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드세다, 나대다‘ 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온다.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간의 성격이나 스타일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고정관념 같은 것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듯하다. ‘남자다운 건 이러한 것이고 여자다운 건 저러한 것이다‘ 같은 것 말이다. 얼마든지 남자도 여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고 여자도 남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性과 반대되는 모습들을 보면 뭔가 특이하다는 식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또는 문화적인 혹은 기타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에서 특정 성에 대한 어떤 고정된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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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한계에 부딪히다‘ 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여기선 저자가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인 나 자신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였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내 경우 문득 한 예로 떠올랐던 것 중의 하나가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걸음 수 였다. 요즘 스마트폰 어플에 보면 걸음 수를 카운트해주는 것들이 여러가지 있다. 내 경우 ‘구글 피트니스‘ 를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두 지표가 걸음 수와 이동한 거리다. (물론 이것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지표는 아니기에 생략한다.) 스마트폰에 이 어플을 설치한 후 비교적 자유로운 주말이나 공휴일같은 때 운동도 할 겸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는데, 거의 쉬지 않고 최대로 걸었던 걸음 수가 25,000보에서 30,000보 정도 되었다. 거리로는 대략 25km 내외 정도로 측정되는데 이 정도 걸으면 거의 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게, 일단 내 다리가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와 달리 움직임이 확실히 둔해진다.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마치 모래주머니를 양 다리에 차고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한계를 몸으로 경험해보면 나의 역량이 어느정도까지 인지 가늠이 되고 그에 맞게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다. 이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 참 단순해보이지만 괜히 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위의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분수에 맞게 활동하며 살 수 있는 것이지 나 자신의 한계도 모른채 무작정 의욕만 앞서서 살아간다면 머지않아 낭패를 볼 위험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내용과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왜 유명한 철학자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한계‘ 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 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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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이어 나오는 글 중에 ‘겁이 많다‘ 라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조금 놀랐지만,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읽다보니 저자의 생각에 수긍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볼 줄 아는 저자의 시각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상하다‘ 라는 말에 대한 얘기도 이어지는데 이것을 ‘특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저자의 관점을 보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어찌보면 특별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전보다 좀 더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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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어 나오는 ‘살아남다‘ 라는 글에서는 한 일화를 통해 이 말에 대해 저자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더불어, 시간이 지난 후 저자의 생각이 기존과는 달라지는 것들을 보면서 독자인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와서 읽는 내내 뭔가 흐뭇하고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저자가 젊었을 때는 업계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비참하고 억지로 뭔가를 꾸역꾸역 해나가는 느낌으로만 다가왔다고 한다. 하지만 업계에 장기간 있다보니 소위 말하는 ‘감感‘이라는 게 떨어지는 시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자 예전에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던 그 말이 이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고백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를 들어가면서 저자도 젊을 때와 같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이런저런 고민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한다.

또한 가급적이면 인성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도 덧붙이는데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는 롱런을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업할 때 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간혹 예민해질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에는 가급적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실제로 저자가 업계에서 장기간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성적으로 훌륭한 분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님이 쓰신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서도 보면 월드 클래스인 선수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얘기를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연히 실력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인성은 그 가치가 좀 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분야이든 간에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성들이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생각외로 이런 기본적인 인성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교만해서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뭐 세상이라는 게 결코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뭐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어쨌든 살아남는 것은 간혹 폼나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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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창작하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영감靈感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저자는 영감이 어디서 오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체력에서 온다는 답을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 ‘뇌‘의 활동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여자는 부드럽고 온화하지 않은 정도만 되어도, 한국에선 쉽게 ‘쎈언니‘, ‘걸크러쉬‘ 호칭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여성의 기본값이 은연중에 책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남녀가 각각 똑같은 기본값의 성질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성향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그러나 성별에 따른 ‘모범 성향‘이라는 게 없는 이상, 어떤 성향도 유년기에 ‘잘못된 점‘으로 치부되지 않을 테고 그것이 잘 자라 한 사람의 고유한 강점 또는 질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극적인 남자 또는 적극적인 여자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특별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성향의 기본값은, 나의 사회적인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나는 세상은 방구석에서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모든걸 바치는 덕후들과 무리에서 늘 튀어가며 소리쳐준 나대는 이들로 인해 변해왔다고 믿는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자아가 있다 ...(중략)... 결이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나‘임에 틀림없지만, 세포분열을 하듯 수많은 상황 속에 각기 다른 ‘역할‘로도 존재한다.

심지어 꼭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누구의 앞이냐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 힘들다.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어떤 이유로든 내게 소중한 누군가의 앞에서, 그에 맞는 나의 역할 또는 모습이란 건 분명히 있다. 가면과는 분명히 다르다. 중요한 건 내가 팀장임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팀원들은 결국 나라는 줄기에서 뻗어난 가지라는 걸 잊지 않는 거다.

A&R(Arists & Repertoire) : 아티스트 발굴, 육성, 음반제작을 하는 직무

A&R은 프로듀서의 손발 역할을 한다. 프로듀서가 앨범의 방향을 정하면, A&R은 이에 맞는 곡과 가사를 수급하고 작곡가를 매칭하기도 한다.

일이 순조로울 때는 실무자의 공이 빛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것이 A&R의 책임이 되진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프로듀서나 제작자의 몫이다.

내가 한 일의 경우 어떤 ‘결정‘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그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하는 일은 프로듀서의 역할이고, 어떤 통찰과 계산이 필요한 일이며,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질 능력과 강단은 없는 사람이란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쉬웠다. 지시한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패닉이 오고 결국 팀원들은 할 일이 없고 나만 일을 떠안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은 부분의 디테일을 잘 보는 나의 장점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될 때까지 해보는 노력 끝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해보고 또 해보다 결국 인정하게 되는 쓸쓸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의 ‘벽‘에서 뒤돌아봐야 알 수 있는 나만의 가능성이 있다. 즉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도 된다.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이 말은, 스스로는 깨닫기 힘든 부분이 잠재력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뜻도 된다. 땅 끝에 닿아본 사람만이 지도를 그려낼 수 있듯, 한계치에 닿아본 사람만이 스스로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무모한 자들은 뼈아픈 실패를 겪지 않았거나, 그 실패들이 남긴 데이터를 망각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삶에 있어서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 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가나다라마바사, 너와 나의 암호말‘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만 보면 슈퍼스타들이 대개 그렇다. 마이클 잭슨이라든지, 마돈나라든지.)

‘동작‘은 유행을 타지만, ‘표현‘은 그렇지 않기 때문

가사를 표현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무대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랑받는 작품은 결국 그런 본질에서 탄생하는가 보다.

사람은 본인 고유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특별한 나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한다. 그러고는 정작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이것은 낯선생명체를 거부하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기인한 습성이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본능을 이성으로 거를 수 있어야함에도, 자주 그러기를 실패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 특별한 사람을 성의 없는 한 마디로 정의해버린다. ‘이상하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봐야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앞으로 살면서 우리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이상하다‘는 말을 툭 하고 내뱉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 말을 ‘특별하다‘고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좀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남으면 돼. 그게 다야."

‘살아남는다‘는 말은 꾸역꾸역 버틴다는 말로 들렸다.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큼 구차하고 초라한 모습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사람 많은 배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비루하게 항해를 하는 사람이 상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묘하게도, 5년 차, 10년 차가 될 때마다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살아남았고‘, 그러기 위해 많은것들을 했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단순히 존재감 없이 그럭저럭 발을 걸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살아남아보며 깨달았다.

나를 살아남게 해준 순간들이 있다. 좋은 가사를 써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순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가사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슬럼프가 찾아올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

가사가 잘 나올 때에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앉은 자리에서 서너 개씩의 가사가 쏟아져 나오던 때에는 오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 고민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본 어느 누구도, 이런 컨디션이 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감‘이라는 것이 떨어지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감이란 게 있을 때라 쳐도 그 감이 통하는 ‘때‘가 있을 뿐, 나이가 들면 새로운 세대가 보기에 낡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감‘으로 하는 일들이다.

시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는 패션이다. 90년대 패션, 80년대 패션으로 묶여지는 스타일에는 해당 시대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패션처럼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타는 것이 바로 ‘언어‘다. 젊은 가사를 젊을 때 쓰는 것과, 젊은 가사를 쓰려고 썼을 때 나오는 언어의 질감은 확연히 다르다. (어르신들이 애써 젊은이 행세를 하며 인터넷에 글을 쓰면 모두가 알아볼 수 있지 않던가.)

돌아보면 쉬운 일이지만, 닥치면 어려웠던 모든 일들은 이 ‘인정‘이었다. 나의 한계를 느꼈을 때, 더이상 힘으로 밀어내는건 객기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되도록이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음악도 결국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너무 잘하는데 인성 이슈가 있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낙오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일꾼으로 날아다닐 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그 사람의 본성 탓이 아닐 때도 있기에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일이 잘될 땐 평소보다 몇 십 아니 몇 백 배의 사람들이 꼬이고 그중에는 내게 해로운 사람이 태반이기에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질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자신감이란 건 가지를 종종 쳐주지 않으면 오만이 되기 십상인데, 이 밸런스를 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한 번 아쉬웠어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두 번 오지 않기 시작하면 영영 기회가 오지않는 곳이 프리랜서 업계의 현실이니까. 괜찮은 인간이 되고픈 마음 한편엔 생존본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존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노력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돌이켜보면 그건 행운에 가깝다.) 작품 하나가 아쉬운 커리어일 땐 더더욱.

15년 전쯤 업계의 중심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다른 파트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또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자존감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우라를 갖고 있다.

감이라는 건 비단 창작업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유난히 수행능력이 빛나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감이 좋은 때다. 감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한 번 왔다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돌아왔을 때 그것을 펼칠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내 지난날들엔 비굴하고 비참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 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날지언정 더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영감은 체력에서 옵니다."

20대는 물론이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감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채집한 느낌들이 나의 어딘가와 만나서 탄생하는, 그러니까 결국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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