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드세다, 나대다‘ 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온다.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간의 성격이나 스타일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고정관념 같은 것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듯하다. ‘남자다운 건 이러한 것이고 여자다운 건 저러한 것이다‘ 같은 것 말이다. 얼마든지 남자도 여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고 여자도 남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性과 반대되는 모습들을 보면 뭔가 특이하다는 식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또는 문화적인 혹은 기타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에서 특정 성에 대한 어떤 고정된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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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한계에 부딪히다‘ 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여기선 저자가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인 나 자신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였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내 경우 문득 한 예로 떠올랐던 것 중의 하나가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걸음 수 였다. 요즘 스마트폰 어플에 보면 걸음 수를 카운트해주는 것들이 여러가지 있다. 내 경우 ‘구글 피트니스‘ 를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두 지표가 걸음 수와 이동한 거리다. (물론 이것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지표는 아니기에 생략한다.) 스마트폰에 이 어플을 설치한 후 비교적 자유로운 주말이나 공휴일같은 때 운동도 할 겸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는데, 거의 쉬지 않고 최대로 걸었던 걸음 수가 25,000보에서 30,000보 정도 되었다. 거리로는 대략 25km 내외 정도로 측정되는데 이 정도 걸으면 거의 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게, 일단 내 다리가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와 달리 움직임이 확실히 둔해진다.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마치 모래주머니를 양 다리에 차고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한계를 몸으로 경험해보면 나의 역량이 어느정도까지 인지 가늠이 되고 그에 맞게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다. 이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 참 단순해보이지만 괜히 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위의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분수에 맞게 활동하며 살 수 있는 것이지 나 자신의 한계도 모른채 무작정 의욕만 앞서서 살아간다면 머지않아 낭패를 볼 위험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내용과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왜 유명한 철학자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한계‘ 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 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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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이어 나오는 글 중에 ‘겁이 많다‘ 라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조금 놀랐지만,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읽다보니 저자의 생각에 수긍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볼 줄 아는 저자의 시각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상하다‘ 라는 말에 대한 얘기도 이어지는데 이것을 ‘특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저자의 관점을 보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어찌보면 특별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전보다 좀 더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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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어 나오는 ‘살아남다‘ 라는 글에서는 한 일화를 통해 이 말에 대해 저자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더불어, 시간이 지난 후 저자의 생각이 기존과는 달라지는 것들을 보면서 독자인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와서 읽는 내내 뭔가 흐뭇하고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저자가 젊었을 때는 업계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비참하고 억지로 뭔가를 꾸역꾸역 해나가는 느낌으로만 다가왔다고 한다. 하지만 업계에 장기간 있다보니 소위 말하는 ‘감感‘이라는 게 떨어지는 시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자 예전에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던 그 말이 이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고백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를 들어가면서 저자도 젊을 때와 같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이런저런 고민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한다.

또한 가급적이면 인성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도 덧붙이는데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는 롱런을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업할 때 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간혹 예민해질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에는 가급적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실제로 저자가 업계에서 장기간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성적으로 훌륭한 분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님이 쓰신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서도 보면 월드 클래스인 선수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얘기를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연히 실력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인성은 그 가치가 좀 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분야이든 간에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성들이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생각외로 이런 기본적인 인성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교만해서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뭐 세상이라는 게 결코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뭐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어쨌든 살아남는 것은 간혹 폼나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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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창작하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영감靈感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저자는 영감이 어디서 오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체력에서 온다는 답을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 ‘뇌‘의 활동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여자는 부드럽고 온화하지 않은 정도만 되어도, 한국에선 쉽게 ‘쎈언니‘, ‘걸크러쉬‘ 호칭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여성의 기본값이 은연중에 책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남녀가 각각 똑같은 기본값의 성질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성향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그러나 성별에 따른 ‘모범 성향‘이라는 게 없는 이상, 어떤 성향도 유년기에 ‘잘못된 점‘으로 치부되지 않을 테고 그것이 잘 자라 한 사람의 고유한 강점 또는 질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극적인 남자 또는 적극적인 여자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특별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성향의 기본값은, 나의 사회적인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나는 세상은 방구석에서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모든걸 바치는 덕후들과 무리에서 늘 튀어가며 소리쳐준 나대는 이들로 인해 변해왔다고 믿는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자아가 있다 ...(중략)... 결이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나‘임에 틀림없지만, 세포분열을 하듯 수많은 상황 속에 각기 다른 ‘역할‘로도 존재한다.

심지어 꼭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누구의 앞이냐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 힘들다.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어떤 이유로든 내게 소중한 누군가의 앞에서, 그에 맞는 나의 역할 또는 모습이란 건 분명히 있다. 가면과는 분명히 다르다. 중요한 건 내가 팀장임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팀원들은 결국 나라는 줄기에서 뻗어난 가지라는 걸 잊지 않는 거다.

A&R(Arists & Repertoire) : 아티스트 발굴, 육성, 음반제작을 하는 직무

A&R은 프로듀서의 손발 역할을 한다. 프로듀서가 앨범의 방향을 정하면, A&R은 이에 맞는 곡과 가사를 수급하고 작곡가를 매칭하기도 한다.

일이 순조로울 때는 실무자의 공이 빛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것이 A&R의 책임이 되진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프로듀서나 제작자의 몫이다.

내가 한 일의 경우 어떤 ‘결정‘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그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하는 일은 프로듀서의 역할이고, 어떤 통찰과 계산이 필요한 일이며,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질 능력과 강단은 없는 사람이란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쉬웠다. 지시한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패닉이 오고 결국 팀원들은 할 일이 없고 나만 일을 떠안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은 부분의 디테일을 잘 보는 나의 장점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될 때까지 해보는 노력 끝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해보고 또 해보다 결국 인정하게 되는 쓸쓸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의 ‘벽‘에서 뒤돌아봐야 알 수 있는 나만의 가능성이 있다. 즉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도 된다.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이 말은, 스스로는 깨닫기 힘든 부분이 잠재력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뜻도 된다. 땅 끝에 닿아본 사람만이 지도를 그려낼 수 있듯, 한계치에 닿아본 사람만이 스스로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무모한 자들은 뼈아픈 실패를 겪지 않았거나, 그 실패들이 남긴 데이터를 망각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삶에 있어서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 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가나다라마바사, 너와 나의 암호말‘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만 보면 슈퍼스타들이 대개 그렇다. 마이클 잭슨이라든지, 마돈나라든지.)

‘동작‘은 유행을 타지만, ‘표현‘은 그렇지 않기 때문

가사를 표현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무대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랑받는 작품은 결국 그런 본질에서 탄생하는가 보다.

사람은 본인 고유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특별한 나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한다. 그러고는 정작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이것은 낯선생명체를 거부하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기인한 습성이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본능을 이성으로 거를 수 있어야함에도, 자주 그러기를 실패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 특별한 사람을 성의 없는 한 마디로 정의해버린다. ‘이상하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봐야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앞으로 살면서 우리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이상하다‘는 말을 툭 하고 내뱉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 말을 ‘특별하다‘고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좀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남으면 돼. 그게 다야."

‘살아남는다‘는 말은 꾸역꾸역 버틴다는 말로 들렸다.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큼 구차하고 초라한 모습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사람 많은 배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비루하게 항해를 하는 사람이 상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묘하게도, 5년 차, 10년 차가 될 때마다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살아남았고‘, 그러기 위해 많은것들을 했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단순히 존재감 없이 그럭저럭 발을 걸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살아남아보며 깨달았다.

나를 살아남게 해준 순간들이 있다. 좋은 가사를 써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순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가사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슬럼프가 찾아올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

가사가 잘 나올 때에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앉은 자리에서 서너 개씩의 가사가 쏟아져 나오던 때에는 오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 고민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본 어느 누구도, 이런 컨디션이 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감‘이라는 것이 떨어지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감이란 게 있을 때라 쳐도 그 감이 통하는 ‘때‘가 있을 뿐, 나이가 들면 새로운 세대가 보기에 낡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감‘으로 하는 일들이다.

시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는 패션이다. 90년대 패션, 80년대 패션으로 묶여지는 스타일에는 해당 시대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패션처럼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타는 것이 바로 ‘언어‘다. 젊은 가사를 젊을 때 쓰는 것과, 젊은 가사를 쓰려고 썼을 때 나오는 언어의 질감은 확연히 다르다. (어르신들이 애써 젊은이 행세를 하며 인터넷에 글을 쓰면 모두가 알아볼 수 있지 않던가.)

돌아보면 쉬운 일이지만, 닥치면 어려웠던 모든 일들은 이 ‘인정‘이었다. 나의 한계를 느꼈을 때, 더이상 힘으로 밀어내는건 객기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되도록이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음악도 결국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너무 잘하는데 인성 이슈가 있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낙오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일꾼으로 날아다닐 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그 사람의 본성 탓이 아닐 때도 있기에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일이 잘될 땐 평소보다 몇 십 아니 몇 백 배의 사람들이 꼬이고 그중에는 내게 해로운 사람이 태반이기에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질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자신감이란 건 가지를 종종 쳐주지 않으면 오만이 되기 십상인데, 이 밸런스를 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한 번 아쉬웠어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두 번 오지 않기 시작하면 영영 기회가 오지않는 곳이 프리랜서 업계의 현실이니까. 괜찮은 인간이 되고픈 마음 한편엔 생존본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존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노력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돌이켜보면 그건 행운에 가깝다.) 작품 하나가 아쉬운 커리어일 땐 더더욱.

15년 전쯤 업계의 중심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다른 파트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또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자존감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우라를 갖고 있다.

감이라는 건 비단 창작업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유난히 수행능력이 빛나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감이 좋은 때다. 감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한 번 왔다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돌아왔을 때 그것을 펼칠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내 지난날들엔 비굴하고 비참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 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날지언정 더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영감은 체력에서 옵니다."

20대는 물론이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감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채집한 느낌들이 나의 어딘가와 만나서 탄생하는, 그러니까 결국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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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하는 삶‘ 간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는 말과 함께 그 괴리를 좁힐 순 없지만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이면에는 공포 내지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살펴봤었다. 오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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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중후반부를 보면 저자가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저자의 연보를 통해 저자의 주변 환경적인 영향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나는 저자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이나 생각 등에 국한되기 보다는 저자의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환경적인 요소가 한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뭐든지 자기가 하기나름이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환경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옛말에 무슨 ‘맹모삼천지교‘ 같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과 습관 그리고 환경까지 3박자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가장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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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보면, 저자의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한 생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된 내용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름부터 생소하게 느껴지는 신들을 비롯해 인도 불교와 붓다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무엇이고 다른 종교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미리부터 마음속의 동요를 억누르거나 ‘미친 짓‘이라는 등의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오히려 그 동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모든 성장은 그러한 상태와 결부되어 있으며 고난과 고통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망상‘이 당신을 괴롭히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그 망상이 마음속에서 분명해지도록 애써 보라. 그렇지 않으면 여느 사람처럼 당신의 내부에 있는 혼돈과 점점 더 반목하게 될 뿐이다. 당신은 그 혼돈과 친구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세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

서로 반대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칸트, 피히테, 헤겔, 바그너 ...(중략)... 괴테나 횔덜린, 니체, 그림 형제, 아이헨도르프 ...(중략)... 모차르트나 바흐, 슈베르트

인내하는 것은 어렵다. 인내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면서 그와 동시에 유일하게 배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자연과 성장, 평화, 번영, 아름다움은 모두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내는 시간과 침묵, 그리고 신뢰를 필요로 한다.

인내는, 개인의 일생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하며, 개인의 판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의 연관성도 고려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인내‘와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지혜, 천진난만함, 그리고 소박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매듭을 풀었다가 또다시 매듭을 짓고는 한다. 그런 행위가 마침내 끝이 나면 완전한 이해와 흠 없는 조화, 그리고 완결된 미소와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고 목표가 마침내 달성되면 우리는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둔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이생의 삶을 다하고 환생하기 위해 실체가 없는 곳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섯 줄의 선으로 이루어진 연필 스케치나 네 줄의 시와 같이 아무리 하찮은 예술 작품도 과감하고 맹목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단호하게 뛰어들어 호두 껍질 안에 숨어 있는 혼돈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고뇌다. 그들은 인내와 열성, 애정을 가지고 시나 그림, 소설 등의 작품을 형상화한다. 그와 더불어 세상은 매시간 더 풍부해지고 충만해지며 다양해지지만, 그래도 예술가는 자신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매일 그리고 매시간 홍수처럼 밀려오는 꿈과 생각들을 억눌러야 한다. 원하던 것의 천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멜로디로 창작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창작에 대한 강박 관념은 끔찍하다. 그것은 시도를 거듭할수록, 또 작품을 많이 쓸수록 더 심각해지고 가슴은 불행과 체념으로 가득 차게 되며 정신은 광포해지고 강렬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란 글쟁이의 평가나 시민의 박수갈채, 어느 소녀의 편지와 같은 ‘성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ㅡ그러한 오해는 우습지만 참을 만하다ㅡ 실제의 결과, 즉 마침내 예술가 앞에 놓여 있는 ‘작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토록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작품 말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완성한 작품을 사랑하는 예술가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문학 작품을 참회의 고백으로 이해한다면 ㅡ현재의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ㅡ 예술은 멀고 다양하며 꼬불꼬불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의 목표는 점점 힘이 빠져 완전히 탈진해 버릴 정도로 개성 혹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완전하고도 구석구석 낱낱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더 고차원적인 것, 이를테면 개인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예술은 평범의 차원을 뛰어넘을 것이고, 예술가는 성인聖人이 될 정도로 성숙해질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예술이 예술가에게 끼치는 영향은, 예술가 본인의 인격에 있어서만큼은 고해나 심리 분석이 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을 이루는 셈이 된다. 니체의 후기 작품이나 스트린드베리의 고백서, 플로베르의 글은 모두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종착지이자 목적지는 이제 더 이상 예술 행위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고 단념하는 것, 그리고 영혼의 평온함을 누리며 기품 있게 존재하기 위하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늘 고뇌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개인을 초월하는 자아, 즉 세상과 시간이 더 이상 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태에서 세상의 혼돈이 음악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일 것이다.

다만, 예술가에서 성인으로, 고백과 참회에서 신의 품 안에 안식하는 것으로 이르는 그 길이 진정한 길인지, 또 그 길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인간은 자기 무의식이 표현하며 드러내는 의미와 그 중요성에 스스로 매료됨으로써 심리 분석을 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그것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다.

그와 동일 선상으로 예술가는 참회의 고백을 할 때 스스로를 내던지고 자신의 진심을 말하며 쉴 새 없이 자기감정을 토해 냄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자아와 점점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문제와 고뇌, 그리고 콤플렉스에 점점 더 깊이 끌려 들어갈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예상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예술가를 성인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성인‘이라고 할 때는 정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마음이 일치하는 경건한 사람, 자신의 감각이 전해 오는 것을 모두 신의 섭리, 즉 필연적인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상반되는 두 가지를 하나로 보고 모든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의 고백이ㅡ예술가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든 상관없이ㅡ결코 순수한 고해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고해란 단순히 억누르던 감정을 터뜨리는 것이며, 해방이자 단념 그리고 폭로다. 그에 반해 예술가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변명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예술가는 고해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애정을 쏟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고백이 솔직하고 신중하며 또 완벽하고 가차 없는 것일수록 다시 온전한 예술, 온전한 작품, 온전한 자기 목적이 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백에 몰두하고 자신의 과제와 자신이 이룬 성과 전체를 자신의 고해에 옮겨놓음으로써 늘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방황하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예술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룬 성과와 자기변명을 모두 자신의 작품에 옮겨 놓고, 그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과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인의 고백을 문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금방 뚜렷해진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를 비교해보자. 한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내맡겼기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한편, 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동기를 가지고 출발점에 섰으나 그들의 종착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또한 사람은 문인이 되었다. 한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극복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흥미로운 사람에 그치고 말았다. 내 생각에 니체는 그 두사람의 중간쯤 되고,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에 아주 가깝다.

숱한 경험으로 쌓아 온 자아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단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태어나던 시각에 토성과 화성, 목성과 달이 떠 있었던 것처럼, 신앙심 깊고 경건한 부친과 개신교의 전통인 세례식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Vedanta(베단타): 인도 6파의 하나로 그 시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철학자 바다라야나이다.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견지한다.

Upanisad(우파니샤드): 인도 브라만교의 성전인《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로서 기원전 1000~600년경에 활약한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100가지 정도가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이 성전은 사람, 신, 우주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며 그 일부인 범아일여 梵我一如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Visnu(비슈누): 힌두교의 세 주신主神의 하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으로 후에 크리슈나로 화신化神한다.

Indra(인드라):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비와 천둥의 신. 하늘의 제왕으로 몸은 모두 갈색이고, 팔은 네 개이며, 두 개의 창을 들고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불교에서는 제석천또는 십이천의 하나로 동방의 수호신이다.

Brahma(브라흐마): 인도 철학에서 창조를 주재하는 신이자 우주의 최고 원리로 ‘범梵‘이라고 번역하여 부른다.

Krsna(크리슈나):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영웅신으로 악한 왕을 죽이고 수많은 악귀와 용왕을 퇴치했으며 농업과 목축을 관장했다. 질서의 신 비슈누의 화신化神이라고 전해진다.

개혁자들로 이루어진 청교도 신앙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을 법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자기희생은 그 소수의 사람들조차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욕구, 혹은 희망 사항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것은 내게는 아주 힘든 일이며, 혹여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언제나 그 희생은 불완전한 모습에 그칠 뿐이다.

개혁적인 생채가 짙은 종교는 그렇게 좋지 못한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 열등감을 가르치고 있다.

‘나의 행동과 삶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냥 쓸쓸하게 사라져 가고 있구나.‘

"정말 슬픈 일이군요. 살다 보면 그렇게 슬픈 일이 많지요.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슬픔을 견디려고 애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면 포도주를 한 병 마셔 보세요.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방법도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Josef Englert(엥글레르트)(1874~1957): 헤세의 친구로 직업은 엔지니어. 헤세의 작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klingsors letzter Sommer》에서 ‘마술사 유프‘로 등장한다.

나는 ‘지도자‘로서의 공명심은 전혀 없지만, 예술가로서의 명예욕이나 자만심에 관한 부분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열반에 대해 논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열반이 소멸인지 아니면 신과의 합일인지, 또 부정적인 것 혹은 긍정적인 것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단순히 안식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그것을 거부하였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열반은 개개인이 완전한 전체로 회귀하는 것이며 개체화의 원리 뒤로 물러나는 구원의 단계, 즉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개개의 영혼이 만물의 영혼인 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이다.

상캬라 철학은 처음과 끝이 없는 두 가지 존재, 즉 물질과 정신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몸속에 있으며 우리가 정신 그 자체로 오인하기 쉬운 가장 섬세한 기관(신경계를 말한다)이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변화는 오로지 물질에서만 일어나고, 모든 과정은 물질의 경우에만 진행되는 반면, 정신은 늘 변함이 없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Sankara(상캬라) (700~750): 인도의 철학자로 불이일원론파不二一元論派의 시조이며 《브라흐마수트라 주해》 를 남겼다.

나는 ‘구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다시 말해서,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정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또 내가 그 체내 기관을 나의 진정한 자아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슬픔의 경지를 초월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면 나에게 환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를 떠남과 더불어 무의식 상태가 시작되어 내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나와 물질 사이에 (뿐만 아니라 나와 환생가능성 사이에) 접촉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을 정교하게 분석하며 사색하는 방법은, 가끔씩 명상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희한하게도 요즈음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Sansara (윤회: 고통을 모두 짊어진 채 영원히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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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거울 때 저자가 하는 방법을 따라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무작정 걷는다거나 혹은 낯선 장소로 무작정 떠나보면서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는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만사 다 제치고 잠을 청해보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면 좋지 않았던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다시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 살면서 각자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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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가 삶에서 고귀한 가치를 느끼기 위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어 긴가민가하기도 했었지만 두번. 세번 곱씹어보니 굉장히 심오한 의미가 있는 말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뭐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보다는 어렵고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 더욱더 귀하고 가치있는 것인 경우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위에서 저자가 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음이 무거울 때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경건하게 행동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고, 산책을 나가는 거다.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것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채 어정쩡한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그런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겨서 고통을 받는 것이 다음에 찾아오는 축복의 순간을 더 큰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위기는 다시 극복할 것이고, 더 자주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나의 내면적 삶의 모습일 뿐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

힘든 시기에는 자연으로 나가서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우리 작가들은 여러 방면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고통을 경험해야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표현이 격앙되거나 감성적이거나 고통스럽거나 우습거나 혹은 불평불만처럼 보일 때가 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혼자서 외롭게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도와준다는 의미를 지니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연대감을 준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현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대상은 한 가지뿐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 안전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훌쩍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렇게 큰 믿음을 경험하고 운명을 철저하게 믿은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다시 태어나고, 또 날마다 죽는다. 모든 생명은 신이 내뱉는 호흡이며 모든 죽음은 신이 들이마시는 숨결이다.

몸이 무너지는 것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죽고 쉽게 태어날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힘들게 죽으며 마지못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목표는 두려움을 낳는다. 목표 자체가 착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 우주에 매달려 있는 한 축복 속에 살아 숨 쉬며 축복 속에 죽어 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다른 휴식이 있다. 그것은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거부하지 말라! 기꺼이 죽어라! 기꺼이 살아라!

시간은 참으로 묘하다. 그것은 자기 내면으로 고통받으며, 세상을 더 힘들고 복잡하게 만드는 섬세한 발명품이자 정련된 도구다.

인간이 간절히 원하고 소원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 고약한 발명인 시간에 의해서만 분리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이 거칠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집어던져야할 목발이고, 부목이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면 오늘과 현재를 잃게 되고, 그것과 관련된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넉넉한 시간과 관심은 고스란히 오늘에 허락하라!

나는 자살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비겁함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이 삶을 살아가고, 삶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는 출구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수사적 표현으로 고귀한 척하는 수치스러움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고통 그 자체만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곧 우리의 삶이 되며, 기쁨이라는 감정과 삶에서 느끼는 고귀한 가치는 오직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라.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최상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깨닫거나 혼돈을 뚫으려는 의지가 있는 독자들은 내 책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이상과 도덕 뒤에 숨어 있는 혼돈을 볼 수 있다.

혼돈을 새롭게 정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늘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으로 겪는 경험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암울한 시간에도 사랑하는 벗이여, 나를 허락해 다오. 기분이 상쾌하든 우울하든 난 삶을 결코 탓하고 싶지 않았다.

햇빛과 악천후는 둘 다 하늘의 얼굴. 달콤하든 씁쓸하든, 운명은 내게 훌륭한 영양이 되리니. 영혼은 얽혀있는 길을 간다. 그것의 언어를 배우라! 오늘 그대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내일은 축복이 되리라.

신을 믿지 않는 자들만이 죽음을 택한다.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처절한 괴로움과 유쾌한 즐거움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아버지의 부름 같은 것을 받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그런 곳. 우리는 그 마지막 계단에서 비로소 쉼을 느낄 수 있다.

내 삶이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들은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자유와 영혼과 심오한 감정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몰이해와 아픔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의 삶은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정상적인 것, 바람직한 것, 건강한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타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목표는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파멸시키는 것이고, 늘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절망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시키려는 진지한 시도가 만들어 낸 결과다.

절망은 삶을 덕망과 정의와 이성으로 살아가고, 책임을 완수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로 생겨난다.

절망의 이편에는 아이들이 살고 있고, 저편에는 깨어난 자들이 살고 있다.

나는 절망이 다시 은총으로 바뀌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의 껍질을 벗김으로써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체험하였다.

문화와 정신, 그리고 그 요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절망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체험이나 상황을 지나치게 객관화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심리 분석가가 꿈을 해석할 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심리 분석가는 꿈의 ‘명백한‘ 내용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들, 또 질병과 건강, 고통과 기쁨처럼 딱딱해 보이는 개념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진다.

그와 같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 또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떤 절망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건강‘해질 수 없으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물론 내게도 고통이 없는 날이란 드물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또다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

다시 밝은 빛을 보고자 한다면 슬픔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한다!"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가야만 해, 가야만 해, 가야만 해!"

나는 진심으로 의욕을 갖고 더 씩씩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호수 크기만 하던 하늘이 갈수록 더 커졌고 길은 오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슬픔이 절정에 달하면 상황이 호전된다.

정신착란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삶에 대한 것이거나 우리의 성장과 본능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 하고,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 그 괴리를 좁힐 수는 없지만, 그 사이를 뛰어넘는 것은 수백 번도 가능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용기가 필요하며 뛰어넘기 전에는 공포가 우리를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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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브라질 캄포 베르텐데스 카투아이 허니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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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포장지를 뜯자마자 드립백 전체적으로 풍기는 진하고 그득한 향이 좋았습니다. 마실 때는 목 뒤로 넘길 때 포장지 맨 밑에 써있는 밤 꿀 맛이 은은하면서 달달하게 느껴졌고 포장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써있는 오렌지와 건포도는 직접적인 맛보다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향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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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독서를 하는 목적이 제각기 다르겠지만, 저자의 경우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생각을 하고 발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저자는 자신이 읽는 책 속에서 질문을 찾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좋은 건 일단 벤치마킹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책을 읽고, 책 속에서 질문을 찾아야 한다. 그 훈련이 끝나면 스스로 질문을 만들 수 있다. 그 질문으로 나는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른다. - P37

당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주라. 그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라. 그 순간 당신은 소크라테스가 된다. 위대한 철학자라 불리는 소크라테스가 한 것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밖에 없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만큼이나 위대한 것이다. - P37

"인생은 모든 게 잠깐인 것을, 그렇게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을,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물처럼 흐르며 살아도 될 것을, 말 한마디 참고 물 한 모금 건네며 잘난 것만 재지 말고 못난 것도 쓰다듬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듯 서로 불쌍히 여기며 원망 말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걸 그랬다." - P39

우리는 돈이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인생을 바쳐 돈을 번다. 독을 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짜리인가를 알아야 한다. 딱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된다. 그리고 딱 필요한 만큼을 알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 P39

책을 읽고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내게 필요한 돈만 벌면서 나머지 시간은 내가 태어난 이유, 즉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집중해야 한다. - P39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그릇이 있다. 그릇의 크기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릇에 딱 맞는 돈만큼 가질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책을 읽는 건 바로 내 그릇의 크기를 알기 위해서다. - P40

책을 읽고 사색을 통해 돈을 정복할 수 있다. 심지어 돈을 거절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을 거절할 때 느끼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 P40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그리고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 P40

무조건 돈을 우선순위에 두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돈에 끌려가는 것이다.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어느 순간에는 돈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때 진짜 세상이 보인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알게 된다. - P40

당신은 얼마가 필요한가? 얼마를 벌 생각인가? 돈이 왜 필요한가? 어디에 쓸 것인가? 무조건 많이 벌 생각이었다면 지금 당장 금액을 정하라. 당신이 필요한 돈을 계산해보라. 모르겠다고 포기하지 마라. 지금 계산된 돈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계속 바뀐다. 계산해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 P40

돈 때문에 주눅 들지 마라. 애써 많이 벌려고 하지 마라. 돈보다는 하루하루 설레고 신나게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그런 삶을 살아라. 그런 일을 찾아라. 그런 일은 반드시 있다. - P41

놀고 소비하며 즐기는 것은 단편적인 행복이다. 인간은 생산적인 삶을 살 때 행복하다. 특히 자신의 생산 활동으로 타인을 도와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런 일을 찾아라. - P41

당신이 생산할 수 있는 것 중에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있다. 모르겠다면 책을 읽어라. 책이 찾아줄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줄 것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생산을 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 P41

"딱 한 문장으로 만들어보세요." - P42

질문을 길게 한다는 건 내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 모르기 때문에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 P43

자신이 파는 상품이나 자신이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아직 스스로도 핵심을 모른다는 의미다. 즉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 P43

추상화의 위대함도 사물의 본질에 집중해 단순화한 것에 있다. - P43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 입체파 화가 피카소는 모두 사물의 본질에 집중한 이들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다가 차츰 선을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해서 본질만 남겼을 것이다. - P43

피카소는 사물을 분해한 후 재창조했고, 몬드리안은 단순화하여 수직과 수평의 선만 남겼다. 본질만 남긴 것이다. - P43

딱 한 줄로 만들어야 해결하기도 쉽다.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해결 방법을 찾기도 쉬운 것이다. - P43

시인들은 한 페이지, 한 단락에 하고 싶은 말을 담는다. 그야말로 본질을 보는 사람들이다. 시인들도 단순화했다가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 P43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압축의 힘을 훈련하기 위해서다. 많은 책이 비유와 압축으로 쓰였다. 그 이유는 보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고통과 상황에 맞게 스스로 해석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 P44

숨은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면 독서가 즐거워진다. 즐거움과 더불어 엄청난 능력도 얻게 된다. 바로 시간을 압축하는 법을 알게 된다. - P44

시간을 압축하고 시간을 만들어 쓰는 능력 - P44

내 문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고 계속 쳐다보자. 그러면 고민이 해결된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백퍼센트 성공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보자. - P44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타인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여 타인의 시선 속에 머물러왔다. 당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선생님, 사랑하는 사람, 자녀, 종교,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 P46

세월이 흐른 후 당신은 스스로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보지만,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당신 자신을 삶의 우선순위 최상단에 올려놓아 보는 건 어떨까? - P46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실재하는 당신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점점 더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 P46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모든 것이 흐릿해질 때 단 하나 반대로 갈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눈빛이다. - P47

나이를 먹었다는 건 수많은 경험을 했다는 뜻이다. 이런 경험은 눈빛에 쌓인다. 그래서 눈빛이 깊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한 사람만이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어린아이처럼 맑아진다. 육신은 늙었지만 정신은 어려진 것이다. - P47

흐릿한 눈빛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냥 무섭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 그래서 더 흐릿해진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눈이 맑아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일, 향기로운 일이 된다. - P47

끌려다니며 사는 사람의 눈빛은 흐리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눈빛은 생기가 없다. 나이가 들면 그나마 남아 있던 약간의 날카로움마저 사라지고 흐릿한 눈빛을 가지게 된다. 그런 눈빛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안 된다.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 P47

진짜 죽음 앞에 가면 한순간 눈빛이 빛난다. 깨달음의 순간이다. 이때 ‘아,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비참한 죽음인가! 그런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면 내 삶을 내가 지배해야 한다. - P48

나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고, 나를 사랑하라. 책을 읽고 생각하라. - P48

세계 3대 종교가 모두 동양에서 탄생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서아시아), 불교는 인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겨났다. 이처럼 우리 동양인들은 훨씬 크고 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민족이다. - P50

우리는 충분히 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을 통해 서양의 훌륭한 철학을 배우고, 생각을 통해 그 철학을 뛰어넘어야 한다. 뛰어넘는다는 것은 우리만의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만든다는 뜻이다. - P51

우리 모두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면 어느 날 저절로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을 만날 것이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생각의 크기가 이미 선진국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 역시 저절로 발전한다. 웹 3.0시대는 상상력의 시대다. - P52

글로 말을 이겨 나를 세뇌시켰던 철학을 벗어던지고 생각에 날개를 달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상상력을 만들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쪼그라든 가슴을 펴라. 우리는 생각이 큰 민족이다. - P52

지금이 기회다. 생각으로 과학 위에 군림할 수 있다. AI는 서양이 만들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정신은 동양에서 만들 수 있다. 당신이 해야 한다. 나 하나만을 위한 작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남을 위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한 위대한 생각을 하게 해달라고 책에게 부탁하며, 읽고 생각하라. 서양에서 동양으로 기회가 넘어오고 있다. - P52

믿고 읽어라. 그리고 서두르지 마라. 위대한 생각은 책 몇 권 읽는다고 후다닥 나타나는 게 아니다. 위대한 생각은 느리지만 크고 확실하게 나타난다. 한 번 발현되면(발현‘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 P53

유럽이 동양을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책 읽는 사람이 동양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유럽도 책을 읽지 않는다. 그래서 기회다. 생각해보라. 책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서양을 이기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 P53

서양을 이겨서 세계 1위의 강대국이 되겠다는 작은 생각이 아니다. 이 지구는 동양이 머리가 되고 서양이 손발이 될 때 가장 이상적으로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당신의 머리를 원한다. - P53

불필요한 고통이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며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 남들과 비교하여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고 괴로워하는 것, 지금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등이다. 이런 고통들은 책을 읽으면 절대 겪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 P54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하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일주일에 세 번만 도서관에 가서 30분씩만 앉아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올리는 영상을 보고 5분만 시간을 내서 긍정 확언을 따라 외쳐라. 이렇게만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싹 사라진다. - P55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비하하는 고통 역시 독서로 치유된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진정한 부는 역량 있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가치"라고 했다. - P55

책을 읽으면 진정한 부가 내 속에 쌓이니 남과 비교할 이유가 없어진다. 내 안에 진짜 부가 쌓여 있는 사람은 명품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주눅 들지 않는다. 늘 자신감이 충만하다. 자신을 어디에 데려다 놔도 맨손으로 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고개를 떨구지 않는다. 항상 정면을 보고 당당하게 걷는다. - P55

지금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럽다면 계속 책을 읽으면 된다. 읽다 보면 어쩔수없이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는가? 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언제 가장 행복한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는가?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뇌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절로 움직이게 된다. - P56

물론 이런 질문의 답이 쉽게 찾아지지는 않는다. 몇 년,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 P56

인간은 성장하는 동안에는 행복하다. 성장이 멈추는 순간 격정이 시작된다. 매일 성장하는 사람은 결과가 당연히 좋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매일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기 때문에 언젠가 내 삶이 정확한 나만의 궤도에 오를 거라는 것을 안다. - P56

우린 쓸데없는 걱정과 고통을 너무 많이 겪는다. 책을 읽음으로써 이 모든 걸 몰아내자. 원리는 간단하다. 독서를 통해 걱정과 고통을 없애면 그 자리에 그만큼의 열정이 생긴다. 이것이 성장의 선순환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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