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부에 나오는 이 책의 화자는 아내가 있는 어떤 남편이다. 지금 초반부만 몇 페이지 읽어봤는데, 뭔가 아내라는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뭐랄까, 다소 무미건조하고 어두침침하고 우울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결혼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새벽 아내는 갑자기 냉장고에 있던 반찬통을 다 뒤집고 각종 고기나 생선 등이 들어간 반찬들을 바닥에 흩뿌려놓는다. 이를 발견한 남편이 놀라서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아내는 ˝꿈을 꿨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데, 여기 자세한 꿈 내용까지 다 적을 순 없지만 읽어보면 정말 괴상한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분위기가 참 묘하게 흘러간다.

아무튼 이 괴상한(?) 꿈을 꾼 이후로 아내는 남편에게 고기반찬이 일절 없는 채식만을 차려주게 된다. 소설 초반부에 이 책의 제목이 왜 ‘채식주의자‘ 인지를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이후의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뭐 굳이 예상을 해보자면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나오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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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예상됐던 에피소드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채식을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특별히 후반부로 갈수록 섬뜩해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나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의 후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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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다보니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영혜의 언니가 화자가 되어 얘기하는 ‘나무 불꽃‘ 이라는 챕터를 읽다보면 정신병원에 있는 영혜를 만나러가는 영혜의 언니를 볼 수 있는데, 그녀가 영혜에 관해 하는 얘기 중에 어릴적 아버지로부터 손찌검을 유독 많이 당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온순하지만 고지식한 성격탓에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던 영혜는 다른 눈찌빠른 자식들과는 달리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성장해왔던 것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어릴 때 형성되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그 아이의 성장에 정말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 속에서는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영혜의 이상행동을 그나마 이해하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이 세상을 살다보면 단순히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언어 폭력 또는 기타 이유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반복적으로 쌓이고 쌓여 트라우마가 되는 경우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다양한 인간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다보니 서로 간에 의견이 대립되거나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생기면 그런 관계들 속에서 안좋은 부산물들이 생겨날 수 있는데, 참으로 명확하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서로간에 존중이 있어야 이러한 문제가 안 생길거라고 생각하지만, 설령 내가 상대방을 존중했음에도 그 상대방이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계속 무례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것은 지속하기 힘든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기에 이 경우 상대방을 먼저 존중한 쪽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살면서 상처 하나도 안받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식으로 되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서로 안 받아도 될 상처는 굳이 안 받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것 아니겠는가 싶다. 그 상처의 크기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안좋은 영향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는데 정말 좋은 사람 만나는 것도 복이라면 복인 듯하다.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P21

"뭐야. 그래서, 그 꿈나부랭이 때문에 고기를 다 버렸다는 거야? 도대체 얼마어치를?" - P21

"냉장고에 그것들을 놔둘 수 없어. 참을 수가 없어." - P22

봄이 올 때까지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풀만 먹게 되긴 했지만 나는 더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변하면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25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여위는 건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상 그녀는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 P25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 P28

나는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떤 분노와 설득도 그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손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 P39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거지. - P51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 P72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거야. - P72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 P72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P72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선 안 되었다. - P73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 P82

그가 꿈꾸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끄집어내줄 수 있겠는가. - P82

그는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왔다. 어떻게 이 이미지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것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작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전시와 영화, 공연 따위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이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 P87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 P88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 P98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 P99

부끄럽거나 당황해서가 아니라, 으레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하니까, 라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 P106

그제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 P110

방법은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 P112

드러내지 않을 뿐, M에게도 욕망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번민이 있을 것이다. - P116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 P122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도 없었으며, 당연할 법한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P125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 P126

그는 자신이 어떤 경계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 P139

나는 어두웠다,라고 그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는 어두웠다. 어두운 곳에 그가 있었다. 그가 이즈음 경험하는 색채들이 부재했던 그 흑백의 세계는 아름다웠고 고즈넉했으나, 그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잠잠한 평화가 주는 행복을 그는 영원히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실감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격렬한 세계가 주는 자극과 고통을 견디기에만도 그의 에너지는 벅찼다. - P147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야. 그것뿐이에요." - P158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것이 추억 때문인지, 우정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곧 그가 넘으려는 경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 P165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 P172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 P172

"이제 무섭지 않아요. ・・・・・・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 P172

폭우에 잠긴 숲은 포효를 참는 거대한 짐승 같다. - P182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 P186

.....이제 괜찮아.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는데, 그것이 아이를 달래려는 것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 P187

그냥 저런 걸 넣게 돼. 넣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 - P191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 P193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런 순간에,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 P198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 P203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 P208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음 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티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 P210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 P216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 P224

동생의 굳은 어깨를 흔들고, 억지로 입을 벌리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고막이 찢어지게 영혜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 싶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죽고 싶니. 정말 죽고 싶어? 자신의 안에서 뜨거운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녀는 망연히 들여다본다. - P226

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에 먹구선 토했다구...... 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 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어…………… 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 - P228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 P229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 P229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 P231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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