제가 있어 너라면 어떤 길로 답을 찾아 갔을까 그러면 답이 좀 보이곤 해

긴 밤엔 별을 셀 수 있어서 깊은 꿈을 꾸어서 더 먼 곳을 볼 수 있는 나를 또 만나게 돼

내게 제일 어울리는 리듬을 가슴속에 품으면 그게 내 숨인 걸 이제 알 것 같아

기억해, 그날의 아픔을
기억해, 그 모든 추억들

슬픔이라는 건 내 맘대로 버릴 수가 없다는 걸 배운 거야 니가 없는 이곳에서

넌 니가 진짜로 원한 게 뭐라고 생각해?
또 그게 옳다고 생각해?
Don‘t let it go, don‘t let it go

올려봤던 하늘에 그 달빛을 기억해 다시 머릿속에 그린다 그리고 난 꿈꾼다 나를 잃지 않도록

오늘도 부딪혀 난 툭 털고 지나쳐 난 좀처럼 안 미쳐 난 끓는점이 달러

이 세상에 난 하나뿐이길래 내가 그린 선을 따라가 네모난 종이엔 어울리지 않아 I draw my way

나를 구겨 넣으려 하지 마

그래 난 틀리진 않아 좀 달라 잘 봐, 우린 전부 남달라

이 세상에 날 보내주었길래 나는 나를 믿고 살아가 기나긴 줄 뒤에 기다리지 않아 I got my way

꽃이 피면 그땐 니가 날 알아보겠지

늘 날 비껴가던 봄이 내게도 온다면 단 한 줌의 흙으로 한 줄기 빛으로 드센 바람결에도 끝내 버틴 뿌리로 흐드러진 꽃을 피워 누가 기억해줄 한 송이로

내 이름 곁에 누군가 의미를 남겨준다면 지친 적 없이 꿈을 꿨다는 말로 날 불러주기를

걸음을 멈춰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면 그 순간은 찰나라 해도 슬픔이 없기를 나의 기나긴 기다림의 이유였다고 믿을 수 있게

이제서야 나보다 더 작아진 그대를 보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내가 비겁해

그댄 나의 커다란 뿌리였고 항상 나를 품은 그늘이었고 마주보지 못한 태양이었고 나보다 더 나의 이름이었어

매일이 버거운 건 당연했어 내 청춘에게 난 가장 못됐던 사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 어느 순간의 나였어 울고 웃었던 건 당연했어 나는 나를 제일 몰랐던 사람

멀리서 비로소 보이는 이제야 당연한 것들 소중한 건 늘 가까이에 그리고 조금은 하찮은 것들 그렇게 선명해진 너

예민하게 수집한 단어로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사람, 그 단어들로 연결된 문장으로 감각을 노래하는 사람.

노랫말은 시와 달라서 너무 생경한 단어를 쓰기도 어렵고 지나치게 난해한 표현을 써서도 안 된다. 들을 때 귀에 쉽게 감겨 와야 하니 누구나 쓸 법한 일상어가 주재료다.

보통의 언어들이 지닌 힘

말을 쓰고 다루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사는 방식과도 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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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감이라는 것이 체력에서 온다는 얘기를 했었다.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덧붙이며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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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저자의 얘기를 읽기 전부터도 체력이 진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하루하루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다보면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저자도 본문에서 고백했지만 젊을 땐 진짜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몸에 안좋은 것들을 아무리해도 비교적 금방 회복되는 게 느껴지지만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아마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좋았던 때라는 것을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좋든 싫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꾸준한 운동과 자기 관리를 한다면 좀 더 말랑말랑한 ‘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저자의 경우처럼 영감이 필요한 일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일이든 간에 좋은 컨디션으로 롱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너무 오래 앉아있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운 운동이라도 꾸준히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운동해서 남주는 거 아니고 결국 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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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쳇바퀴를 굴리다‘ 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 글의 제목이 다른 각도에서 보면 딱히 그렇게 부정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해준다. 뭔가 예상이 되는 것은 뻔하고 재미없어보일 수도 있지만 미래에 대해 불안하지 않은 안정적인 상태일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는 게 저자의 얘기였다. 이는 물론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저자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사람의 성향과는 별개로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냥 막연하게 안좋게만 보이는 것에도 그 이면에는 좋은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가급적 긍정적인 면들을 보려고 하는 태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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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3 ‘자존감의 언어‘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보통의 언어는 바로 ‘기특하다‘ 이다. 여기서 저자는 타인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기특하게 여기기 위해 꼭 거창한 일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사소한 것들으로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이 한 것들에 대해 기특하다고 토닥여주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져보는 것도 마음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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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나오는 글중에 ‘완벽의 비결‘ 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의 창업자인 에드윈 캣멀이 했던 말이 소개되는데, 핵심은 시작은 별볼일없었지만 계속해서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진화해나갈때 완벽에 점점 가까워 진다는 것이었다. 완벽해보이는 것 뒤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완벽해보이고 사람들은 그 겉모습을 부러워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노력들은 잘 보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부러워만 하지말고 그에 걸맞는 대가를 마땅히 지불하는 것만이 완벽에 가까워질수있는 유일한 비결임을 항상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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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걱정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오는데, 특별히 인상깊게 느껴졌던 얘기 중에 문제가 명확할 경우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기에 걱정을 할 시간조차도 없다는 말이 와닿았다. 걱정의 늪에 빠지는 건 그것이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뜬구름 같은 걱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막연한 걱정거리들이 떠다닐 경우 책을 읽음으로써 그것들을 떨쳐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렇게 해보면 막연했던 걱정거리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읽고있는 책의 내용에 집중하게 되어 좋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근심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하신 분들이 있다면 내가 하는 방식으로 근심걱정을 날려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기에 추천하는 바이다.

30대 중반 언덕을 넘길 때쯤, 가사가 예전 같은 속도로 나오지 않는 시기가 있었다. 이때 나는 오만하게도 ‘감이 떨어졌구나‘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은 겸허해짐과 동시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제대로 된 것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예전의 감각이 돌아온 것이다.

‘뇌‘라는 것은 결국 몸뚱이의 일부이니 피가 쌩쌩 돌고 산소가 공급되어야 원활히 돌아갈 터이고, 튼튼한 몸이 받쳐주는 지구력으로 버티는 시간이 있어야 ‘영감‘이라는 게 오더라도 잡을 기력이 있는 것이다. (건강이 자산이라는 말... ‘젊은이‘로 분류되는 나이에는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이던가!)

영감뿐이랴.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은 의지, 힘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근성, 새로운 기회가 오기까지 잠복하고 버티는 힘.... 모두 결국 체력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게 많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다루느냐에 따라 내일의 질이 달라질 뿐이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인생‘이라는 말은 주로 비관적으로 쓰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패턴‘이 만들어지는 순간 설렘과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연애도, 음악도 다음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지루해진다. 또한, 패턴이 남발되는, 클리셰 범벅인 드라마는 사랑받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태도는 의외로 이런 관용구들이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쳇바퀴‘라는 표현이 인생을 비관하는 용도로 쓰이면서부터 ‘반복되는 일상‘이란 것은 멋도 맛도 없는 시간의 배열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쳇바퀴 같은 삶은 정말 불행한 걸까?

인간은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동시에, 그 안정이 오면 회의감을 느낀다.

‘나는 이 쳇바퀴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다.‘

예측 불허의 내일들이 펼쳐져 있는 시간은 막상 그곳에 있을 때는 주로 암담하다. ...(중략)...불안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알 수 없는 내일 때문 아니겠는가.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매일이 특별할 수는 없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감은 섬광보다는 네잎클로버를 닮았다. 클로버 무더기가 있다면 그 안에 네잎클로버는 무조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일은 엄청난 행운같지만,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이 아프도록 찾아 헤맨 시간과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창작자들은 구구절절 말을 하지 않지만, 걷고 이야기 나누고 누워 있고 유튜브 따위를 보는 모든 순간, 머릿속 한편에 ‘해야 할 일‘의 회로가 쉼없이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느 요소가 이야깃거리의 단초가 되어 생각이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영감은 늘 축약본의 형태로 알려진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쉽게 좌절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설령 후질지언정, 기다리는 자에게 영감은 반드시 찾아온다.

"기특한 순간이 많아지면 그게 자존감이 되는 것 같아."

어렴풋이 품고 있는 생각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말해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몇 년을 주기로 단어는 유행을 탄다. 힐링, 웰빙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시대가 어렴풋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에 제목이 붙여지면, 그 단어는 한동안 수많은 문화를 지배한다. 요즘 그런 단어가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존심이 꺾이지 않으려 버티는 막대기 같은 거라면, 자존감은 꺾이고 말고부터 자유로운 유연한 무엇이다. 자존심은 지켜지고 말고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만 자존감은 철저히 내부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순간은 자존감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다.

선행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욕망이 부록처럼 딸려온다. 어릴 때 칭찬에 길들여졌을 수많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내성이고, 특별히 나쁠 것도 없는 점이기도 하다. 허나 선행이 누군가의 칭찬과 거래되는 순간 자존감 통장에는 쌓일 것이 없다. 나의 대견함을 ‘알아주는‘ 주체를 타인에게 넘겨버릇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내가 생각하는 스스로가 대견한 순간은 굉장히 작은 것들이다.

나의 존엄을 가꾸어 나가는 일은 결코 거창할 필요만은 없다. 존엄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창씨개명에 맞서고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존엄한 사람들은 일상 속 하찮은 순간들이 정갈한 이들이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 생각해서 스스로를 칭찬해주지 않았던 깨알같은 장면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요히 자신을 토닥여주는 습관을 가져보자.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건 달콤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내면을, 방치되어 있던 모습들을 다 끄집어낼 수 있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형태로의 사랑이든 마찬가지예요. 로맨스이든 아니든 사랑은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똑바로 마주볼 수 있게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순간은 사실 대단치 않은 것들일 때가 많죠. 나만의 독특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무장해제되곤 하니까요.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하는 총체적인 그 연애의 모습이 저는 항상 탱고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패턴 속에 있지만 엇박이 있고, 굉장히 기쁜 멜로디 속에 흥이 차오르다가도 극단적으로 슬퍼지고...

"탱고는 실수가 나서 발이 엉키거나 스텝이 꼬이는 것, 그것조차도 탱고다."

연애에 실패하신 모든 분들, 그것조차 다음 사랑이 시작되는 하나의 조각이라고 생각을 하시면서 ‘그래,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이런 탱고 속에 살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양쪽이 불완전한 모양으로 퍼즐 조각처럼 딱 맞춰지는 것이 연인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은 때로는 마법 같아요. 그냥 집 앞에 빵 사러 나갔다가 들어오는 중에 너무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면 제 앞의 장소가 뮤직비디오가 되어버리거든요. 별거 없는 내 하루가 그 한 곡으로 인해, 영화처럼 변하는 거예요.

향기에는 기억이 함께 담긴다

향을 통해 내 안에 감정, 기억이 생생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대요. 향기가 기억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주는 거죠.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서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더라고요.

‘내가 뭐든 될 것 같고, 만사가 뭐 이렇게하면 이렇게 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능력치의 벽을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미래를 그릴 수가 없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모양새이며 내가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가 잘났는지를 볼 수 있는 기능이 작동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아,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나서는 그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흔히 작물의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예쁘지 않은 풀을 잡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디언들의 언어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대요. 그들은 모든 식물과 동물에는 각각의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모든 것이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작물과 잡초를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살다 보면 유난히 ‘내가 잡초 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 같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그럴 때 인디언들의 생각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그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세상에 존재 이유 없이 태어난 생명은 없을 테니까요.

꼭 아픔에 아픔을 더해야만 낫는 통증이 있죠. 바로 ‘근육통‘ 입니다. 통증이 아주 심한 부위를 만지면 너무 아프기도 하지만 묘한 시원함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렇게 실컷 주무르고 나면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도 근육이 있죠. 그렇다면 내 마음의 통증도 근육통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무조건 피하기보다는 그 아픔을 즐겨보는 겁니다. 실컷 앓고 나면 조금은 시원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가끔 마음이 복잡해질 때 호흡을 해보는데,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냥 내 호흡에만 집중해도 마음속에 좀 뿌연 것들이 가라앉으면서 ‘내가 지금 왜 복잡하고 왜 두근거리고 또는 왜 불안, 초조한 것인지‘ 딱 떠오르는 경험들을 몇 번 했어요.

너무 힘들 때는 가만히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요. 바닷속에 해조류 같은 게 뒤엉켰는데 내가 거기 얽매여 있다가 그걸 발로 탁 차면서 수영해나가는 이미지를 떠올리죠. 그러면 실제로 그 심상이 뭔가 내 온몸에 영향을 미치는 듯 그 고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는 기분을 맛볼 때가 있어요.

"어떤 작품이든 시작할 땐 다 형편없죠. 매일 하는 회의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도 사실 대부분은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수정하면서 더 분명한 형태로 진화하니까요."

결국, 완벽한 결과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하늘에서 떨어진 능력이 아닌 열정과 끈기라는걸요.

처음엔 위로를 준다고 함은 자고로 더 나은 것을 이야기해야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때로는 가사가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때, 그래서 힘들어하는 가사 속의 화자가 자신들과 다름없음을 이야기할 때, 거기서 더 위로를 느끼더라고요.

상대방을 간파하는 거 같은 제일 쉬운 말이 뭐냐면 "사실 마음 많이 약하지?"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대개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곤 하죠. 이처럼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약한 모습을 한 부분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죠.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약한지 모르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가끔 잊어버리는 거 같아요.

설렘은 결국 긴장감에서 오는 거고, 긴장감이라는 건 서로 모르는 데에서 서로를 예측할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에 기인하는 거니까요.

설렘은 뒤돌아봤을 때 너무 아름답고 순수하고 촉촉한 거 같은데, 막상 진행 중일 때는 좋은 날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날들도 많아요. 왜냐하면 모든 게 불확실하고, 저 사람 마음을 모르겠고, 오늘 마음 내일 마음이 다른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다보니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어요.

사랑은 계속 변해가면서 다양한 단계의 얼굴을 보여주는 거 같더라고요.

설렘이라는 것은 지나고 보면 앞면만 생각나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 같지만, 그 뒷면은 수없이 불안한 밤들, 입맛이 떨어졌던 저녁 식사들, 이런 게 분명히 있을거예요.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거 같아요."

걱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안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우리가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들은 대부분 걱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대단히 명확한 문제의 경우에는 그걸 우리가 몸으로 해결하고 다니느라 가만히 멍하게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겨를도 없습니다. 사실 사서 하는 걱정들이 대부분이죠.

알면서도 가끔 멍하니 있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거든요. 중력이 있는 거 같아요. 걱정에는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100퍼센트 점점 침전할 수밖에 없는데 ‘아, 이거 아니지. 이거 내 생각이지‘ 이렇게 헤엄쳐서 나오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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