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울 때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경건하게 행동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고, 산책을 나가는 거다.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것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채 어정쩡한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그런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겨서 고통을 받는 것이 다음에 찾아오는 축복의 순간을 더 큰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위기는 다시 극복할 것이고, 더 자주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나의 내면적 삶의 모습일 뿐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
힘든 시기에는 자연으로 나가서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우리 작가들은 여러 방면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고통을 경험해야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표현이 격앙되거나 감성적이거나 고통스럽거나 우습거나 혹은 불평불만처럼 보일 때가 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혼자서 외롭게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도와준다는 의미를 지니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연대감을 준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현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대상은 한 가지뿐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 안전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훌쩍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렇게 큰 믿음을 경험하고 운명을 철저하게 믿은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다시 태어나고, 또 날마다 죽는다. 모든 생명은 신이 내뱉는 호흡이며 모든 죽음은 신이 들이마시는 숨결이다.
몸이 무너지는 것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죽고 쉽게 태어날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힘들게 죽으며 마지못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목표는 두려움을 낳는다. 목표 자체가 착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 우주에 매달려 있는 한 축복 속에 살아 숨 쉬며 축복 속에 죽어 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다른 휴식이 있다. 그것은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거부하지 말라! 기꺼이 죽어라! 기꺼이 살아라!
시간은 참으로 묘하다. 그것은 자기 내면으로 고통받으며, 세상을 더 힘들고 복잡하게 만드는 섬세한 발명품이자 정련된 도구다.
인간이 간절히 원하고 소원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 고약한 발명인 시간에 의해서만 분리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이 거칠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집어던져야할 목발이고, 부목이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면 오늘과 현재를 잃게 되고, 그것과 관련된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넉넉한 시간과 관심은 고스란히 오늘에 허락하라!
나는 자살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비겁함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이 삶을 살아가고, 삶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는 출구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고통 그 자체만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곧 우리의 삶이 되며, 기쁨이라는 감정과 삶에서 느끼는 고귀한 가치는 오직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라.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최상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깨닫거나 혼돈을 뚫으려는 의지가 있는 독자들은 내 책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이상과 도덕 뒤에 숨어 있는 혼돈을 볼 수 있다.
혼돈을 새롭게 정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늘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으로 겪는 경험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암울한 시간에도 사랑하는 벗이여, 나를 허락해 다오. 기분이 상쾌하든 우울하든 난 삶을 결코 탓하고 싶지 않았다.
햇빛과 악천후는 둘 다 하늘의 얼굴. 달콤하든 씁쓸하든, 운명은 내게 훌륭한 영양이 되리니. 영혼은 얽혀있는 길을 간다. 그것의 언어를 배우라! 오늘 그대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내일은 축복이 되리라.
신을 믿지 않는 자들만이 죽음을 택한다.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처절한 괴로움과 유쾌한 즐거움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아버지의 부름 같은 것을 받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그런 곳. 우리는 그 마지막 계단에서 비로소 쉼을 느낄 수 있다.
내 삶이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들은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자유와 영혼과 심오한 감정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몰이해와 아픔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의 삶은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정상적인 것, 바람직한 것, 건강한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타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목표는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파멸시키는 것이고, 늘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절망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시키려는 진지한 시도가 만들어 낸 결과다.
절망은 삶을 덕망과 정의와 이성으로 살아가고, 책임을 완수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로 생겨난다.
절망의 이편에는 아이들이 살고 있고, 저편에는 깨어난 자들이 살고 있다.
나는 절망이 다시 은총으로 바뀌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의 껍질을 벗김으로써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체험하였다.
문화와 정신, 그리고 그 요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절망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체험이나 상황을 지나치게 객관화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심리 분석가가 꿈을 해석할 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심리 분석가는 꿈의 ‘명백한‘ 내용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들, 또 질병과 건강, 고통과 기쁨처럼 딱딱해 보이는 개념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진다.
그와 같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 또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떤 절망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건강‘해질 수 없으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물론 내게도 고통이 없는 날이란 드물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또다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
다시 밝은 빛을 보고자 한다면 슬픔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의욕을 갖고 더 씩씩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호수 크기만 하던 하늘이 갈수록 더 커졌고 길은 오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정신착란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삶에 대한 것이거나 우리의 성장과 본능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 하고,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 그 괴리를 좁힐 수는 없지만, 그 사이를 뛰어넘는 것은 수백 번도 가능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용기가 필요하며 뛰어넘기 전에는 공포가 우리를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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